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부국강병의 토대, 조선 전기의 무기와 무예1. 부국강병의 길

조선만의 독특한 화기를 완성하다

[필자] 박재광

고려 말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화약 병기는 1392년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10여 년 동안은 일시적으로 발전 추세가 더뎌졌다. 이는 조선 건국 이후 왕권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여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화기를 반대 세력이 군사적으로 악용할까 우려한 나머지 현상 유지에만 치중하고 새로운 개발에는 소극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인 듯하다.

이후 화기는 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태종 때부터 다시 개발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업무를 주관하여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은 최무선(崔茂宣, ?∼1395)의 손자인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이었다. 1417년(태종 17) 화약의 제조와 성능의 개량을 주관할 독립 관청으로 화약제조청(火藥製造廳)을 설치하였으며, 종래 주로 화살을 쏘던 화기를 돌로 만든 탄환이나 철제 탄환을 사격할 수 있도록 개량하여 나갔다. 또한 한꺼번에 수십 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장치인 화차(火車)도 개발하였으며,200) 개국 이래 운영해 오던 화통군(火㷁軍)도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즉위 초 화약 6근 4냥, 화통 200여 정이던 보유량은 1415년(태종 15) 7월에는 화약 6,980여 근, 화통 1만 3000여 정으로 늘어났다.201)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도 적극적으로 화기를 개발하였는데, 특히 지상 전투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기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세종의 시책은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북쪽 변경의 수복을 위한 준비 작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산악과 삼림이 많은 지형적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상습적인 침입을 반복하는 여진을 제압하기 위해서 휴대용 화기와 더불어 박격포 같은 성능을 지닌 곡사포(曲射砲), 그리고 조기에 경보를 전달할 수 있는 신호용 화기 등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에 사용된 화기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지자총통(地字銃筒)·현자총통(玄字銃筒)·황자총통(黃字銃筒)·가자화포(架字火砲)·총통완구(銃筒碗口)·장군화통(將軍火筒)·일총통(一銃筒)·이총통(二銃筒)·삼총통(三銃筒)·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세총통(細銃筒)·신기전(神器箭)·총통완구(銃筒碗口) 등이 있다. 이 화기 중에서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장군화통·총통완구 등은 중량이 무겁고 큰 대포에 해당하고, 나머지는 대체로 구경이 3㎝ 미만인, 가볍고 작은 휴대용 화기로 지금으로 말하면 소총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화기 명칭은 크기·형태·기능과 연관해서 붙였다. 천자·지자·현자·황자·우자·주자총통과 일·이·삼총통 등은 크기를 고려하여 천자문의 글자 순서와 일련번호에 따라 붙였고, 사전총통·팔전총통 등은 발사물의 개수를 고려하여 이름을 지었다. 따라서 명칭을 잘 음미해 보면 화기의 크기와 특징을 알 수 있다.

[필자] 박재광
200)『태종실록』 권18, 태종 9년 10월 병진.
201)『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 경도(京都) 하, 화약고기(火藥庫記). 이 밖에도 『태종실록』 권30, 태종 15년 7월 신해조에는 탁신(卓愼)이 화통(火㷁) 수가 만여 병에 도달하였지만 수요가 부족하니 남아 있는 주철 2만여 근으로 더 주조할 것을 건의한 것으로 되어 있어 화통의 제작량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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