한국문화사 제1장 조선인에게 비친 과학 기술4. 조선 지식인의 과학 기술 읽기

상투를 자른 ‘위생’이라는 칼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나라의 문이 열리자 여러 가지 서양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고종과 대신들은 주권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양의 과학 기술을 익혀 국력을 키우고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세계 정세에 너무 늦게 눈을 뜬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 의 주권을 빼앗는 것과 발맞추어, 한반도에 각종 근대 서양 문물을 들여오거나 조선 왕실이 어렵게 들여온 것들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삼았다. 이는 철도·전신·보건·의료와 같은 기술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근대적 행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조선인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을 근대화, 그리고 문명 개화시키기 위해 조선의 국권을 빼앗았다는 논리를 만들어 내고는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조선의 지식인이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조선의 장래를 걱정했으며, 기술의 도입은 환영하면서도 일본의 국권 침탈에는 반대하였다. 다만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근대 과학 기술의 열매는 너무나 탐스러웠기에 일부 지식인들은 철도가 놓이고, 전봇대가 서고, 남녀노소가 우두(牛痘)를 맞는 모습들을, 그 주체가 조선 왕실이건 통감부이건 일제의 총독부이건 간에, 그 자체로 진보요, 발전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단발령 지령>   
단발령을 전국에 실시하기 앞서 내각대신 김홍집이 군부대신에게, 고종이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았음을 알리고 군대에서 단발을 시행할 것을 명한 문서이다.

우리는 단발령(斷髮令)을 둘러싼 논란을 통해 이런 혼란스러운 현실 인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895년 11월 15일에 고종과 태자(뒷날의 순종)는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와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 두 사람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명했다. 유길준은 “위생에 이롭고 일을 함에 편리하게 하기 위해 머리를 잘라야 한다.”는 내부 고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1896년 정초(달력이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뀌어 1895년 11월 16일 다음날 은 1896년 1월 1일이 되었다)부터 방방곡곡의 저잣거리에서 순검(巡檢)들이 강제로 사람들의 상투를 자르기 시작했다. 이는 을미사변으로 들끓던 민심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각지에서 상소와 의병의 봉기가 잇따랐고, 고종은 이 기회를 틈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하여 친일 개화파 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러 개화파 내각을 세웠다. 2월에 수립된 새 내각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의병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사면령은 ‘단발령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국모의 시해에 분개하여 일어난 의병’에 대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출범 직전인 1897년 8월 단발령이 정식으로 취소될 때까지 2년 가까이, 친러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다만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것은 잘못되었으니 자르고 싶은 이들은 알아서 자르라.”는 것이 정부의 공식 태도였다.

친러 내각 아래서도 단발령이 취소되지 않았던 것은 친러 개화파들도 단발 자체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로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주의 열강들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개화파에게, 상투는 이미 버려야 할 거추장스럽고 낡은 것이었다.

서양 보건 의료의 도입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위생’의 관점에서 본 상투는 불결하고, 일하기에 불편하고, 양생(養生)하기에 불리한 백해무익한 존재였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감히 헐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가치는 위생이라는 새로운 가치에 무릎을 꿇었다. 친러파냐 친일파냐를 가리지 않고 개화파 지식인들 사이에는 이미 위생이라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보수적 지식인들과 대다수 민중의 생각은 이와 전혀 달랐다.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가 완력으로 국민의 몸을 다스리는 모습, 그리고 그 뒤에 도사린 일본 제국주의의 속셈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근대 문물이란 하루 빨리 받아들여야 할 것이 아니라 맞서 싸워 물리쳐야 할 대상 이었다. 이들이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며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들이 무지몽매하여 근대적 생활 방식과 위생적 몸가짐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눈에는 근대와 위생의 구호 뒤에 숨어 있는 제국주의의 야심이 뚜렷이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근대 문물과 과학 기술에 대한 견해는 엇갈리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근대가 가져다주는 혁신과 진보를 반겼던 반면, 다른 이들은 근대 문물이 들어오면서 그 전달자인 근대 열강의 입지도 아울러 탄탄해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근대화의 물결에 실려 온 ‘위생’을 명분으로 내세운 칼은 조선인의 상투를 잘랐을 뿐만 아니라, 단발령에 동의하는 사람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마음도 갈라놓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매혹과 야심이라는 근대의 두 얼굴 가운데 한쪽만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고, 근대 서양 문명의 진보 정신과 정복욕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은 조선의 지식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필자]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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