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하늘, 시간, 땅에 대한 전통적 사색을 내면서

[필자] 문중양

자연에 대한 과학적(?) 사색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근대 과학이 성립하기 이전의 전통 과학과 그 이전의 원시적 자연 지식은 어땠을까? 그것은 분명 신비롭고 불가해한 존재로서의 하늘과 땅에 대한 어렴풋한 이해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없이 보잘것없는 인간으로서 경외하는 자연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그 궁금증을 풀어 줌으로써 그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초월적인 그 무언가에 보잘것없는 한 몸을 의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가해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에 동원한 방식은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 신(神)을 통해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즉, 특정한 현상을 주재하는 신을 제시함으로써 불가해한 자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신은 다양해서 특정한 자연 현상만을 설명하는 하위의 신도 있지만, 전체 자연을 주재하는 고차원적 신도 있었다. 문명권마다 또는 종족들마다 특정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신이 다르기도 하였다. 동일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신이 동네마다 다르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도 없었다. 삶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갖고 있던 궁금증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인 설명이면 만족 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시적인 자연 지식은 어떤 형태로든 신적인 존재와 차원의 것으로서 구성되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것처럼 무서운 자연 현상으로부터 비 온 후의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자연 현상에 이르기까지, 이해할 수 없는 특정한 자연 현상들이 신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신화적 자연 지식은 어느 문명에서나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특정한 자연물이나 현상은 물론이고, 하늘과 땅, 우주 전체가 신과 연결되었다. 특정한 자연이나 현상을 주재하는 신이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나아가 신 자체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늘의 개념이 그러하였다.

물론 하늘에 대한 원초적 인식은 물리적인 의미의 하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자연물들과는 달리 하늘은 점점 그 자체가 신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대략 서주(西周) 초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르면 하늘이 지상신(至上神)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하늘이 단지 물리적 존재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숭배의 대상으로서 종교적 차원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하늘에 대한 제사, 즉 제천(祭天) 의례가 등장하였다. 숭배의 대상으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인 제천 의례는 이후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근대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물론 관습적인 행사의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근대 사회 이전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줄곧 종교적 차원의 하늘의 개념이 우리들의 관념 속에 깊게 박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상신적인 존재와 완벽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재자(主宰者)로서의 하늘 개념도 존재하였다. 이는 기적을 일으키는 전능한 존재와는 다른 것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모든 세계를 지배하고 주재하는 존재로서의 하늘 개념이었다. 하늘이 인간과 자연을 낳았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의식적인 의도를 가지고 낳은 것은 아니다. 단지 천도(天道) 또는 천리(天理)에 따라 우주 만물을 낳고 주재할 뿐이다. 자연의 생성과 변 화에 일관되게 관철되는 원리가 하늘에서 나온다는 관점에서의 천도 또는 천리였다. 의사종교적·신적인 차원의 관념은 사라지고, 좀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하늘을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주재자로서의 하늘은 인간과 하늘이 서로 감응(感應)한다는 관념과도 연결되었다. 중국 한나라 때의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체계화된 이 관념은 불가해한 천변 재이들을 설명하는 매우 설득력 있는 유용한 설명이었다.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들은 하늘이 주재하는 바로서, 그러한 하늘의 메시지로 해석되었다. 특히, 인간들의 도덕적·정치적 행위들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되면서 중앙 집권적 동아시아 국가 권력의 안정적 형성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일식이나 월식 같은 재이가 일어날 때마다 왕이 친히 나아가 구식(救蝕) 의례를 주관하는 관례는 이러한 천인 감응의 관념에 따른 대응이었다. 하늘이 내리는 경고의 메시지를 하늘을 대리해서 인간 사회를 다스리는 제왕이 경건하게 맞이하는 의례를 수행해야 하였던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제천 의례와 구식례가 줄곧 행해지고, 주재자로서의 하늘 관념이 동아시아인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물리적인 존재로서의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 전체에 대한 사색도 이루어졌다.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신화적 설명에서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사색이 이미 기원전에 나타났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의 기록은 그러한 사색을 보여 주는 이른 시기의 문헌 기록으로, 우주의 생성과 기원에 대한 동아시아인들의 신화적 설명에서 벗어난 원초적인, 그렇지만 세련된 사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회남자』 「천문훈」 기록에 의하면, 이 우주는 미분화된 무형(無形)의 원초적 기(氣)에서 생겨났다. 이 원초적 기의 상태야말로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의 우주 태초의 상태로, 이 기의 분화가 우주 생성의 시초였다. 즉, 기가 맑고 가벼운 것과 탁하고 무거운 것으로 분화가 일어나고, 맑고 가벼운 기 가 위로 상승해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기가 아래로 내려가 응고해서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성된 하늘과 땅은 각각 양(陽)의 기를 토해 내고 음(陰)의 기를 머금어 두 음양의 기의 작용에 의해 해와 달, 그리고 뭇 별들이 생겨났다.

『회남자』의 논의가 우주의 생성에 대한 사색을 보여 준다면, 『진서(晉書)』 「천문지」 서두에 나오는 기록은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사색을 잘 보여 준다. 그 기록에 의하면, 우주의 형태에 대한 여섯 개의 경쟁하는 상이한 이론이 존재하였다. 그 중에서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說) 두 이론이 널리 호응을 받았다. 개천설은 고체의 하늘이 위에서 돌고, 땅이 그 아래에서 정지해 있는 형상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늘은 원반과도 같이 둥그렇고, 땅은 바둑판처럼 네모진 모양으로 한 마디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구조였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지의 구조에 대해 말할 때 ‘천원지방’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개천설이 말하는 천지의 형태를 염두에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천설의 구조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예컨대 무겁고 딱딱한 거대한 하늘이 어떻게 우주 공간 위에서 회전하면서 떠 있을 수 있는가이다. 하늘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기우(杞憂)’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둥그런 하늘과 네모난 땅이 어떻게 딱 부합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있다. 태양을 비롯한 천체들이 뜨고 지는 현상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문제도 있다. 아울러 춥고 더워지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설명도 사실 구차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게 문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개천설은 『회남자』에 나오는 우주 생성의 논의와 잘 어울린다. 즉, 맑고 가벼운 기가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기가 ‘아래’로 내려가 땅을 이룬 구조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많은 수의 사상가들이 개천설의 우주 구조를 따른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혼천설이 제시하는 천지의 구조는 계란에 비유된다. 즉, 달걀의 껍데기가 하늘이고, 노른자는 땅이라는 것이다. 이때 계란 전체는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었다. 그럼으로써 하늘이 밑으로 꺼지지 않고 우주 공간에 버틸 수 있다. 그런데 땅이 노른자라고 해서 둥그런 땅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땅은 여전히 평평하고 네모난 형태였다. 단지 껍데기와 노른자의 위치처럼 땅이 둥그런 구(球) 형태의 하늘 가운데에 위치해 있다는 논의였다. 결국 혼천설에서도 하늘은 둥그렇고, 땅은 네모난 형상임은 개천설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천원지방’이라고 반드시 개천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혼천설은 개천설이 지닌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하늘이 우주 공간에서 밑으로 떨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천체들의 뜨고 지는 현상과 계절의 변화 등과 같은 천문 현상들을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천설에 의하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하늘과 땅이 물 위에 떠 있음으로써 생기는 문제이다. 즉, 뜨거운 불의 속성인 태양이 밤 동안에 어떻게 물속을 통과해서 꺼지지 않고 다시 아침에 떠오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또한, 개천설과 달리 우주 생성의 논의와도 잘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천설은 구형의 하늘을 상정함으로써 개천설보다는 많은 천문학적 현상들을 훨씬 합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혼천설을 정설로 삼았고, 개천설과 혼천설을 처음으로 소개한 『진서』 「천문지」도 혼천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천지의 생성과 모양, 운동에 대한 사색은 이와 같은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회남자』에서 제시된 우주 생성의 과정은 이후 유가 사상가들보다는 도가(道家)나 참위가(讖緯家)들에 의해 깊이 있게, 그러나 산발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기(氣)나 물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진서』 「천문지」에서 일단 결론이 난 이후 혼천설과 개천설 중 어느 것이 더 타당한가의 논란도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개천설과 혼천설이라는 흥미로운 두 가지 주장이 있었다고 거론될 뿐이었다. 사실 유가 사상가들은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겼는지 그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유가 사대부들이 다시 하늘과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신유학, 즉 성리학의 재구성과 함께였다.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그리고 주희(朱熹)로 대표되는 중국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그동안 도가나 참위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를 체계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데 적용하였던 개념적 틀도 도가나 참위가들에게서 빌려 왔다. 우주 자연의 존재론적 시원과 원리로서의 태극(太極), 즉 이(理), 우주 생성의 물질적 토대로서의 기(氣), 그리고 『주역(周易)』의 괘(卦)로부터 비롯된 상수학(象數學)적 개념과 체계가 그것들이었다.

성리학을 수용한 조선시대 사대부 지식인들이 자연을 바라보고 이해하였던 방식이 바로 이러하였다. 큰 틀에서 보면 역학(易學)의 영역 내에서 자연에 대한 제 고찰이었다. 우주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소멸이 소옹이 제시하였던 우주의 수비학(數秘學)적 주기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고찰되었다. 현재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가 12만 9600년이라는 주기를 가지고 생성되어 소멸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현재 우주의 생성은 태극에서 나왔으며, 원초적 기의 분화 과정을 통해 생성, 변화될 것이었다. 또한, 그러한 변화의 원리는 하도(河圖)에서 비롯된 ‘선천방원도’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성리학적 접근과 이해는 19세기 말 근대 과학적 우주론과 과학 지식이 그것을 축출하기 이전까지 일반적이었다. 17세기 초 서양의 우주론과 천문학 지식이 들어오면서 충격적인 새로운 지식 데이터들을 접하였지만,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의 성리학적 자연 이해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경험적 데이터를 활용해 더욱 세련되고 정합적인 틀로 다듬어 나갔다.

[필자] 문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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