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궁정 연회의 전통과 정재의 역사적 전개1. 궁정 연회의 규범

행렬 의식과 정재의 공연

행렬 의식은 특별한 계기를 맞이하여 궁궐 밖 연도에서 거행하는 일련의 의전 행사를 이른다.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환궁하는 임금을 환영하거나 개선장군 및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행차가 지나가는 거리 곳곳에서 여러 가지 예식 절차와 공연 행사가 베풀어진다.

고려시대의 행렬 의식은 연등회를 통하여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사』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에 따르면, 연등회는 강안전(康安殿)에서 궁중 연향으로 거행하는 소회(小會)와 대회(大會), 봉은사에서 태조의 어진(御眞)을 배알하는 알조진의(謁祖眞儀)로 구성되었다. 2월 14일 소회를 마치고 봉은사에 행차하거나 다시 궁궐로 돌아올 때는 임금과 시위대의 행차가 거리를 지나가게 되며 연도에서 벌어지는 행렬 의식이 거행된다. 환궁하는 임금을 환영하는 행렬 의식은 매우 화려하여 음악 연주와 기녀들의 춤이 공연되었고 거리는 구경꾼으로 북적거렸다고 한다.42)

『고려사』 연등위장(燃燈衛仗)에서 임금이 봉은사로 거둥하는 행렬 의식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행차를 전도하는 선배대(先排隊)를 필두로 어가(御駕) 및 의장 그리고 의물을 담당하는 군사들이 임금의 행차를 시위하는데 그 인원이 대략 1,900명에 이르렀다. 어가와 시위대의 행렬은 화려하고 대규모여서 그 자체로 커다란 볼거리였다. 어가의 앞뒤에는 교방악과 잡기, 고취악을 담당한 인원들이 행렬을 이루어 음악과 잡희를 공연하였다.

어가를 이끌면서 교방 악관(敎坊樂官) 100인이 좌우로 나뉘어 가고, 안국기와 잡기 각 40인이 좌우로 나뉘어 간다. 취각 군사(吹角軍士) 16인이 좌우로 나뉘어 함께 어가의 앞에 서고 취라 군사(吹螺軍士) 24인은 어가의 뒤에 선다.43)

교방 악관 100명은 악사와 기생으로 구성되었다. 어가의 전후에 늘어선 취각 군사와 취라 군사가 행차의 의식 음악을 담당했다면 교방 악관은 정해진 장소에 행렬을 멈추고 교방 가무희, 곧 정재를 공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황은 조선시대 임금의 환궁 의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종묘에서 부묘(祔廟) 의식을 거행한 후에 베풀어진 환궁 의식의 절차다.

의금부(義禁府)의 군기감(軍器監)이 종묘의 동구(洞口)에서 나례를 올리고, 성균관(成均館)의 학생들이 종루(鐘樓)의 서가(西街)에서 가요(歌謠)를 올리고, 교방 사람들이 혜정교(惠政橋) 동쪽에서 가요를 올리고, 이어 정재한다. 그리고 또 광화문 밖의 좌우에다 채붕(綵棚)을 맺는다. 어가가 광화문 밖의 시신 하마소(侍臣下馬所)에 이르러 잠시 멈추면, 시신이 모두 말에서 내려 나누어 서서 몸을 굽혔다가 지나가면 몸을 바로 한다. 어가가 근정문(勤政門)에 이르면 악이 그친다.44)

종묘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연도에는 환궁 의식를 위한 네 군데의 행사 장소가 마련되었다. 첫 번째 장소인 종묘의 동구 밖에서 의금부와 군기감이 주관하여 길 양쪽 좌우에서 나례 잡희를 공연한다. 두 번째 장소인 종루의 서쪽 거리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을 칭송하는 내용의 가요를 바친다. 세 번째 장소인 혜정교 동쪽에서는 교방에서 역시 임금에게 가요를 올리고 정재를 공연한다. 네 번째 장소인 광화문 밖 길가에는 좌우 양쪽으로 채붕을 가설한다.

교방에서 가요를 올리고 정재를 공연하는 절차는 ‘교방가요(敎坊歌謠)’라 하여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있다.

1. 길 가운데에 침향산 지당(沈香山池塘), 화전벽(花甎碧), 가요축함탁(歌謠軸函卓) 등을 설치한다.

2. 제기(諸妓) 100명이 침향산의 좌우에 갈라선다.

3. 대가(大駕)가 이르면 고취가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연주하고 제기가 노래 부른다.

4. 박을 치면 도기(都妓)가 손을 여미고 족도하여 나아가 꿇어앉는다.

5. 연소기(年少妓) 두 사람이 가요축을 넣은 함을 받들어 도기의 오른쪽에 꿇어앉는다.

6. 도기는 첨수(尖袖)로 축(軸)을 받들고 서며 여러 기녀들도 함께 꿇어앉는다.

7. 승지(承旨)가 도기에게 축을 받아 받들어 바친다.

8. 내시가 전해 받아 임금에게 바친다.

9. 도기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사수무(四手舞)를 춘다.

10. 도기가 물러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제기가 동시에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족도한다.

▶악작 학무(鶴舞)·연화대(蓮花臺)

▷악지

11. 전후부 고취가 환궁악(還宮樂)을 연주하면 침향산을 화전벽 뒤로 끌어간다.

12. 제기는 뒷걸음질하면서 금척무(金尺舞)를 추며 좌우로 갈라선다.

13. 대가가 궐문에 이르는 동안 전진하다 머무르면 또 정재를 공연한다.

교방에서 임금에게 가요를 바치는 절차 역시 예악론에서 이르는 예의 차별과 질서를 구현한 것이다. 탁자 위 함에 담겨 있던 가요축은 연소기→도기→승지→내시를 거쳐 임금에게 바쳐진다. 궁중 연향에서 작을 올릴 때 집사자가 매개하여 예식을 거행하는 양상과 같다. 가요를 바치는 예가 끝나면 조화와 화합을 강조하는 악으로서 학무와 연화대가 공연된다.

<지당판>   
『악학궤범』에 실린 지당판을 옮겨 그린 것이다. 지당판은 연못 또는 바다 위에 연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한 공연 도구다. 학무에서는 청학과 백학 두 마리가 지당판 위의 연통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가 나오게 된다.

연화대는 『고려사』 「악지」에 당악 정재로 수록되어 있고 학무는 『악학궤범』에 시용향악정재(時用鄕樂呈才)로 등재되어 있다. 정재의 형식 및 형성 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와 공연 방식이 흡사하여 합설(合設)에 매우 적합하였다. 『고려사』 「악지」에 따르면, 동녀가 “두 연꽃 속에 감춰져 있다가 꽃이 터진 후에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무대 위에서는 그러한 모습을 실제로 연출하지 않고 다만 창사(唱詞)를 통하여 “봉래산에 머물러 있다가 내려와 연꽃에 태어났도다.”라고 표현할 뿐이다. 반대로 학무에서는 연못 또는 바다 위에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을 한 공연 도구인 지당판(池塘板)을 사용하며 청학과 백학 두 마리가 지당판 위의 연 통(蓮筒)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가 나오게 된다.45) 학무에는 창사가 없다. 따라서 학무와 연화대를 합설하였을 때 학무의 장경 연출과 연화대의 창사가 어울려 형식과 내용이 더욱 정밀해진다고 할 수 있다.46)

궁중 연향에서는 학무에서 지당판을 사용하지만 행렬 의식의 교방가요에서는 침향산 지당을 사용한다. 침향산 지당은 지당판 위에 산의 모형이 추가된 형태로 판 아래 윤통(輪桶) 네 개를 달아 끌 수 있게 하였다. 교방가요는 어가의 행렬이 지나는 연도에서 베풀어지므로 공연이 끝나면 길 가운데 세워 둔 침향산을 끌고 가 신속하게 길을 터주어야 한다.

교방가요에서는 광화문에 이르는 동안 어가의 행렬이 전진하다 멈출 때마다 여러 가지 정재를 공연하였다. 궁중 연향에서는 고정된 공간에서 작을 올리는 순서에 맞추어 정재를 공연하였다면 행렬 의식에서는 공간을 이동하면서 정해진 장소에 이르면 정재를 공연하였다. 정재의 반주도 궁중 연향에서는 등가악(登歌樂)을 사용하였다면 행렬 의식에서는 고취악(鼓吹樂)을 사용하였다. 또한 행렬 의식에서 정재를 공연할 때는 진지한 관람을 어렵게 하는 여러 가지 장애 요인이 있었으므로 궁중 연향 때와 달리 공연 방식을 간소화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필자] 사진실
42)전경욱, 『한국의 전통 연희』, 학고재, 2004, 173쪽.
43)『고려사』 권72, 지26, 여복(輿服), 의위(儀衛), 연등위장(燃燈衛仗).
44)『세종실록』 권135, 세종오례, 흉례의식(凶禮儀式), 부묘의(祔廟儀).
45)이혜구는 『악학궤범』을 번역하면서 연화대의 창사 내용 및 학무의 장경 연출 방식을 들어 두 정재가 응당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이혜구,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332쪽).
46)박은옥, 「자지무(柘枝舞)와 연화대(蓮花臺), 그리고 그의 변천 과정」, 『한국 전통 음악학』 3, 한국전통음악학회, 2002, 184∼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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