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전쟁의 흔적4. 임진산 유적과 광교산 전투의 흔적

두 광교산 전투의 비교를 통한 임진산 유적의 확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병자호란 때의 광교산 전투 상황은 임진왜란 당시와 상당 부분 유사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전투는 가장 큰 패배를 당하였고, 다른 한 전투는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결과는 어떤 차이에서 기인하는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중앙 정부에서 수도 방위에 실패하자 전국에서 근왕병을 소집한 점이 유사하다. 물론 임진왜란 때에는 하삼도를 합한 근왕병으로 규모가 병자호란 때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중심이 전라도 근왕병이라는 것은 비슷하다. 다만, 전라도에서 이 지역까지 오는 경로는 차이가 있다. 병자호란 때의 근왕병은 직산을 거쳐 양지로 갔던 데 비하여 임진왜란 때의 근왕병은 전주-익산-임천-대흥-예산-온양-진위-수원-용인으로 가는 길을 이용하였다. 그 이유가 병력 수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목적지가 한양과 남한산성으로 달랐기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병력 규모나 진격 경로가 다른 것보다 더 큰 차이는 조선군이 실제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병자호란 당시에는 만들 수 있었던 반면에 임진왜란 때에는 만들 수 없었다는 점이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전라 감사 이시방의 명에 따라 전라 병사 김준룡의 부대가 먼저 광교산 중턱에 진을 치고 부대를 정비한 후 전투에 임하였으나 임진왜란 당시에 이광은 여러 부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동 중인 부대를 아무런 배후지 확보 없이 그대로 전투에 참가시켰다. 게다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의하면 이광이 이전의 원한을 가지고 군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부장 중 한 사람인 백광언을 곤장으로 심하게 쳤다고 한다. 그러자 백광언이 분하여 “차라리 적에게 죽겠다.” 하고 상처 부위를 싸매고 일어나 이지시와 함께 나가서 적과 직접 육박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에 군대를 지휘하는 문신들이 전투에 임하면서 지닌 전술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한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투 지역은 같은 광교산이라고 하지만 위치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즉, 병자호란 때의 전투와 관련된 지역은 현재의 광교산 동북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수지 동천동 주변이 주전장이었고, 임진왜란 당시는 좀 더 복잡한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광교산 전투와 관련된 지명은 병자호란 때의 지명보다 훨씬 단순하며 북두문산과 문소산 등 왜군이 설치한 보루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어 현재의 명칭과 연결시키기도 어렵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유추하여 해당 지역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삼남의 근왕병은 용인현성 남쪽 10리 지점에 도착하여 왜군의 보루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보루에 주둔한 왜군과 진격로 등을 정탐한 결과 길이 좁고 나무가 빽빽해서 쉽게 진격할 수 없었으며, 적이 유리한 지형에 견고한 진지를 확보하고 있고, 적을 올려다보면서 공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광의 명령에 따라 북두문산의 왜군 진지를 공격하였는데,195) 선봉에 서서 진격하던 백광언은 북두문산의 보루에서 나무와 물을 구하러 나온 적병 10여 명을 참살하였다. 이어 야음을 틈타 보루를 기습 공격하여 10여 명을 참살하고 목책을 불태웠다.

이 내용을 통해 볼 때 북두문산으로 가는 길이 좁고 왜군의 보루도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용인현의 남쪽 10리에서 보였다는 것이 용인현의 남쪽에 북두문산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위치인지 분명하지 않다. 수원(지금의 화성)에서 용인(지금의 구성읍)으로 오는 방향을 고려한다면 신갈 방향에서 경부 고속도로와 같은 노선을 이용하여 올라갔을 수 있기 때문에 용인보다 북쪽에 대한 내용까지도 확인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당시 보았다는 것도 일종의 척후를 통해 확보된 정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왜군이 점령한 곳이 읍치 지역이었는지 아니면 도로상의 요충지였는지 하는 점도 문제다. 여기서는 이들이 일단 북두문산과 문소산에 보루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도로상의 요충지에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이들이 만든 보루에는 식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사용하던 간선 도로의 옆에 위치한 얕은 구릉 지대에 이들이 만든 보루가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북두문산에 배치되었던 왜군은 문소산으로 퇴각하여 방어 태세를 강화하였다. 더불어 한양의 본대에 긴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광의 명령에 따라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은 각각 정병 1,000명을 거느리고 용인현성의 북쪽에 있는 문소산의 적 보루를 공격하였다. 왜군은 문소산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조총을 사용하여 조선군의 접근을 막으면서 본대가 구원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대동여지도의 문수산>   
1861년(철종 12)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중 광교산 근처 지도다. 문수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하였던 문소산과 관계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구원 요청을 받은 한양의 와키자카 본대는 정오 무렵에 북소산 부근에 도착하여 문소산의 왜군과 깃발로 서로 연락을 취해 공격 준비를 하였다. 이어 왜군은 근왕군의 동쪽 측면을 공격하였고, 문소산 보루의 왜군도 목책 문을 열고 일제히 공격해 왔다. 왜군의 전면 공격으로 이지시와 백광언을 비롯하여 고부 군수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이 전사하였으며,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어 조선군은 패하여 흩어졌다.

여기에서 문소산(文小山)이 지금의 어디인지도 역시 명확하지 않다. 다만 대동 여지도(大東輿地圖)에는 광교산 인근에 문수산(文殊山) 있고 동여도(東輿圖)에는 문현산(門縣山)이 있는데 이 지역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현재 죽전에서 광주로 넘어가는 대지 고개의 앞에 있는 산일 것이다.

<동여도의 문현산>   
19세기 중엽에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 중 광교산 근처 지도다. 문현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던 문소산과 관계 있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지도에 보이는 수원은 조선 후기 이치(移治) 이후의 수원이다.

이곳에서 패전한 군사를 수습한 이광은 병력을 용인 서북쪽의 광교산으로 퇴각시켜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날 전투의 패배로 조선군은 밤중에도 기습당할 것을 공공연히 두려워할 정도로 사기가 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왜군은 조선군이 아침밥을 먹는 틈을 타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금가면을 쓴 적병 5명이 선두에서 백마를 타고 백색 교룡기를 등에 짊어진 채로 대검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으며, 이어 주력군 1,000여 명이 조총과 활을 쏘고 창검을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이를 통해 볼 때 이광이 퇴각한 광교산은 병자호란 당시 근왕병이 진지를 구축하였던 산 중턱이 아니라 비교적 넓은 평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5만여 명에 이르는 많은 병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열의 재정비라는 것이 야밤의 기습을 대비하기도 어려운 정도로밖에 이루어지지 못하였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조선군은 충청 병사 신익의 군사를 시작으로 전군이 혼비백산하여 군수품을 모두 버린 채로 패주하였다. 근왕군의 주장이었던 이광도 군사를 수습하여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급히 도주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남도 근왕군 5만여 명은 용인에서 2천여 명이 채 못 되는 왜군에게 궤멸되었고, 이후 한동안 관군 중심의 전투는 사라졌다.

이렇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광교산 지역에서 벌어졌던 두 전투 상황의 비교와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지리적 상황에 대한 검토를 통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병자호란 때의 주요 전장은 판교와 붙어 있는 동천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교산의 동남쪽 기슭이었던 데 비하여 임진왜란 때의 주요 전장은 그보다 남쪽으로 더 내려와 있는 죽전과 수지 풍덕천 지역이다. 따라서 광교산 기슭이라는 것도 병자호란 당시에는 좀 더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간 지역이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교산의 외호를 두르는 마지막 구릉상과 평지가 연결된 부분이었다. 이는 문소산 보루에서 퇴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머물러 숙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앞에서 살펴보았던 마북리에 급조된 석축 유구는 누가 만든 것인가 하는 부분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석축 유구가 무엇을 막기 위해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만으로 당시의 관방 시설 전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구의 방향을 통해 볼 때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것임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온 승자계 총통을 통해 볼 때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이 지역은 용인 읍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소규모의 병력으로도 상당 기간 방어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판단된 다. 이는 수풀이 우거진 소로로 인해 공격하기 어렵고 구릉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방어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설명하였던 백광언과 권율의 발언 내용과 흡사하다. 따라서 이 석축 유구는 당시 북두문성과 관련이 있는 왜군이 임시로 만든 보루 시설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문소산은 현재 그 유적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지역이 지금도 판교나 분당에서 내려오면 바로 만나는 죽전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측할 따름이다.

<감로탱의 전쟁 장면>   
1701년(숙종 27)에 그린 상주 남장사(南長寺) 감로탱화(甘露幀畵) 하단의 전쟁 장면이다. 양쪽 진영의 수장(首將)은 병풍을 두르고 있고 보병과 기병이 서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데 조총을 쏘는 병사도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군에게 큰 타격을 준 조총은 감로탱의 화폭에 반영될 정도로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제 조선의 삼남 근왕병이 문소산의 패배 이후 전열을 재정비하였던 곳이 어디인가 하는 부분이 남는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급하게 후퇴하면서 방어선을 만들고 5만의 병사가 주둔을 할 수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곳이 현재 수지 구청이 있는 지역이다. 여기는 광교산을 끼고 있으면서 대군이 동시에 아침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부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너편에 위치한 임진산 유적에서는 조선 초기 이래의 각종 기와들이 같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곳에 당시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따라서 삼남 근왕병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전 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으며, 많은 무기, 장비, 식량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왜 임진산에서 총통이 사용되지 않은 상태로 출토되었는가 하는 의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곳에서는 총통뿐 아니라 창, 칼, 화살촉 등 각종 병기들이 동시에 파묻힌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병기는 조선군의 기본 장비이기 때문에 반드시 임진왜란 때에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에 이곳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가 있는지 살펴보고, 병자호란 당시에 벌어진 광교산 전투의 주전장이 어디이며 어떠한 양상의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검토해 보았다. 이를 통해 병자호란 때의 광교산 전투는 이곳 임진산 지역보다 조금 더 북쪽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찾은 전투의 흔적은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때의 광교산 전투에서 남겨졌을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같이 출토된 일본계 유물 또한 그것을 방증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든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간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열을 다시 정비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급습을 당하여 모든 군장비를 그대로 둔 채 퇴각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필자] 양정석
195)『연려실기술』 권20, 삼도근왕용인패적 ; 『난중잡록』 4, 기해 7월.
창닫기
창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