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미술관, 백화점 화랑, 카페에서 만나는 미술

1930년대에 들어 전시회가 비교적 활발하게 열리고 볼거리를 찾는 관람객이 줄을 이었지만, 제대로 된 전시 공간이 확충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규모가 큰 전시회인 조선 미술 전람회도 처음 개최될 때에는 영락정의 조선 총독부 상품 진열관에서 시작하였다. 비교적 많은 회원이 참가하는 공모전 인 협전도 계속해서 학교 강당을 빌려 전시를 꾸려 나갔으며, 녹향회 전시는 천도교 기념관 등을 빌려 열었다. 규모가 크지 않은 개인전이나 단체전은 동아일보사, 매일신보사 등의 신문사 강당을 빌려 열었고, 지방에서는 수원 공회당(公會堂), 전주 공회당 같은 공공 기관을 빌려 개최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수묵 채색화가들의 작품을 진열하는 휘호회는 전통적인 서화 모임의 관습 때문인지 명월관이나 파성관(巴城館) 같은 요릿집에서 많이 열렸다. 이러한 전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기 쉽고, 일정한 공간이 있어서 많은 작품을 한 번에 전시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선정되었지만, 전시를 위한 설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이쾌대(李快大, 1912∼1953), 김용준 등의 화가와 고유섭(高裕燮, 1905∼1944) 등 미술 사학자 10명이 모여 벌인 좌담회(座談會)에서는 미술 감상의 기회가 매우 적음을 토로하였는데,157) 관람 기회를 늘리려면 우선 전시 공간의 확충이 필요한 형편이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화랑>   
미쓰코시 백화점은 3층에 화랑이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옥상의 정원을 전시장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종로의 화신 백화점과 본정통의 미쓰코시 백화점 등 1930년대에 세워진 백화점들에 마련된 화랑에서는 많은 개인전과 단체전이 열렸다.

1930년대에 들어 개인전과 동인전 등이 점차 늘어나고, 공공 기관의 강당에 더해 새롭게 전시장으로 등장한 것이 백화점 화랑(畵廊)이다. 일본인 거리인 본정통(本町通, 현재의 충무로)에 들어선 미쓰코시 백화점(三越百貨 店)은 광복 후 동화(同和) 백화점과 신세계(新世界) 백화점으로 맥이 이어지는데, 1931년에 백화점을 신축하면서 전시장도 함께 자리를 잡았다. 수묵 채색화를 그리는 김은호와 허백련(許百鍊, 1891∼1977) 2인의 작품전이 1932년 7월 18일부터 7월 20일까지 미쓰코시 화랑에서 열렸다.158) 1931년에 조선인 거리인 종로에 들어선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의 화신 화랑도 목일회전(木一會展), 녹과회전이 열리는 등 단체전과 개인전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이미 화려한 쇼윈도로 대중의 눈길을 끌던 백화점에 화랑 공간이 형성되는 것은 상품과 미술품이라는 두 가지 볼거리가 결합되어 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녹과회전을 알리는 화신 백화점 야경>   
1938년에 열린 제3회 녹과전을 네온사인으로 알리고 있다. 화신 백화점은 1931년 4층으로 증개축하여 5층 옥상에 화랑을 개설하였다. 1935년에 화재로 불탄 화신 백화점은 1937년 지상 6층 건물로 재건축하였다.

전시 공간은 문화 예술인들이 즐겨 모이는 공간인 다방(茶房)과 카페 등으로도 확산되었다. 길진섭은 카페 낙랑 파-라에서 1936년 3월에 개인전을 열었으며, 같은 해 6월에 창립한 녹과회도 플라타느(Platane) 다방에서 창립전(創立展)을 열었다.159) 이처럼 전시장은 다양화되고 있었지만 이때의 전시장이 전시물을 염두에 두고 천정을 높게 한다거나 전시물을 설치할 수 있도록 레일을 가설하고 조명 장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다만 백 화점 화랑은 상업 시설 안에서나마 미술 전시를 위한 전용 공간으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전시장의 새로운 진전이라고 하겠다. 당시 사람들은 근대 도시의 대표적인 시설물에 설치된 화랑에서 하는 미술 감상을 근대화된 문화적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플라타느 다방>   
작가들이 1936년 6월 10일에서 12일까지 열린 제1회 녹과전 전람회장인 장곡천정의 플라타느 다방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문화 예술인들이 즐겨 모이는 다방이나 카페 등도 전시장으로 활용되었다.

사설 또는 상업 전시장이 아닌 공공 전시장도 1930년대 후반에 마련되었다. 창경궁에 박물관 건물을 짓고 미술품과 유물을 구입하여 박물관을 꾸렸던 이왕가 박물관은 고종 황제가 서거(逝去)한 뒤 공원으로 개방되었던 덕수궁으로 이전하였는데, 이미 1933년부터 석조전(石造殿)을 개조하여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왕가 덕수궁 미술관(李王家德壽宮美術館)의 진열품은 조선의 유물을 전시한 이왕가 박물관과 달리, 일본 근현대 작가의 작품을 대여하거나 구매하여 일정 기간 전시하는 것으로 당시 식민지 조선 내에 일본 미술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왕가 미술관이 당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여 운영하는 것에 관해서는 당시에도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이 전시장은 최초의 독립된 공공 미술 전시관이었다.160)뒤인 1937년 경복궁 후원 쪽에 조선 총독부 미술관이 건설되어 조선 미술 전람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왕가 미술관-덕수궁 석조전(石造殿)이왕가 미술관>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1938년에는 석조전 옆에 서관을 지었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석조전(동관)과 서관을 합하여 이왕가 미술관이라 하였다. 이왕가 미술관은 당시 식민지 조선 내에 일본 미술만을 전시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덕수궁 서관(西館)>   
<석조전의 조각 전시>   
<석조전의 서양화 전시>   

개인전은 말할 것도 없고 공모전이나 단체전도 전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개 사흘 정도였고 길어야 이레를 넘지 않았으며, 전시 기간이 가장 긴 조선 미술 전람회도 20일을 웃돌지 않았다. 그러나 대규모 공모전 같은 전시가 열리면 신문에서 사진 등을 곁들여 집중적으로 보도한 덕에 전시는 대중적 문화 행사가 되었던 듯하다. 미술 작품이 프레임이라는 틀 안에서 사물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근대화된 도시 공간이나 양장(洋裝)을 한 여인의 모습 등을 담은 그림들은 그러한 도시적인 모습을 다시금 시각적으로 인지시키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1920년대 말 이후 주요 소재로 떠오른 ‘향토적’인 것을 그린 그림들은 일본인 화가의 눈을 통해서건 조선인 화가의 눈을 통해서건 당시 조선인의 모습을 외부인 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총독부 미술관>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乾淸宮) 자리에 세운 조선 총독부 미술관을 촬영한 사진엽서이다. 여기에 미술관을 건설한 것은 기존 조선 총독부 박물관과 함께 경복궁에 복합 문화공간(complex)을 세우려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 전시 체제가 되면서 미술관을 짓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이 미술관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미술 전시장, 공예품 전시장 등으로 활용되다가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이처럼 새로운 시점을 제공하는 미술 전람회는 일종의 축제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1935년 당시 경성 인구가 44만 명 정도였다고 할 때161) 조선 미술 전람회에 약 3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하는 것은 인구 15명당 한 명 꼴로 전시를 감상한 셈이니, 미취학 아동과 노년층을 제외한다면 경성 인구의 반수 이상은 관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사람들은 ‘전시’라는 것을 조선 물산 공진회 등의 박람회와 조선 미술 전람회, 그리고 각종 단체전과 개인전 등을 통해 근대화된 문화적 경험으로 익혀 가고 있었다.

[필자] 목수현
157)이쾌대는 대중이 미술가의 작품을 전람회를 통해서만 보게 되니 학교나 공원, 도서관이나 공장 건물 등에서도 회화나 조각을 진열하고 감상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조선 신미술 문화 창정 대평의회(朝鮮新美術文化創定大評議會)」, 『춘추(春秋)』 1941년 6월호, 163∼164쪽).
158)『동아일보』 1932년 7월 19일자.
159)낙랑 파라와 플라타느는 둘 다 현재의 소공로에 위치해 있었다. 1930년대 중엽 경성을 소개하는 책자인 『신판 대경성 안내(新版大京城案內)』에서는 낙랑 파라의 주인은 화가였으며 플라타느에서는 회화 소품전이 가끔 열렸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新版大京城案內』, 京城都市文化硏究所, 1936, 57쪽).
160)덕수궁 이왕가 미술관은 석조전을 개조하여 1933년부터 당대 일본 대가의 작품을 진열하였으며, 『덕수궁 이왕가 미술관 전시 도록』을 해마다 발간하였다. 이 옆에 신관을 지어 1938년에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을 옮겨와 진열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고미술품과 일본의 당대 미술품을 나란히 전시하였는데, 이는 조선의 문화를 과거의 것으로 한정시키고 현재의 문화는 일본의 것이 되었음을 전시로서 인식하게 하는 장치였다. 이에 관해서는 목수현, 「일제하 이왕가 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 『한국 근대 미술과 시각 문화』, 조형 교육, 2002, 260∼263쪽 참조.
161)『新版大京城案內』, 京城都市文化硏究所, 1936,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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