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사찰의 공간 구성과 석조물의 상징1. 가람 배치와 전각

가람 배치

[필자] 박경식

사찰을 건립할 때는 불교가 지닌 특성을 구현하기 위해 많은 조형물과 이에 따른 부속 건물을 함께 세운다. 즉, 부처님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강당(講堂), 불상을 봉안하는 금당(金堂),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석탑(石塔), 불법의 홍포를 표방하는 석등(石燈), 범종을 걸기 위한 종각(鐘閣), 경판을 보관하기 위한 경루(經樓), 스님이 거처하기 위한 요사채와 기타 건물, 스님의 부도(浮屠)를 모시는 부도밭과 석비군(石碑群), 당간 지주(幢竿支柱) 등 많은 건물과 조형물의 건립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래서 이들을 적절한 공간에 배치하고 활용하려면 일정한 규약이 필요하였고, 이를 제도화한 것이 바로 가람 배치(伽藍配置)이다. 그런데 가람 배치에 있어 중심을 이루는 요소는 바로 금당과 탑이며, 특히 탑에 의해 여러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탑은 신앙의 중요한 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찰의 전체 축선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형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람 배치의 기원은 인도에 있다. 인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와는 달리 석굴 사원(石窟寺院)이 중심을 이루었다. 인도에서 초기 종단이 형성될 무렵 승려들은 각각 독립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공동으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따라서 승려들의 거처와 예배를 위한 공간이 구성되면서 점차 사찰의 품격을 갖추었다. 인도의 석굴 사원은 비하라(Vihara)와 카이티아(Caitya)로 구분된다. 전자는 탑을 중심으로 주변에 승려들의 거처로 쓰는 여러 개의 작은 방이 배치되었는데, 방형 또는 원형의 평면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후 비하라의 구조에서 탑과 불상을 배치하고, 예배의 공간이 확보된 카이티아로 발전하였다. 카이티아는 탑을 포함한 성스러운 물체를 뜻하는 말로, 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도의 석굴 사원은 비하라에서 카이티아의 구조로 발전해 갔음을 아잔타(Ajanta) 석굴, 엘로라(Ellora) 석굴 등의 수많은 사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인도에서 확립된 가람의 구조는 불교의 동점(東漸)과 함께 중국으로 전해져 둔황(敦煌), 윈강(雲崗), 룽먼(龍門) 석굴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석굴과 사찰을 조성하였고, 이는 다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

<아잔타 석굴 사원 전경>   
인도 서부 뭄바이 동북쪽에 있는 구릉지에 기원전부터 7세기경까지 이루어진 석굴 사원군이다. 인도 석굴 사원의 구조는 비하라에서 카이티아로 발전하였고, 이런 가람 구조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아잔타 석굴 사원 승방>   

그러나 우리나라는 화강암질이 많은 까닭에 석굴 사원을 조영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은 주로 사암과 석회암층에 조성되었지만, 우리나라의 도처에 산재한 화강암층은 강도가 강한 탓에 굴착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따라서 우리의 자연조건을 간파 한 선조들은 무리하게 이를 만들기보다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벽이나 동굴을 일부 가공해 석굴 사원을 조성하였다. 나아가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석굴암(石窟庵) 같은 인공 석굴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석굴 사원이 희소한 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자연조건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경주 남산 불곡 석불 조상>   
경북 경주 남산 동쪽 기슭 부처 골짜기의 한 바위에 깊이 1m의 석굴을 파고 만든 여래 좌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질이 많아 석굴 사원을 조영하기 어려운 우리나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벽이나 동굴을 일부 가공해 석굴 사원을 조성하였다.
<군위 삼존 석굴 전경>   
경북 군위 팔공산 절벽의 자연 동굴에 조성한 통일신라 초기의 석굴 사원이다. 인공으로 만든 경주 석굴암 석굴보다 연대가 앞서고, 석굴에 모신 삼존 석불은 700년경의 작품이다. 자연 동굴 안에 불상을 배치한 본격적인 석굴 사원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석굴 사원 조성에 불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우리 조상들은 지상에 사찰을 건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가람 배치는 사찰이 건립된 위치에 따라 산지 가람(山地伽藍)과 평지 가람(平地伽藍)으로 구분된다. 이 같은 구분은 가람 배치에 있어 총체적인 분류에 해당하는데, 대체로 불교 전래 초기에는 평지 가람이 주종을 이루지만, 점차 산지 가람으로 옮겨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불교 전래 초기의 사찰은 대개 왕도(王都)를 중심으로 도심 지역에 건립되었다. 이는 백제시대에 건립된 익산 미륵사, 부여의 정림사와 더불어 신라시대의 분황사, 황룡사, 흥륜사 등 많은 예를 볼 수 있다. 이처럼 평지에 건립된 사찰은 넓게는 5∼6만 평에 달하는 넓은 사역(寺域)을 유지하면서, 국가와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거대한 건축물을 건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접근이 쉽다는 점에서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평지 사찰은 규모의 거대화와 포교의 용이성에도 불구하고 수행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후 확립된 오악 신앙(五嶽信仰)과 더불어 통일신라 말기에 형성된 9산선문(九山禪門)의 성립은 평지에서 산지 가람으로 변모시키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악은 신라의 삼사(三祀) 중 중사(中祀)를 지냈던 토함산(東岳), 지리산(南岳), 계룡산(西岳), 태백산(北岳), 팔공산(中岳)이며,1) 반도 통일 직후 대체로 문무왕 말년이나 늦어도 신문왕대에는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2) 이처럼 산악을 신성시하는 신앙은 자연스럽게 사찰을 산으로 옮기게 하는 작용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통일신라 말기에 도입된 선종(禪宗)은 전국적으로 해주 광조사, 보령 성주사,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장흥 보림사, 창원 봉림사, 문경 봉암사, 강릉 굴산사, 영월 흥령사 등 아홉 개의 근본 대도량을 건립하면서 사찰의 산지 가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이같이 평지 가람에서 시작되어 산지 가람으로 변화한다. 이와 더불어 어느 사찰이든 금당과 탑을 중심으로 각종 건물과 조형물이 배치되는데, 이를 구분해 보면 다음의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필자] 박경식
1)이기백, 「신라 오악(五岳)의 성립과 그 의의」, 『신라 정치사 연구』, 일조각, 1974, 197쪽.
2)이기백, 앞의 글,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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