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신주를 모신 종묘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우리나라에 종묘가 처음 세워진 때는 삼국시대였다. 신라에서는 6년(남해차차웅 3년)에 시조인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22대 지증왕 때(재위 500∼514)에 혁거세가 태어난 땅인 나정(蘿井)에 신궁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36대 혜공왕 때(재위 765∼780)에 5묘제(五廟制)를 정착하였다.62) 고구려에서는 20년(대무신왕 3년) 시조인 동명왕묘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에서도 기원전 18년(온조왕 원년)에 동명왕묘를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989년(성종 8)에 “비로소 대묘(大廟)를 영건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때에 종묘 제도가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63)
조선 왕조 건국 후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1395년에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건설한다. 태조가 한양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종묘와 사직을 궁궐과 함께 제일 먼저 세우게 한 사실은 종묘와 사직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종묘의 위치는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였다.64) 그리하여 경복궁에서 남쪽을 향하였을 때 왼쪽인 동쪽으로 종묘가, 오른쪽인 서쪽으로 사직이 위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종묘는 제후 5묘제를 채택하여 정전(正殿)은 동당이실(同堂異室)의 형태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1419년(세종 1) 정종이 승하하고 삼년상을 치른 후에 정전에 신실이 부족하게 되자 별묘인 영녕전(永寧殿)을 건립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국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장(國葬)을 치르고 국장이 끝나면 우주(虞主), 즉 가신주(假神主)를 만들어 혼전에 모시고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이 끝나면 새로 신주를 만들어 종묘에 모신다.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종묘의 신주는 4대가 내려갈 때까지 모시며, 4대가 지나면 신주를 꺼내서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긴다. 이와 같이 정전에 있는 신주를 꺼내어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전에 국가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국왕을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그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 그대로 두었다.65) 그러다 보니 종묘의 정전은 모두 19칸이 되어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