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나라에서도 탐낸 조선의 활 솜씨
이렇듯 조선의 활쏘기는 널리 유행하였고, 그 솜씨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은 편전 쏘는 법을 ‘아국장기(我國長技)’라 하여 중요한 군사 기밀로 취급하였다. 나아가 북방 야인들의 왕래가 잦은 함경도와 왜인들이 거주하는 삼포 지역에서는 편전을 가르치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외국인들에게 편전 제조 기술이 전해질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더욱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많 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쉽지 않았다.
조선도 이런 점을 이용하여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1525년(중종 20) 영의정 남곤(南袞)이 일본 사신을 접대할 때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197)
남곤은 사신들에게 무예를 관람하도록 하였는데, 과녁을 쏠 적에 일본 국왕의 사신 및 대내전(大內殿)의 사신은 앉은 채로 관람하고 나머지 아랫사람들은 활 쏘는 곳으로 가서 관람하였다. 당초에 병조에서 보사 40명과 기사 40명을 뽑아서 다른 무인들과 섞어 세워 놓고 모두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인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앞에 선 40명을 뽑아 활을 쏘도록 하였다. 40명의 활쏘기가 거의 끝날 즈음 남곤은 일본 사신들에게 다른 무재(武才)를 더 보고 싶지 않은가 물어 보았다. 사신이 더 보고 싶다고 하자 남곤은 즉시 기사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기사를 본 일본 사신들은 “평생 이런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쏘면 맞히지 못한 적이 없고, 다섯 번 쏴서 다 맞히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적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에 앞서 남곤은 말 타고 활을 쏠 사람 10명을 예비로 더 선발해 두었는데, 40명이 기사를 다 끝냈는데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자 그 10명도 기사를 하도록 하였다. 여럿 중에서도 신빈(申濱)과 정지하(鄭之河)의 기사가 뛰어나서 다시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외국 사신들에게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또 다른 예로 1718년(숙종 44) 일본 관백(關伯)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하였던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따라갔다 온 신유한(申維翰, 1681∼?)이 남긴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당시 통신사 일행인 군관(軍官) 양봉명(楊鳳鳴)이 일본의 관백 앞에서 활쏘기를 시연하자 보고 있던 상하의 관리들이 모두 놀라고 겁을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198) 이러한 내용은 이후의 통신사 관련 문헌들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특히 말을 달리며 허수아비 모양의 표적을 활로 쏘는 기사에 탄복하였다. 조명채(曹命采, 1700∼1764)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다음에는 기추(騎篘)를 시험하는데, 추인(芻人, 허수아비)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추적(芻的, 풀단으로 만든 표적)보다 조금 컸다. 임세재(林世載)·인문조(印文調)·이세번(李世蕃) 세 사람은 세 발을 맞히고 그 이외 의 사람은 모두 다섯 발을 맞혔다. 말이 매우 살찌고 훌륭하여 나는 듯이 달리는데, 이일제(李逸濟)는 첫 추적을 맞히고서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아서 나머지 화살을 달리면서 다 맞히니, 사면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하였다. 대개, 왜인은 말 다루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날쌘 말이 내닫는 것을 보고도 기장(奇壯)하게 여겼었는데, 더구나 사람마다 화살을 헛되이 쏘지 않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고199)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일본인들은 조선 무인들의 뛰어난 기사 솜씨와 마상재(馬上才)에 탄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