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전쟁의 흔적4. 임진산 유적과 광교산 전투의 흔적

또 다른 광교산 전투

임진왜란은 조선을 전장으로 하여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계속된 동아시아 세계의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일본, 명 모두에게 큰 변화를 가져온 이 전쟁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이전까지의 연구는 주로 일본 학계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7년 전쟁 기간 중 주로 1592년의 초전(初戰)에 국한하여 자국군이 우세를 보인 전투에 역점을 두었고,179) 이를 통해 자국의 영토 확장을 위한 일본군의 승리를 강조하였다. 반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거치면서 국난을 극복하였던 점에 대한 강조가 중심을 이루었다.180) 즉, 전란 극복의 역사로 이해한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이 임진왜란은 승리한 전쟁이라는 평가다.181)

허선도는 일본군의 적극적인 공세는 임진년 초전의 약 2개월과 정유재란 초기의 약 2개월을 합한 4개월 정도에 불과하였을 뿐 거의가 교착 상태 내지는 우리 측의 우세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측이 패배한 것으로 인식된 데에는 일제 식민 사학의 악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크게 이겼느냐 아니면 철저한 패전이었느냐 하는 문제만으로 이 전쟁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보다는 이 전쟁이 얼마나 처참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182) 더불어 임진왜란이 일어난 첫 2개월 동안에 왜 그토록 철저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만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2개월 동안의 전투 중 가장 큰 패배라고 할 수 있는 광교산 전투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로부터 약 45년 뒤인 1637년 1월에 벌어진 병자호란 당시의 광교산 전투와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는 한편으로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임진산과 주변 지역의 유적이 어느 시기와 관련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선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 전투의 현황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83)

1636년 12월 13일에 병자호란이 발발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선 조정은 강화도-서울-남한산성을 중심으로 거점 방어를 하여 청군을 격퇴할 것을 구상하고, 이 거점들의 방어 태세를 정비하였다. 한편,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근왕병을 일으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어 12월 20일에는 인조가 직접 납서(蠟書)를 통해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조속히 근왕병을 이끌고 수도권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인조의 근왕 명령을 받은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은 각 고을 수령들에게 명하여 6,000여 명의 근왕병을 모집한 다음, 12월 29일에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해 진군을 개시하였다. 이때 화엄사(華嚴寺)의 승려인 벽암(碧巖) 각성(覺性)도 각각 1,000여 명씩의 승병(僧兵)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을 이끌고 근왕 대열에 합세함으로써 전라도 근왕 병의 수효는 8,000여 명에 달하였다.

<남한산성 전경>   
북한산성과 더불어 남북으로 한양을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이곳으로 피란하여 45일 동안 농성하다가 항복하였다.

이시방과 김준룡은 1637년 1월 1일에 직산(稷山)에 당도하여 남한산성에 장계를 올리고,184) 곧바로 양지(陽智) 방면으로 향했다. 1월 2일에 양지에 도착한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먼저 남한산성으로 진군하게 한 다음,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이때의 양지는 현재의 양지 중심부에서 좀 더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1월 4일에 병사 김준룡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 남방 100리 지점의 용인 광교산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김준룡은 광교산 7부 능선에 군사를 배치하고, 군량과 화약 등 주요 군수 물자를 진영 중앙에 비축하여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춘 다음, 군관을 시켜 남한산성으로 장계를 올렸다.185) 이는 일종의 방어선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월 2일에 험천현(險川峴)에서 충청도 근왕병을 격파한 청나라 장수 양굴리(楊古利)는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쪽의 구미리·동원리 일대(지금의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주변)에 배치하여 광교산의 김준룡 부대와 남한산성의 연락을 차단하게 하는 한편, 주력 5,000명을 이끌고 광교산 주변의 점촌·상손곡·이목동·간리·고기리·고분현 일대(지금의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일대)로 진출하여 근왕병 진영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청군은 다수의 화포와 병력을 동원하여 1월 5일 온종일 여러 차례에 걸쳐 근왕병 진영에 공격을 가하였다. 이는 김준룡 부대가 도착하여 부대 배치를 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호병도(胡兵圖)>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 1775)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나라 군사의 모습이다. 이를 통하여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전라도 근왕병은 이와 같은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방진(方陣)을 펼쳐서 맞섰다.186) 방진은 날래고 용감한 병사를 뽑아서 만든 네모난 진을 말하는데, 사면이 모두 밖을 향하게 하고 군량은 진의 한가운데 두어, 언제든지 적병과 대적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진영 주변에 목책을 구축하고, 제1선에 포수(砲手), 제2·3선에는 각각 궁병(弓兵)과 창검병(槍劍兵)을 배치하였다. 그런 다음 청군이 공격할 때에는 총포로 집중 사격하여 타격을 가하고, 청군이 퇴각할 때에는 궁병과 창검병이 배후를 쳐서 큰 전과를 올렸다.187)

한편, 김준룡 부대는 밤마다 횃불을 들고, 공포를 쏘아 그들이 광교산에 진출해 있다는 것을 남한산성에 들리게 하였다.188)

청군은 광교산의 근왕병에 대한 공격이 여의치 않게 되자, 1월 6일에 또 한 번 공격을 시도하였다. 양굴리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광교산 공격에 투입하였다. 청군은 호준포(虎蹲砲)의 위력을 앞세워 조선군 진영으로 육박하고 많은 화살과 돌을 퍼부었으나 근왕병들의 대오는 끝까지 유지되었다.189)

그러나 오후 늦게 청군의 일부가 광교산 동남편의 조선군 진영 후면 광 양 현감 최택(崔澤)의 방어 진지를 뚫어 돌파구를 확보하였다. 청군이 조선군 진영 안으로 돌입하자, 광교산 북방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김준룡은 급히 휘하의 군사를 몰아 진영 후면으로 달려가 청군과 혼전을 벌였는데, 이 혼전 중에 근왕병의 포수가 양굴리를 사살하였다.

<호준포>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전래한 화포다. 포를 발사하기 위하여 설치한 모습이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같다는 데서 호준포라 이름하였다. 병자호란 때 광교산에서 근왕병과 싸운 청군도 이와 같은 호준포를 사용하였다.

근왕병 부대는 주장의 전사로 청군의 전열이 와해된 틈을 타서 일제히 반격하여 청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청군은 결국 병력의 태반을 상실하고 광교산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동원리로 패주하였다.190) 전라 병사 김준룡이 이끄는 근왕병의 광교산 승첩은 병자호란이 발발한 이래 조선군이 거둔 최초이자 최대의 승리였다.191)

크게 패퇴한데다가 날까지 저물자 청군은 징을 쳐서 병졸을 철수시키며, “내일을 기다려 결전(決戰)하자.”고 외쳤다.192) 김준룡 부대의 여러 부장들은 청군이 필시 대규모의 병력으로 복수전을 기도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그에 대비하여 광교산 주변의 계곡 일대에 복병을 배치하여 항전 태세를 갖추자고 주장하였다.193) 그러나 김준룡은 “화살이 다되고 양식도 떨어지게 되었으니, 내일 다시 싸우면 반드시 위험할 것이다.”라며, 곧 말을 타고 병력을 수원 방면으로 철수시키니,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났다. 이는 양지에 머무르고 있던 전라 감사 이시방의 부대에 김준룡 부대가 수원 방면으로 퇴각하고 있다고 잘못 전달되어 1월 7일에 이시방의 부대도 공주 방면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수원 방면으로 철수한 김준룡 부대는 감사가 지휘하는 본대와의 연락이 두절되어 수원에서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형세를 관망하게 됨으로써194) 병자호란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필자] 양정석
179)池內宏, 『文祿慶長の役』, 吉川弘文館, 1987.
180)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추이와 과제」, 『조선 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 124쪽.
181)허선도, 「임진왜란론-올바르고 새로운 인식-」, 『천관우 선생 환력 기념 한국 사학 논총』, 정음문화사, 1985 ; 허선도, 「임진왜란사론(壬辰倭亂史論)-임란사(壬亂史)의 올바른 인식-」, 『한국사론』 22, 국사편찬위원회, 1992.
182)“임진왜란 어떻게 볼 것인가” 좌담회(1997. 11) 중 최영희의 발언 내용 :『새롭게 다시 보는 임진왜란』, 1999, 국립 진주 박물관.
183)이하는 유재성, 『병자호란사』, 1986과 『용인시사』, 2006을 바탕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184)유재성, 앞의 책, 203쪽.
185)『인조실록』 권34, 인조 15년 1월 을사 ; 『병자록(丙子錄)』, 「급보이후일록」, 정축 1월 5일.
186)『병자록』, 「기각처근왕사(記各處勤王事)」
187)유재성, 앞의 책, 204쪽.
188)『연려실기술』 권26, 「인조조고사본말」, 제장사적(諸將事蹟).
189)『연려실기술』, 앞의 기사.
190)유재성, 앞의 책, 204쪽.
191)유재성, 앞의 책, 205쪽.
192)『연려실기술』, 앞의 기사.
193)유재성, 앞의 책, 205쪽.
194)유재성, 앞의 책,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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