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만남과 유람1. 다양한 만남과 만남을 기록한 그림

사적인 만남, 아집도·전별도·시회도

공적인 만남이 사대부 미술에 중요한 흔적을 남긴 것 이상으로 사대부들은 사적인 만남을 통하여 늘 교류하고 이를 회화 작품으로 기록하였다. 사대부의 만남은 여러 가지 계기로 이루어졌다. 좋은 절기가 되었을 때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태평성세를 칭송하기도 하였고, 뜻이 맞는 친구들 간에 즐거운 시간을 나누려고 모이기도 하였다. 일 년 중 좋은 절기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시서화로 즐기는 습속은 중국 동진시대 문인이며 서예가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수계(蘭亭修禊)로부터 유래되었다. 353년(영화 9) 삼월삼짓날 사기(邪氣)를 쫓기 위하여 여러 문인이 모여 즐긴 것을 기념한 이 고사는 사대부의 풍류 넘치는 모임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자주 인용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의 모임은 난정수계나 서원아집(西園雅集), 향산 구로회 등 중국의 문인 고사에 비유되곤 하였다. 예컨대 18세기 정선과 그 주변 문인들이 조유수(趙裕壽, 1663∼1741)의 집에 모여 시서화로 즐기는 일이 잦자 세상 사람들은 이들의 모임을 향산 구로회에 비유하였다고 한다.209) 조선 후기에는 북송의 이공린(李公麟, 1049∼1106)과 주변 문인들이 서원에서 모였던 서원아집을 표방한 모임과 이를 그림으로 재현한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의 제작이 성행하였다. 문인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정치적 이상과 학문적 동질성을 나누었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 않고서 만나는 모임도 있었다.

조선 전반까지는 사대부 관료들의 모임과 이를 기념하기 위한 기록물로 계회도의 제작이 성행하였던 반면, 17세기 이후 조선 후반부터는 사적인 동기로 만나 즐기는 아회(雅會)를 담은 그림이 증가하였다.210) 이는 선비 계층의 사회적·정치적, 때로는 사상적·문화적 역할이 달라진 것을 반영한 변화로도 보인다. 조선 사회는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등용된 문무 관료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지식인이며 지배층인 사족들의 정치적·사회적· 문화적, 때로는 경제적 역할은 회화 분야에도 특정한 주제와 소재, 형식과 화풍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사대부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그림도 조선 전반의 공적인 만남을 재현한 계회도에서 조선 후반의 사적인 모임을 재현한 아회도로 변하여 갔는데, 이는 조선시대 지배 계층의 정치적 성향과 사회적 역할, 문화가 변한 것을 시사하고 있다.

<서원아집도>   
1778년(정조 2)에 김홍도가 그린 6폭 병풍이다. 북송대 소식의 정원인 서원에서 여러 문사가 모여 시서화로 즐겼다는 고사를 그린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이후 선비들의 아회가 유행하면서 자주 그려졌다.

선비들의 만남 가운데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지인들을 송별하면서 이루어진 전송연(餞送宴), 다른 지역의 관리로 떠나는 친구를 보내는 모임, 고향으로 낙향하는 지인을 보내는 모임 등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이루었던 다양한 전별연(餞別宴)이 있다. 전별연은 조선 초부터 조선 말까지 사대부의 풍속으로 이어졌는데, 음주와 시문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으며, 때로는 그림을 그려 기념하기도 하였다. 조선 초 사림파 관료였던 이현보가 늙으신 부모님을 부양한다는 명분으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할 때 제작된 한강전별도(漢江餞別圖)는 전별의 장면을 재현한 작품이다.211) 당시 이현보의 귀향은 노친(老親)의 공양이라는 명분과 함께 귀거래(歸去來)의 의지를 실천한 매우 드문 사건이었기에 한양 사대부들 사이에 회자(膾炙)되었다. 한강에서 있었던 전별연은 당대의 명류(名流)들이 참석하여 한양을 떠들썩하게 한 연회였다고 한다.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錢圖)는 한강변의 제천정에서 이루어 진 전별연을 재현하고 있다. 커다란 바위 옆에 있는 누각 안에서 여러 사대부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으며, 누각 아래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 건너편에 나타나고 있는 큰 산은 청계산일 것이다.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의 모임을 그린 것이지만 사람은 작게 그리고 산수 경치는 크게 그린, 일종의 실경산수화이다. 사람들의 모습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그 배경이 되었던 산수 자연을 부각시킨 것은 아름다운 실경을 통하여 이들이 가졌던 모임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즉, 이 성대한 모임이 곧 자연과도 같이 영원히 변치 않을 듯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무진추한강음전도>   
동료나 친구가 멀리 떠나는 길에는 아는 이들이 모여 송별연을 베풀곤 하였다. 한강가 제천정에서 벌어진 송별연을 그린 이 기념화는 동료 문인의 귀향을 축복하는 친구들의 마음처럼 풍요롭고 아름다운 실경으로 표현되었다.
<무진추한강음전도>   

전별의 풍습과 이를 시서화로 기념하는 관례는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정선의 서교전의도(西郊餞儀圖)는 청나라의 연경(燕京, 북경)으로 사행(使行)을 떠나는 문인들을 송별하기 위한 모임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고 한양의 인왕산과 안산 등 주요한 산들과 홍제동 고갯길 주변의 경치가 재현되었다. 산수 자연의 아름다움과 윤택함은 모인 사람들의 정과 의리를 은유적으로 전달해 주며, 이렇게 아름다운 모임이 이루어진 시절, 태평성세에 대한 찬양인 듯이 보인다. 이는 조선 초의 계회도에서 정립된, 실경산수화를 통해 모임의 의미를 은유하는 방식이 이어진 것이다. 정선은 오랜 문인 전통과 회화적 관습을 진경산수화에 융합시켰다.

<서교전의도>   
이 작품은 중국으로 사행 가는 사대부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전별연을 그린 것이다. 모화관(慕華館) 앞에서 치른 행사 장면을 그리면서 한양의 아름다운 진경을 통하여 은유하는 수법을 채택하였다.

사대부 문인들은 적당한 기회에 만나 근교의 산수를 돌아보면서 즐기는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 풍류를 즐기는 사적인 모임과 이를 기념한 회화의 제작은 17세기 이후 정립된 선비 문화의 성격과 새로운 경향을 대변하고 있다. 이익(李瀷, 1681∼1763) 집안에서 나온 17세기의 청풍계도(淸風溪圖)는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김상헌의 집에 모여 노닌 일군의 문인들의 주문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1620년(광해군 12) 김신국(金藎國, 1572∼1657), 이상의(李尙毅, 1560∼1624) 등 일곱 명의 선비가 한양의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청풍계의 태고정에서 모임을 가지고 이를 기념하는 서화첩을 제작하였다. 당시 태고정의 주인인 김상헌은 현장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선비는 한양의 승경으로 유명한 청풍계에서 모임을 가지고 그곳의 실경을 그려 나누어 가졌다. 1735년(영조 11) 이상의의 후손인 이익은 116년 전 선조의 행적을 기록한 가전 화첩(家傳畵帖)이 상한 것을 보고는 화공을 동원하여 옛 그림을 토 대로 새롭게 그리게 하고 장황(裝潢)하였다.212) 이처럼 회화를 통하여 선비들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하고, 이를 집안의 가보로 전수하면서 가통을 형성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의미 있는 사건이나 만남을 기록한 회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장식물만이 아니라 역사를 보존하여 전수하는 적극적인 기능을 수행하였다. 공리적(公利的)인 기능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인정되었기에 회화의 제작은 정당한 명분을 가진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조선 중기 이후 다양한 기록적 회화와 기념물로서의 회화 제작이 성행하였다.

<『청풍계첩(靑楓溪帖)』>   
이익이 새롭게 장황한 가전화첩인 『청풍계첩』의 한 면이다. 청풍상춘(靑楓賞春)이라고 섰다. 『청풍계첩』은 한양의 유명한 명승인 청풍계에서 만난 사대부들의 모임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으로, 청풍계도(119쪽 참조)가 들어 있다.

18세기 이후 선비들의 사적인 모임은 더욱 성행하였다. 조선 후기의 새로운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현실과 개성, 경험을 중시한 진취적인 문인 문화는 선비들의 풍류 의식과 탐미 생활, 경제적인 풍요를 토대로 서화 고동(書畵古董) 수장과 감상 등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낳았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은일한 선비들은 물론 관료 문인들과 여항(閭巷) 문인들도 집단적으로 교유하고 시서화를 즐겼으며, 유람과 풍류를 즐기는 삶을 영위하였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사는 주거지를 중심으로 교유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양 지역의 경우 인왕산과 북악산 주변인 우대에 모여 살던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모임이 유명하다. 이들은 한양에 세거하던 경화 세족(京華世族)으로서 노론(老論) 가운데 비교적 진취적인 성향을 드러낸 낙론(洛論)으로 분류되었다.

안산 지역에 거주하던 근기(近畿) 남인 계열의 선비들과 소북 계통의 선비들이 이룬 풍류와 문학, 그림과 글씨도 18세기 사회의 현실적인 주류가 아니었던 문인 집단의 독특한 행적으로 주목되고 있다. 18세기 중엽 무렵 강세황, 허필, 유경종, 이용휴 등 명문대가(名門大家) 출신의 선비들은 스스로 ‘안산 15학사’라고 부르면서 집단적으로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시대관과 가치관, 예술관을 제기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213) 시서화의 측면에서 각자의 장기에 따라 분야별로 많은 성취를 이루었는데, 수많은 풍류적인 만남과 모임을 가지고 이를 시서화로 표현하는 일을 시도하였다.214) 이들의 모임은 좋은 절기, 특별한 장소, 의미 있는 사건을 계기로 수시로 이루어졌다. 때로는 단옷날에 포구에서 만나 바다를 선유하면서, 때로는 따사로운 봄날에 25명이나 되는 인사들이 한양의 세검정(洗劍亭)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여름 복날 해장국을 만들어 먹거나 깊은 산속의 오래된 사찰에서 밤새도록 만나는 풍류를 이루었다.215) 허필과 강세황은 그들이 거주하던 안산 주변을 유람하고 시화첩인 『표연록(豹煙錄)』을 제작하기도 하였다.216) 1747년(영조 23) 여름날의 모임을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는 이들 모임의 성격과 문예적 이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현정승집도>   
더운 여름 복날 개를 잡아먹는 모임을 가지고 이를 기념하려고 제작한 작품이다. 선비 화가 강세황은 풍속화를 그리면서 담백한 구성, 간결한 묘사, 수묵을 고수하여 사인 풍속화의 전형을 보여 준다.

복날은 개를 잡아 여럿이 먹는 모임을 즐기는 것이 풍속이다. 정해년 6월 1일 초복이었는데 마침 일이 있어 그 다음 날 현곡 청문당(靑文堂)에 모여 모임을 개최하였다. 주연이 무르익자 강세황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훗날의 볼거리로 삼으려 한다. …… 장맛비가 처음 걷히고 새로 매미소리가 흘러나오고 거문고소리와 노랫소리가 번갈아 일어나는 가운데 술을 마시며 시를 읊어 피로를 잊었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덕조는 시를 짓고 모든 사람은 각기 시를 지어 그 밑에 달았다.217)

<옥동척강도>   
어느 날 우연히 만나 인왕산의 옥류동에서 청풍계까지 등산을 감행하고 이를 기념하려고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이 모임에는 화가인 정선도 합류하였는데, 갓을 쓴 평상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선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이 작품은 그날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과 상황이 그대로 묘사된 풍속화 이다. 산수 배경도 없고, 채색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간결하면서도 구체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강세황은 산수화를 즐겨 그리고 풍속화는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러나 풍속화가로 이름을 얻었던 김홍도를 발탁하고 후원하면서 풍속화의 유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현정승집도는 강세황이 풍속화의 성격과 요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보여 준다. 동시에 선비 화가 윤두서가 시작한 백묘화법(白描畵法)으로 그린 선비 풍속화의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사인휘호(士人揮毫)>   
강희언이 그린 사인삼경도 중 한 면이다. 더운 여름 정자에 모여 시서화로 소일하는 여항인(閭巷人)들의 모습을 담았다. 각자의 장기를 한껏 과시하고 있는 듯한데, 한 젊은 선비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작품에 몰두하는 등 격의 없이 즐기는 모습이다.

18세기 이후 선비들의 사적인 모임을 재현한 그림이 많이 제작되었다. 이는 선비들의 모임이 많아진 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또한 이들의 모임이 시서화로 즐기는 고도의 문화적인 모임이었음을 보여 준다는 의미도 있다. 정선의 옥동척강도(玉洞陟崗圖)와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 김석신(金碩臣, 1758∼?)의 『도봉첩(道峯帖)』, 가고중류도(茄鼓中流圖)는 진경산수화로 표현한 작품이고,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아집도는 선비들의 모임을 사의적(寫意的)인 산수화나 인물화로 표현한 경우이다. 그리고 강희언(姜熙彦, 1710∼1784)의 사인삼경도(士人三景圖), 강세황의 현정승집도,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현이도(賢已圖),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십우도(十友圖), 이유신(李維新)의 행정추상도(杏亭秋賞圖) 등은 풍속화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선비들의 모임은 지방에서도 유행하였다. 안동 지역 선비들의 선유(船 遊)를 기록한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의 『허주부군산수유첩(虛舟府君山水遺帖)』도 주목된다. 이 작품은 안동에 세거하던 지방 사족인 이종악이 1763년(영조 39) 여러 선비와 함께 낙동강 반변천(半邊川)을 선유하고 꾸민 시화첩이다.218) 이때의 선유는 이종악, 집안 아저씨 세 명, 외제(外弟) 한 명 등 모두 다섯 명이 동참하여 1763년 4월 4일에 시작되어 4월 8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다. 선유의 과정을 그대로 담은 것은 아니고 이종악의 뜻에 따라 주유의 순서를 재조정하여 실었다. 화첩에 나타나는 12명승은 현재 안동 시내에서 임하·임동·길안면에 분포하고 있는 곳들이다. 첫 장면인 동호해람(東湖海纜)은 자신이 살던 임청각(臨淸閣) 앞의 동호에서 선유를 시작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는 안동 고성 이씨 종택(宗宅)인 임청각과 국보 제16호로 지정된 법흥사지 7층 석탑이 나타나며 주변의 경관을 어느 정도 사실적으로 재현하였다. 경물의 위치는 배산임수의 풍수적인 개념을 토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화풍의 측면에서는 경기도 안산 지역에 살았던 선비 화가로, 이종악과 교분을 나누던 허필(許佖, 1709∼1761)의 화풍과 친연성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餘技) 화가의 졸박한 그림이지만 시서화금(詩書畵琴) 사절(四絶)로 칭송받던 이종악의 풍류를 담고 있다.

<동호해람>   
안동의 선비 이종악이 낙동강을 따라 선유하고 이때 만든 시서화를 담은 화첩을 꾸몄다. 안동 임청각 앞에서 배를 띄우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장면이다. 조선 후기에는 선비들의 삶과 풍류를 담은 서화의 제작이 유행하여 진경산수화가 정립되는 데 기여하였다.
[필자] 박은순
209)박은순, 『금강산도 연구』, 일지사, 1997 참조.
210)조선 후기의 아회도에 대하여는 송희경, 앞의 글 참조.
211)이 작품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은순, 앞의 글, 1996 참조.
212)이익(李瀷), 『성호전집(星湖全集)』 권56,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 한국 문집 총간 199, 민족문화추진회, 1997 참조.
213)안산의 문인 사회와 안산 15학사에 대하여는 강경훈, 「중암 강이천 문학 연구」, 『고서 연구』 15, 한국 고서 연구회, 1997 ; 정은진, 「강세황의 안산 생활과 문예 활동-유경종과의 교유를 중심으로-」, 『한국 한문학 연구』 25, 한국 한문학회, 2000, 367∼396쪽 참조.
214)이들 모임의 성격과 상황은 다음 시에서 잘 드러난다. “노래 한 곡에 거문고 한 가락, 술 한 잔에 시 한 수, 술 한 말에 시가 백 편, 우리의 시회 양춘(陽春)과 백설(白雪) 같네.” 양춘과 백설은 전국시대 초나라의 고아한 가곡을 가리킨다(박용만, 「안산 시절 강세황의 교유와 문예 활동」, 『표암 강세황』, 한국 서예사 특별전 23, 예술의 전당 서울 서예 박물관, 2003, 390쪽 참조).
215)강세황(姜世晃), 『표암유고(豹菴遺稿)』 권2, 「현정승집기(玄亭勝集記)」(1747) ; 『표암유고』 권1, 「기사춘유세검정여최주기임치재제공공이십오인명부(己巳(1749)春遊洗劍亭與崔杜機任慒齋諸公公二十五人名賦)」 ; 『표암유고』 권5, 제발(題跋), 「서해산아집첩(書海山雅集帖)」(1757) ; 『표암유고』 권3 ; 문영오, 『표암 강세황의 시서 연구』, 태학사, 1997 ; 정은진, 앞의 글 참조.
216)김계리, 「표암 강세황의 『송도기행첩』 연구-제작 경위와 화첩의 순서를 중심으로-」, 『미술 사학 연구』 238·239, 한국 미술사 학회, 2003, 187쪽.
217)강세황, 『표암유고』 권3, 「현정승집기」.
218)이 화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조선시대 명가의 고문서-안동 고성 이씨·의정부 반남 박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3, 128∼143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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