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전쟁의 흔적

5. 전쟁의 흔적과 남겨진 총통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퇴하는 모습은 부산과 동래에서의 전투를 제외하면 광교산 전투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이 개시된 이후 조선 전역에서 얼마 동안 계속된 양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제천정에 머물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도 적이 밀어 닥치자 그저 바라만 볼 뿐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기와 화포를 모두 강물 속에 버린 후 옷을 갈아입고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망쳤다고 한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에는 광교산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때문에 병무에 익숙하지 못해 숫자는 많았으나 명령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훈련 또한 일관되게 이루어지지도 못하였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는데 바로 그와 같았다.

다음날 우리 병사들이 겁에 질려 있음을 확인한 적들은 몇 명씩 짝을 지어 칼을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수많은 우리 군사들은 그만 도망치기에 바 빴는데 그 소리가 산을 뒤흔들 지경이었다. 또 병사들이 버리고 간 물자와 무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길을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적들은 이것들을 가져다 불을 질렀다.196)

<왜군의 갑옷>   
18세기에 만든 일본의 색줄 무늬 갑주로, 장수가 입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처음으로 보는 왜군의 무장에서도 큰 두려움을 느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당시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문관이 중심이 되어 지휘를 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전쟁에 대한 대비와 관련된 부분은 군제사(軍制史)에서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조선군이 느꼈던 두려움이라는 부분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보인다.

당시 조선군은 왜군의 조총뿐 아니라 그들이 입고 있는 무장(武裝)에서도 처음 접하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약용의 『비어고(備禦考)』에도 왜적 기병이 돌진해 오는데, 먼저 온 적군 5명이 쇠가면을 쓰고 백마를 타고 백기를 잡고 칼을 휘두르며 곧바로 습격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신익이 선봉에 있다가 먼저 무너지자 10만 장교와 군사가 일시에 모두 흩어지니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하며, 이후 왜적 기병 몇 명이 사납게 10여 리를 쫓다가 멈춘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조선군은 처음 보는 기괴한 무장을 한 왜군을 사람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임진산 유적에서 수습된 2문의 총통 중 한 문에는 약실에 화약이 그대로 남아 있고 총탄환도 총통의 내부에 장전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사 준비가 이루어진 채 폐기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전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와 더불어 발견된 많은 양의 무기류도 조선군이 가지고 참전했던 무기를 제대로 챙겨서 후퇴하기도 어려웠던 긴박한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준다. 10만 대군이 그대로 무너졌다는 문헌의 내용이 유적과 유물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현자총통과 탄환>   
임진산 유적에서 출토된 현자총통과 탄환의 복제품으로 임진산 유적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임진왜란 개전 이후 초기 2개월 동안의 패전은 어떻게 보면 이러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뒤에 강물에 투신한 신립(申砬)도, 흰옷으로 갈아입고 달아난 문신 이광도 처음 보는 스타일의 무장과 조총을 가지고 벌어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전투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197)이렇게 처음 접하는 전쟁의 유형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그대로 역사 속에 묻혀버렸던 한 전쟁의 흔적이 1997년 발굴 조사를 통해 임진산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그것조차도 잠시뿐이었지만 말이다.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조사가 이루어진 관계로 임진산과 더불어 유적 전체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그곳에는 아파트가 건설되기 이전에 임진산 유적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임진산 유적 전시관이 있고 그곳에서 출토된 총통의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그리고 장전된 상태에서 출토된 현자총통은 엄습하는 적들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지금도 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필자] 양정석
196)『징비록(懲毖錄)』 권4.
197)임진왜란 발발 이후 2개월 정도가 지나면서 생소한 왜군의 전투 방식에 적응한 조선군은 비로소 독특한 전투 방식을 다시 채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세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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