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궁정 연회의 공연 공간
궁정 연회를 거행할 때 제도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정해진 법식이 있었듯이 궁궐의 건축 공간을 연회 공간 또는 공연 공간으로 전환할 때에도 전례에 따른 규식을 지키고자 하였다. 궁정 연회와 의식의 기록인 각종 의궤류는 당대에 거행된 행사를 기록하여 전례를 남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의궤에 수록된 도식은 공연 현장을 생동감 있게 포착하지는 못하였으나 행사장의 설비와 좌석 배치 등을 정밀하게 묘사한 장점이 있다. 병풍 등에 남은 기록화는 정밀성은 떨어지나 공연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록화와 의궤의 도식을 보완적으로 활용하여 궁중 연향과 행렬 의식에 나타난 공연 공간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47)
궁정 연회의 공연 공간은 단지 정재가 공연된 현장을 탐색하는 그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문화사 영역에서 소외되었던 우리나라 극장사의 전통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극장(劇場)’이란 말 그대로 연극 따위를 공연하는 장소다. 관객이 있는 객석과 공연자가 있는 무대가 구성되면 이를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극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기능과 의미를 달리 하면서 변천해 왔다. 그 오랜 변천 과정에서 제사 의식이 치러지는 신전(神殿)에 부속된 극장도 생겨났고, 궁궐이나 개인의 저택에 딸린 사설 극장도 생겨났으 며, 대중에게 개방되어 상업적으로 운영되는 극장도 생겨났다.
근대적인 극장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도 오랜 극장사의 전통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극장 문화의 다양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유형(有形)의 극장뿐 아니라 무형(無形)의 극장이 존재할 수 있다. 거리를 행진하며 공연을 하는 경우 도시 전체가 하나의 극장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다. 또한 유형의 극장은 고정적인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임시 설비로 존재할 수 있다. 광장에 무대나 객석을 임시 가설하여 극장의 형태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정 건축물로서 극장은 공연을 위한 전용 극장, 다목적형 극장 공간, 일상 공간을 전환한 극장 공간 등으로 나뉠 수 있다.
무형의 극장 공간, 임시 가설된 극장 공간, 일상 공간을 전환한 극장 공간 등은 공연이 끝나면 사라진다. 이들 극장 공간은 당대의 문화적 관습으로 존재하였을 뿐 후대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건축물의 자취를 남길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일단 우리나라 극장사가 제대로 인식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선시대 정재의 공연 현장을 담은 풍부한 회화 기록이 남아 있어 공연 공간의 전통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47) | 궁정 연회의 공연 공간에 대해서는 사진실, 「중세 궁정 극장의 규범」, 앞의 책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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