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기술 교육과 연구의 여명
6·25 전쟁 후에는 각종 원조 기관의 후원을 받아 재건 사업이 추진되었다. 여기에는 기술자 해외 파견, 외국 기술자 초청, 용역 계약, 물자 도입 등과 같은 기술 원조도 포함되었다. 기술자 해외 파견은 공무원과 기업체 직원들을 외국에 1년 이내로 파견하여 기술에 관한 실습 훈련을 받는 것을 가리켰다. 외국 기술자 초청의 경우에는 주로 미국인 기술자들이 2년을 임기로 한국에 파견되어 기술 원조에 대한 관리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용역 계약은 특정한 기술 사업에 관한 것으로, 미국이 자국의 기업 또는 학교를 용역단(用役團)으로 선정한 후 한국 정부와 협의를 거쳐 결정하였다. 물자 도입은 과학 기술과 관련된 시설과 장비를 도입하는 것을 지칭했다.
당시의 기술 원조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것은 1955∼1961년에 추진된 서울 대학교 재건 사업이었다. 미국의 원조 기관은 그동안 시행했던 기술 원조의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대규모로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서울 대학교 재건 사업의 형태로 경제 부흥과 연관성이 많은 공과 대학·농과 대학·의과 대학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물론 문리과 대학·사범 대학·법과 대학·행정 대학원 등에도 물자와 재원이 배분되기도 했지만 규모는 매우 작은 편이었다. 서울 대학교 재건 사업은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이 모든 사무를 실질적으로 관장했기 때문에 ‘미네소타 프로젝트(Minnesota Project)’라고도 한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크게 인사 교류·기구 구입·건물 복구·도서 구입 등으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인사 교류는 서울대 교수가 미네소타 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대학에서 학위 과정을 밟고 미네소타 대학의 교수가 서울대의 각 학과에 자문 교수로 파견되는 식으로 추진되었다. 인사 교류를 통해 미국으로 유학 간 사람은 모두 219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공과 대학이 64명, 농·수의과 대학이 57명, 의과 대학이 84명을 차지하였다. 한국에 자문으로 파견된 미네소타 대학의 교수들은 해당 학과에서 학과 조직·교과 과정·교수 구성·실험 설비·도서 등 모든 부문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대상은 공과 대학이었다. 인사 교류를 통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64명의 교수는 공과 대학 전체의 80%에 이르렀다. 그 중 학위를 받은 사람은 박사 5명·석사 14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6개월 내지 1년의 단기 연수를 다녀왔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미네소타 대학으로 파견되는 가운데 몇몇 교수들은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로웰 공과 대학 등으로 보내졌다. 또한 공과 대학에서는 각 과별로 상당한 자금이 기구 구입비와 도서 구입비의 명목으로 배분되었고, 건물 복구와 기숙사 신축 등에도 많은 지원이 이루어졌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공과 대학에 지원된 전체 금액은 250만 달러에 이르렀다.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결과로 서울 대학교는 과학 기술 교육에 필요한 여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교과 과정·교수 인력·실험 설비·도서 등이 갖추어져 1960년대부터는 비교적 충실한 과학 기술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짧은 기간 안에 눈에 띄는 성과를 얻기 위하여 실용성이 강한 공학·농학·의학 분야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기초 과학 분야는 낙후된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또한 원조의 내용이 주로 학사 과정의 교육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교수와 대학원생의 연구 여건은 여전히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분야의 경우에도 연구비가 거의 없어 실질적인 연구 활동은 매우 어려웠다.
195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연구 활동의 명맥을 이어온 기관은 국방부 과학 연구소와 중앙 공업 연구소였다. 대학의 연구 활동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국방부 과학 연구소와 중앙 공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자신의 분야는 물론이고 다른 분야에 대한 연구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 기관에 소속된 연구원들은 잡다한 행정 업무까지 맡고 있어서 연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실제로 수행한 연구 업적도 본격적인 연구 논문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시험과 조사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 기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59년에 원자력 연구소(초대 소장 박철재)가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원자력 연구소의 설립은 1955년에 한국과 미국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그 협정에 따라 한국은 원자력에 대한 정보와 기술은 물론 연구용 원자로와 농축 우라늄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곧이어 정부는 원자력 위원회 규정을 마련하여 원자력 연구소의 설치를 결의하였고, 1956년에는 문교부 내에 원자력 업무를 전담하는 원자력과가 설치되었다. 문교부 원자력과의 주도하에 원자력 관계자들이 미국 등지로 파견되어 본격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원자력의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각종 전시회도 개최되었다. 마침내 1958년 2월에 원자력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1959년 1월에는 원자력원이 개원하였고, 같은 해 3월에는 원자력원의 산하 연구 기관으로 원자력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원자력 연구소의 설립을 배경으로 1958년 8월부터는 연구용 원자로를 구매하기 위한 작업이 추진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다양한 형태의 연구용 원자로가 있었는데, 한국의 구매단은 최종적으로 TRIGA-MARK Ⅱ를 선택하였다. 계획된 예산으로 구매가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가 비교적 단순하여 안정성이 좋았고 다양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연구용 원자로에 대한 기공식은 1959년 7월에 거행되었지만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 등의 정치적 격변을 배경으로 계속 지연되어 1962년 3월부터 가동되었다. 그 후 원자력 연구소는 방사선과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기초 과학 및 응용과학에 대한 연구에 주력하였다.
창립 당시에 원자력 연구소의 인원은 47명이었고, 예산은 7000만 원을 넘어섰다. 당시 중앙 공업 연구소의 예산 규모가 200만 원 내외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획기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원자력 연구소의 주된 업무는 원자력에 관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과학 기술의 모든 분야에 걸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소의 지원을 바탕으로 연구소 내·외부의 많은 과학 기술자가 연구 활동을 벌였고, 성과는 연구 논문이나 연구 보고서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아울러 원자력 연구소는 매년 원자력 학술 회의의 개최를 주도하면서 과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제 원자력 기구(IAEA)를 비롯한 외국 기관과 계약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원자력 연구소의 설립을 전후하여 ‘원자력 유학’이라고도 불리는 해외 유학 지원 사업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원자력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56∼1963년의 7년 동안에 원자력 유학생은 모두 189명에 이르렀고, 그 가운데 125명이 국비 유학생의 혜택을 받았다. 원자력 유학은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함께 우리나라가 역사상 최초로 서양의 과학 기술을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더 나아가 원자력 연구소는 과학 기술계 내부의 논의와 건의를 수렴하는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과학 기술을 전담하는 행정 부서가 없는 상태에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원자력 연구소는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많은 과학 기술자가 원자력 연구소를 매개로 한자리에 모여 과학 기술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개별 과학 기술 분야의 활성화는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과학 기술을 진흥하는 방안도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이,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활동은 미진한 형태였으며, 몇몇 기관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갔다. 광복 직후에는 정치적 논쟁과 국대안 파동을 배경으로 과학 기술계가 표류하고 있었으며, 6·25 전쟁으로 과학 기술이 황폐화되는 가운데 과학 기술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도 국내에서는 이공계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유학을 통해 과학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형편이었다. 다만 1950년대 후반에 서울 대학교 재건 사업이 추진되고, 원자력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과학 기술의 교육과 연구를 위한 여건이 확보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광복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 우리나라 과학 기술의 재건은 미완성에 그쳤고, 1960년대 이후에야 체계적인 과학 기술 활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