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다른 길로 들어선 남·북한 과학 기술1. 미완성에 그친 과학 기술의 재건

불붙은 해외 유학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우리나라의 고등 교육 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전문학교와 대학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던 고등 교육 체제는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일원화되었다. 또한 각 도별로 한 개의 국공립 대학이 설립되었으며, 대학 부설로 전문부·초급 대학·야간 대학 등이 생겨 고등 교육의 양적 확대를 촉진하였다. 이처럼 고등 교육 체제가 정비되면서 대학 재학생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1955년과 1956년에는 대학 재학생 수가 정원의 두 배를 넘는 현상이 발생했다.

대학 재학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 분야의 고등 교육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학의 이공계 교육에 필요한 인적·물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대학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이제 막 학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도 교수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문과계의 경우에는 새로운 교과서가 일부 등장하긴 했지만 이공계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의 교과서를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실험 실습에 필요한 시설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여 실험 실습 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이공계 교육은 해외 유학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외 유학은 6·25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정상적인 수학이 어려워졌다는 점과 병역 의무를 일시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휴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4년과 1955년에는 매년 1000명을 넘는 사람이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의 유학생 중에서 자연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어섰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기의 20%보다 매우 높은 수치였다. 전쟁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었고 정부도 자연계 분야로의 유학을 장려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사비생(私費生) 신분이었다. 정부는 전쟁을 겪으면서 초래된 재정 악화로 유학생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할 수 없었다. 관비(官費) 유학생은 200명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들 중 대다수는 자연계 분야의 교수 요원들이 차지했다. 게다가 당시의 교수 요원들의 해외 유학도 한국 정부보다는 각종 원조 기구들이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여비 기금을 조성하여 유학생의 출국 및 귀국 여비를 지원하는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정부는 1957년에 해외 유학생의 수준을 향상하고 외환 사정의 악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해외 유학의 요건을 대폭 강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고등학교 졸업 이상으로 되어 있었던 해외 유학생의 자격 기준은 문과계의 경우에는 대학 졸업자, 자연계의 경우에는 대학 2년 수료자 이상으로 강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병역을 필했거나 병역 의무가 면제된 사람에 한해서만 해외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제한했다. 유학 기간은 총 4년으로 되어 있었지만 원자 과학을 전공하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자는 예외적으로 2년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또한 유학생은 매 학기마다 최소한 12학점을 이수하고 평점 C 이상의 성적을 받아야 하며, 승인을 받기 전에는 학교와 학과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도록 하는 규정도 새로이 포함되었다.

1951∼1960년에 해외로 유학을 떠난 사람들의 숫자는 학생 5600여 명, 교수 요원 1100여 명 등 모두 67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해외 유학생 중에서 1960년까지 귀국한 사람은 800여 명으로 전체의 15%에 불과할 정도로 적었다. 다른 개발도상국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고급 인력의 해외 유출, 즉 ‘두뇌 유출(brain drain)’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자신의 전공을 계속 살릴 수 없었고 보수 및 지원이 너무 적었으며, 취업의 기회 또한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이기는 했지만 대학 교수들이 대거 해외로 유학을 떠남에 따라 교수의 공동화(空洞化) 현상까지 초래되기도 했다.

유학 대상국은 미국에 집중되었다. 해외 유학생 중에서 미국으로 간 사람은 전체의 85%에 이르렀고, 미국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 중에서 한국 학 생은 캐나다와 대만 다음으로 많았다. 여기에는 정치·외교 관계의 긴밀성, 학제 편제의 유사성, 각종 기관의 후원 등과 같은 요인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다음으로는 서독·프랑스·대만 등의 순으로 유학을 많이 갔지만 비율은 각각 2∼3%에 불과하였고, 일본으로의 유학은 국교 단절로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이 한국인의 해외 유학은 초기부터 이미 미국으로 편중된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이후에 한국의 학계는 계속해서 미국 유학생이 주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공별로는 자연계의 경우에 공학·의학·이학·농수산학의 순서로 유학생의 수가 많았다. 이학이 순위로는 세 번째였으나 공학과 큰 차이가 없었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은 공업의 수준이 상당히 낙후된 상태에 있어서 공학 전공자가 상대적으로 많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이학 부문은 화학·생물학·물리학 등에, 공학 부문은 화학 공학·전기 공학·기계 공학·건축 공학 등에 해외 유학이 집중되었다. 특히 선진국의 학문적 추세와 국내 화학 공업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화학이나 화학 공학 등의 화학 계열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30%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반면에 당시 한국의 산업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수요가 많았던 지질학·섬유공학 등은 각각 전체의 1∼2%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전공자가 적었다.

한편, 1950년대 중반에 일본의 대학생 중에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23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본 유학생들은 국교의 단절로 인하여 정부의 지원은 고사하고 집안의 송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다수의 유학생들은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서 대학에 다녀야 했다. 일본 유학생의 전공은 문과계 65%, 자연계 35%로 미국의 경우와는 달리 문과계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들 중 대다수가 문과계 지원 경향이 높았던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본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은 매우 많았지만 정부의 무관심과 오랜 기간의 국교 단절로 인해 졸업 후에도 일본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에 한국은 과학 기술자의 부족을 심각하게 겪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다.

[필자] 김근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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