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사찰의 공간 구성과 석조물의 상징2. 석조물의 유형과 상징성

석비

석비(石碑)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 또는 뛰어난 업적을 지닌 사람의 역사를 기록한 조형물이다. 때문에 문헌에서 모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보충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이 문서로 기록됨에 반해 돌에 글자를 새겨 기록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석비는 중국의 주나라에서 시작되어 당나라에 이르러 이수(螭首), 비신(碑身), 비제(碑題), 귀부(龜趺)를 갖추는 석비로 발전해 왔으며, 또한 이 양식이 후세의 석비까지 전래되는 규범을 만들었던 것이다.12)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는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사용한 석비가 건립되다가13) 삼국통일 후 태종무열왕릉비에서 처음으로 귀부, 비신, 이수를 구비한 완전한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이는 이후 건립되는 모든 석비의 양식적 모태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비좌 및 이수에는 화려한 조식(彫飾)이 등장하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미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태종무열왕비>   
김유신과 함께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태종무열왕(654∼661) 김춘추의 비이다. 현재 비신이 없어진 채 귀부 위에 이수만 놓여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 주위로 연꽃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이수에는 좌우에 세 마리씩 여섯 마리의 용이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다.
<석비의 각부 명칭>   

석비의 구성 요소 중 귀부와 이수에는 거북과 용이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당나라 석비의 모방 및 고구려 벽화 중 현무(玄武)로 나타난 것이 신라 석비의 귀부와 이수로 표현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4) 하지만 대부분의 석비가 국왕, 사찰, 선종 승려와 관련이 있음을 생각할 때 이보다는 다른 요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거북과 용은 장수하고 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지닌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죽은 이의 불멸(不滅)과 능력을 상징하는 석비에 이러한 성격을 지닌 동물이 채택됨은 앞에서 거론한 당나라의 비석 및 사신도(四神圖)의 영향보다는 실질적인 면이 더욱 강조된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존비(尊卑)를 떠나 모두 사후의 세계가 있음을 믿고 있는 고대인의 관념을 볼 때 누구나 사자(死者)에 대해 영원불멸(永遠不滅)을 축원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물며 피장자가 국왕 또는 문파의 우두머리였던 선사였음을 볼 때 이에 따른 숭앙에 온갖 정성을 다하였음은 대부분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는 부장품과 부도의 발달을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을 기념하고 현세 및 내세에서도 영원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기리기 위한 상징을 생각할 때 거북과 용의 채택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884년(헌강왕 10)에 세운 보조 선사(804∼880)의 비이다. 비는 귀부의 머리가 용머리를 하고 있어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나운 모습이며, 등 뒤에는 육각형의 무늬가 전체를 덮고 있다. 비좌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놓았다. 이수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웅대하게 조각하였다.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고려시대 승려 원공 국사(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비신이 작고 이수가 큰 것이 특징적이다. 귀부의 머리는 괴수 모양의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이다.

석비를 구성하는 가장 하부인 귀부에 거북과 용의 몸을 형상화하였음은 이들이 지상과 물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으며 오래 사는 동물인 점으로 보아 현세에서도 영원히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비신은 바로 왕이나 승려의 행적을 기록하는 부분으로, 이는 곧 신체에 해당한다. 또 이를 받치고 있는 비좌에 안상(眼象), 권운문(圈雲紋), 연화문 등이 조식됨은 바로 천상의 세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요인으로 해석된다. 이수는 비석을 구성하는 요소 중 가장 화려한 조식이 가해지는 부분으로 주로 용과 구름을 도식화한 권운문을 새기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조식은 용이 승천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신(屍身)은 이미 천상의 세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욱이 용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고, 귀부와 이수를 구비한 석비 중 가장 먼저 조성된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에서도 조각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왕과 선사의 권위를 동일시하고자 하였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석비의 세 부분은 모두 사자의 영원불멸을 상징하고 있으며, 더욱이 9세기에 건립된 석비는 대부분 선종 승려의 것임을 볼 때 이는 부도가 조사의 큰 덕과 가르침이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표방하는 것과 동일한 요인으로 생각한다.

[필자] 박경식
12)이호관, 「통일신라시대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고고 미술』 154·155, 한국 미술사 학회, 1982, 138쪽.
13)삼국시대에 건립된 진흥왕의 네 순수비 및 단양의 신라 적성비, 광개토왕비, 중원 고구려비, 울진 봉평비 등을 볼 때 석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비신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비신과 비좌만이 석비의 구성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14)이호관, 앞의 글, 166∼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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