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여자여 외출하라3. 근대의 무지개 아래, 소비하는 식민지 여성

여성, 백화점에 ‘미치다’

다른 곳은 다 흥정이 없어도 가을이 되면 백화점이 더 번창이다. 사서 들고 나아오는 것은 안 사도 좋을 것 같은 것을 보아서 아직도 돈이 없단 타령하고는 딴판인지 모르나, 백화점 승강기 바람에 어깨가 으슥하니 백화점 출근을 하는 것인지. 자식새끼는 겨울이라도 배때기를 내놓고 다니게 하고 코 하나 씻기지 않으면서 주렁주렁 사들고 다니는 것이 그 무엔고. 승강기에 미쳤거든 아주 천국으로 이사를 가든지, 백화점 상층 식당에서야 만 애인을 만날 테면 천국에서 사랑을 맺든지. 아무리 둘러보아도 조선 사람이 쓸 것은 드문데 그것들을 사다가 어린애 장난감 내버리듯이 내어 버리는지…… 백화점을 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간 한 가지 현상 때문에 전당을 잡고 무엇을 팔아서 물건을 사지 말고 조금 점잖아지라는 말이다. 더구나 아주머니들 좀 무당 판수에 미치듯이 백화점에 미치지 말라는 말씀이다.57)

백화점의 출현은 공적 영역에 새로운 여성 공간이 등장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의 성별 분리가 공간의 구분으로 전환되었으며, 이곳에서 여성은 대중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백화점의 이용을 매개로 정체성이 규정되는 여성 대중이 등장하였다. 백화점은 남성보다는 여성 대중을 위한 공간이었으며, 여성에게 백화점의 의미는 남성에게 술집이 가지는 의미와 상응하였다. 여성은 대중적 취미와 사교의 공간을 얻을 수 있었으며, 취업 기회 또한 늘어났다. 그런 점에서 백화점의 출현은 여성 해방의 신호탄이었고, 실제로 가정의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써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58)

여성은 “무당 판수에 미치듯이 백화점에 미쳤다.”59) 백화점을 찾는 고객의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판매원 역시 대개 여성이었다. 백화점은 여성 노동자에게 새로운 노동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백화점의 점원은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백화점은 여성의,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다. 여성 점원 자체가 백화점을 백화점답게 만드는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그들 역시 백화점에 전시되는 상징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화점은 등장하였을 당시부터 상품을 쇼윈도에 진열하여 밖에서 보이도록 선전할 뿐 아니라, ‘숍걸’ 역시 유리벽 앞에 세워 진열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60) 백화점의 여점원들은 열악한 근로 조건 아래에서 장시간 근무와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 여성이 아니라 전시품의 일종으로서 백화점의 미녀 점원은 그 자체로 구경거리가 되었다.61)

<쇼윈도의 점원>   
백화점에서 여성 점원은 그 자체가 백화점을 백화점답게 만드는 구성 요소였고, 백화점에 전시되는 상징의 일부였다. 하여 ‘숍걸’은 유리벽 앞에 세워 두었고, 백화점의 여점원들은 노동 여성이 아니라 전시품의 일종으로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본주의적 소비자는 백화점이 제시하는 특정한 방식에 따라 형성되었다. 백화점은 여러 면에서 여성의 자유를 증대시키는 데 공헌하였지만, 여성의 주체성을 확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상품에 구속시키는 요소를 강화시켜 갔다. 백화점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의류는 구속적인 표준 체형을 생산하였다. 여성의 신체에 맞는 상품이 아니라 제공된 상품에 대해 자신의 신체를 맞추어야 하는 소외된 소비 여성이 출현하였다.62)

상품의 상징성은 소비자가 아니라 백화점이 결정하였다. 따라서 여성 소비자는 백화점이 제시하는 꿈에 중독되면 될수록 해방으로부터 속절없이 멀어지기 일쑤였다.

식민지 시기의 남성 지식인은 백화점에 대한 적대감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체로 윤리적인 어법을 채택하기는 하였지만, 그 핵심에는 여성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회와 공간에 대한 거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일본인 거리에 있는 백화점을 드나드는 여성은 식민지 치하의 민족적 모순과 겹쳐지면서 철없고 생각 없는 여성의 이미지로 연결되었다. 백화점을 들락거리면서 사치품을 사서 걸치는 여성은 남성에게 기생하는 쓸모없는 존재로 상정되었다. 대도시의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는 해도 소비에 열광하는 여성 대중이 출현함으로써 여성 내부의 문화적 차이들이 희석되었다. 적어도 엘리트 지식인의 이성은 그러한 여성을 동시대의 동반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다.

남대문통이나 진고개를 지나 보신 이면 누구나 흔히 눈에 띄우는 일이겟지만 정자옥(丁子屋), 평전 상점(平田商店)가튼 큰 상점에는 언제나 조선 여학생, 신식 부인들로 꼭꼭 차서 불경기의 바람이 어대서 부느냐 하는 듯한 성황 대성황으로 물품이 매출되니 그곳들이 특별히 갑시 싸서 그런가요. 그러치 안흐면 무엇에 끌려서 그러는지 알 수 업습듸다. 손님 대접이 친절한 맛에 그럿타거나 갑시 특별히 종로에 잇는 조선 상점들보다 싸다면 조선 장사 양반들도 좀 생각해 볼 일이고 갓튼 갑시인데 긔를 쓰고 그곳으로 몰려간다면 몰려가는 양반들이 한번 생각해 볼 일이지요, 삼월 오복점(三越吳服店)이 또 낙성되엿스니 제일 깃버할 이는 조선 여학생일 것 갓습니다. 언제든지 훌륭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야만 자기 코가 놉하지는 듯한 선입견을 가진 것이 신식 여자인가 보아요. 그러타면 배우는 것이 도리어 우환이지요.63)

<백화점으로 몰려가는 여학생>   
일제 강점기에 여학생들은 종종 백화점의 유혹에 포획된 몰지각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떠나기 전에 동무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것보다 미쓰코시, 조지아에 들리는 것이 급하고, 어렵사리 학비를 보내 주는 부모는 아랑곳없이 제 화장품 사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일본인 상가의 백화점과 상점으로 몰려드는 여학생, 신식 부인은 조선 인 상권의 몰락을 부추기는 몰지각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가부장제와 민족주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기호로서의 상품을 소비하는 여성, 상품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여성은 사회의 공적일 뿐더러 성적으로도 헤픈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사치와 낭비를 성에 대한 편견과 연결시켰기 때문에 신식 여성의 이미지와 ‘창녀’의 이미지는 종종 겹쳐졌다. 따라서 질서와 도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상품에 대한 여성의 욕망은 억제되어야 하였다. 반면에 여성은 남성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여 사치품을 소비하고 치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러한 질서에 균열을 가하였다.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 권력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그런 식의 무망한 ‘보복’을 기도하기도 하였다.64)

<모던 보이의 산보>   
서양 영화를 통해 퍼져 나간 유행은 젊은 청년의 얼굴에 안경과 염소 털을 붙여 놓았고 모자와 나팔바지를 입혀 주었다.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만 있는 거리를, 볼 일도 없이 싸다니는 그들의 산보는, 시대의 아픔을 외면한 채 서구의 껍데기를 흉내 내는 한심한 행위로 보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상품 소비가 자본주의적 상징성을 부여받게 되면서 사치와 소비에 대한 성별 구분이 조금씩 약화되었다. 유행과 사치에 대한 남성의 욕망도 수치스럽거나 숨길 일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이미 모던 걸에 버금가는 존재로서 모던 보이가 출현하였다. 그들 역시 여성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해 유행을 따르고 기호를 소비하며 외모와 패션으로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그러한 모습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나타난 부분적 현상이지만 그 충격은 폭발적이었다.

[필자] 허영란
57)「승강기의 매력」, 『조선일보』 1933년 10월 29일자.
58)피터 코리건, 앞의 책, 107∼113쪽.
59)「승강기의 매력」, 『조선일보』 1933년 10월 29일자.
60)「폭로주의의 상가가」, 『조선일보』 1934년 5월 14일자.
61)오진석, 「일제하 백화점 업계의 동향과 관계인들의 생활양식」, 『일제의 식민 지배와 일상생활』, 혜안, 2004, 145∼167쪽
62)피터 코리건, 앞의 책, 112∼113쪽.
63)「엽서 통신 : 종로 일 통행인(鐘路一通行人)」, 『별건곤』 1930년 11월호.
64)임옥희, 앞의 글, 2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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