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과학 기술 인력의 양성
1960년대까지 과학 기술 인력 정책은 주로 양적 수급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의 국내 배출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당시 각 대학의 대학원 과정은 실험 설비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론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대학원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은 해외 유학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것은 역으로 국내 대학원이 더욱 부실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1970년의 경우에 이공계 대학원 정원은 1600여 명이었지만 졸업생은 석사 225명, 박사 14명에 불과하였다. 고급 과학 기술 인 력의 수급은 해외 과학 기술자의 유치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의 부족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초점이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옮겨가면서 심각한 문제로 작용하였다. 외국에서 기술을 도입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소화하거나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연구 개발 활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국내에 모범적인 이공계 대학원을 설립하여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자체적으로 양성하는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68년에 KIST는 부설 기관의 형태로 이공계 대학원을 설립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문교부와 경제기획원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새로운 형태의 이공계 대학원은 1971년에 한국 과학원(KAIS)을 설립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한국 과학원의 설립에는 당시 뉴욕 브루클린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정근모(鄭根模) 박사가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69년 1월에 자신의 은사로서 미국 국제 원조처(USAID) 처장으로 임명된 한나(John A. Hannah)를 만났다. 한나는 정근모에게 한국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고, 정근모는 이공계 대학원의 설립을 건의하였다. 같은 해 4월과 10월에 정근모가 제출한 제 안서를 바탕으로 한나는 한국 정부의 의향을 타진하였다. 결국 그 제안서는 1970년 4월에 대통령이 주재한 월례 경제 동향 보고회에 상정되어 통과되었다.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문교부가 반대라니까 과학기술처가 이공계 대학원 설립 안을 추진하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1970년 6월에는 한국 과학원 설립 자문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터만(Frederick Terman)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터만 조사단은 1970년 12월에 한국 과학원의 목적·규모·운영 방식 등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에는 한국 과학원이 “기본 지식의 창출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계와 연구계가 필요로 하는 고도로 훈련된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 과학원은 1971년 2월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973년부터 신입생을 받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한국 과학원의 설립과 운영을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우수한 교수를 유치하기 위하여 교수 전용 아파트를 신축하였고, 국립대학 교수의 세 배에 달하는 급여를 제공하였다.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이 면제되었고 2인 1실의 기숙사가 제공되었으며, 병역 특례의 혜택도 주어졌다. 한국 과학원이 1971∼1975년에 정부로부터 지원받았던 금액은 약 92억 원에 달했는데, 같은 기간에 정부가 국내 대학 전체에 지원했던 실험 실습비가 약 150억 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실로 파격적인 액수였다. 이러한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은 한국 과학원이 한국 과학원법에 따라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특수한 법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국 과학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기존의 대학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교수 지원의 자격을 박사 학위 취득자로 한정했으며,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교수에 대한 공개 채용을 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모든 교수를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인재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도 활용되었다. 한국 과학원이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방식도 혁신적이었다. 한국 과학 원은 우리나라 최초로 실험과 연구를 중심으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였다. 실험실 훈련, 실용적 연구 주제, 엄청난 숙제 등은 다른 대학에서 거의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교육 강도가 얼마나 강했던지 한국 과학원 학생들 사이에는 ‘군대 가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 과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고급 과학 기술 인력을 배출하였다. 한국 과학원은 1975∼1980년에 석사와 박사를 1000명 이상 배출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전체에서 매년 양성되는 이공계 석·박사의 30%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 과학원 학생들은 학업 기간 중에 산업체에서 수탁한 연구나 실용성이 강한 연구를 수행했기 때문에 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강했다. 한국 과학원의 졸업생들은 1970년대에는 주로 정부 출연 연구 기관에 취직했으며, 기업 연구소가 활성화된 1980년대 이후에는 기업으로도 활발히 진출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한국 과학원은 물론 다른 대학의 이공계 대학원에 대한 지원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대거 설립되면서, 한국 과학원만으로는 급증하는 고급 과학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과학기술처는 1977년에 한국 과학 재단을 설립하여 연구 장려금과 연구 장학금을 지급하고 학술 활동·국제 교류·산학 협력 등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81년에는 문교부가 한국 학술 진흥 재단을 설립하여 이공계 대학원을 포함한 대학의 연구 활동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이공계 대학원은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1985년의 경우에는 이공계 대학원의 졸업생 수가 석사 3920명, 박사 505명을 기록하였다.
이공계 대학원 교육의 발전에는 정부의 지원 못지않게 국민의 고등 교육에 대한 열의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것은 대학의 재정이 수업료를 비롯한 자체적인 조달에 크게 의존해 왔다는 점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학원생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금액도 전체 학비와 연구비 규모에 비추어 본다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아울러 1980년대 초만 해도 국내 대학원은 박사급 인력의 양성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박사급 인력은 해외 한국인 과학 기술자를 유치하는 사업을 통해 확보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수는 1985년까지 영구 유치자 581명, 일시 유치자 477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