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본 근대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경성은 고층 건물이 즐비한 본격적인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게 된다. 1899년(광무 3)에 사람들의 호기심 속에서 등장한 전차는 중요한 대중 교통수단이었고, 1928년부터는 시내버스도 운행하기 시작하였다. 신식 건물이 들어서고 백화점, 카페, 은행, 호텔, 상점 등이 도로 변에 들어섰다. 1920년대에 30만이던 경성의 인구가 1935년에는 40만, 1940년대에는 약 100만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의 도시적 삶의 중요한 특징은 군중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경험과 볼거리였다.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은 1934년에 발표한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하루 종일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설가의 하루를 묘사하였다. 주인공이자 산책자(flaneur)인 구보 씨는 정오에 집을 나와 광교에서 시작하여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타고 조선은행, 부청(府廳), 대한문, 남대문, 경성역, 다시 조선은행, 다시 종로 네거리의 다방, 황금정의 술집 등을 특별한 목적도 없이 돌아다니다 새벽 2시에 집으로 돌아온다. 구보 씨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가 19세기 중반에 근대적 대도시로 탈바꿈한 파리에서 경험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상사에서 근대성을 발견하는 산책자이다. 이렇게 식민지 치하에서 안정적인 직장이 없는 지식인이나 화가, 또는 고급 룸펜(Lumpen)들은 특별한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거닐었고 카페(café)에 앉아 있었다.302) 카페는 지성과 예술을 논하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카페’라는 서양식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무언가 근대적인 분위기에 젖어 볼 수 있는 곳이었고, 여기에는 에로티시즘을 팔던 여급들이 있었다. “종로를 중심으로 하여 그 근방에만 있는 카페 수만 하여도 십여 곳이 되며, 웨이트레스의 수효만 하여도 ‘목단’에 스물하나 ‘락원’에 쉰셋, ‘평화’에 스물넷 이렇게만 쳐도 그 수효가 역시 수백 명이나 되니”라고 하였듯이, 카페는 근대화되어 가던 도시에서 남녀의 호기심과 욕망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였다.303)
도시는 또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시골 사람들에게 도시는 구경거리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공간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근대적 전시 공간은 공진회(共進會)나 박람회(博覽會)였다. 1851년에 영국 런던에서 처음 개최된 만국 박람회는 산업 혁명이 불러온 생활의 향상, 인류의 진보, 과학의 발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대규모 전시 공간으로, 19세기 후반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볼거리의 하나로 등장하였다.304) 이어 아시아에서도 서구의 박람회를 모방하기 시작해 일본 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정부 주도의 내국 권업 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에 조선 통감부 주최로 산업화한 생활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경성 박람회(京城博覽會)가 열렸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이다. 경성 박람회는 처음에는 관람객이 뜸하였으나 구경거리가 많다는 소문이 돌자 나중에는 인파가 몰려 하루 평균 2,8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한다.305)
1915년에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始政五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는 51일간 무려 11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공진회는 박람회보다 격이 낮았으나 개막일 세 달 전부터 포스터를 붙이고 마네킹을 내세웠으며, 서구의 박람회처럼 밤에는 휘황찬란한 전등을 밝힘으로써 화려한 스펙터클을 연출하였다. 공진회는 우리나라 미술 전시회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공진회 본관에서는 고미술을, 분관과 참고 미술관에서는 신미술을 전시하였다. 이 전시에는 일본 화가뿐 아니라 조선 화가도 참여시켰는데,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조석진(趙錫晉, 1853∼1920) 같은 서화가의 작품도 있었지만 동경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온 우리 나라 첫 번째 서양화가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의 작품도 전시되었다.
무엇인가를 관람한다는 것은 근대적 행위의 하나였다. 이미 1911년에 문을 연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과 1915년에 개관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 근대적인 기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창경궁(昌慶宮)은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0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동물원과 식물원을 갖추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왕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바꾸어 버린 것도 부족해 창경원에 일본의 국화인 벚꽃을 200그루 이상 심었는데, 해마다 4월에 열린 벚꽃 놀이는 전등불을 달고 대규모의 무대 공연까지 곁들인 또 다른 볼거리였다.
1930년대에는 소비 생활 역시 하나의 패턴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리에는 한문을 주로 사용한 울긋불긋한 간판이 달리기 시작하였고, 이는 도시 시각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1932년부터는 네온사인이 달리면서 한층 화려해진 거리에 근대적 소비의 상징인 백화점이 등장하였다. 경성에 처음 들어선 백화점은 1906년의 미쓰코시 백화점(三越百貨店)으로, 현재 명동 사보이 호텔 건물에 미쓰코시 경성 출장소 미쓰코시 오복점(吳服店)으로 시작하 였다. 1930년에 현재 신세계 백화점 자리의 신축 건물로 이사하면서 미쓰코시 백화점은 일본인 거주자들이 즐겨 찾는 최고의 백화점으로 군림하였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으로는 이 밖에도 히라다(平田) 백화점(1926년 개점)과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1922년 개점), 조지야(丁子屋) 백화점(1921년 개점, 현재 롯데 백화점) 등이 있었다. 청계천 이북의 한국인 거주 지역에는 한국인 소유의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도 있었다. 화신 백화점은 조선인 거부였던 박흥식(朴興植, 1903∼1988)이 세워 1937년에 완공되었는데(1988년에 헐렸다), 당시 서울 인구의 80%가 구경하였다고 한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갖춘 이 건물은 총 7층으로, 지하 1층에는 식료품부와 식기류의 상품이 있었고, 1층에서 4층까지는 매장, 5층에는 식당과 화랑, 6층에는 ‘그랜드 홀’을 두어 다양한 용도의 연회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으며 보통 때에는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다.
문화사학자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말한 바와 같이, 백화점은 단순히 물건을 사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복합적 문화 공간이었다. 베넷은 백화점을 같은 19세기에 세워지기 시작한 근대적 문화 공간인 박물관과 비교하 면서, 이 두 공간이 “취향을 개선시키고 행동의 가치와 규범을 더 넓게 사회에 보급시키기 위한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306)
우리나라 사람들도 화신 백화점에서 새로운 생활품을 보면서 근대적 생활을 꿈꾸고 배웠다. 거리의 커다란 쇼윈도에는 유행에 따른 의상을 걸친 마네킹과 상품이 스펙터클을 조장하였다. 혹자는 화신을 구경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신 본점의 5층 누상(樓上)에는 ‘화신’의 표를 그린 붉은 깃대가 창천에 높이 훨훨 휘날리고 있고 신관 전면으로는 울긋불긋한 커다란 꽃다발 두 개가 달려 있어 이른 아침부터 말쑥하게 차리고 거리로 흘러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군데로 집중시키고 있다. 문 앞에 몰려드는 인파에 휩싸여 나도 그 속에 끼어들었다. 문 안을 썩 들어서니 문 밖에만 사람들이 밀리는 것이 아니고 점내(店內)는 더욱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다. 대개는 가정에서 통틀어 나온 모양이다.”307)
이러한 도시 생활에 역동감을 불어넣은 것은 모던 보이(modern boy)와 모던 걸(modern girl)이었다.308) 그 중에서도 근대적 교육을 받고 양복을 입고 안경을 쓴 채 단장(短杖)을 들고 다니던 근대남(近代男)을 의미하는 모던 보이보다는 모던 걸이 더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1920년대에는 여류 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6), 잡지사 편집인 김원주(金元周, 1896∼1971, 일명 일엽(一葉)), 성악가 윤심덕(尹心悳, 1897∼1926) 같은 선구자들처럼 신식 교육을 받고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던 신여성(新女性)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면, 1930년대에는 일반의 호기심이 모던 걸에게 집중되었다. 모던 걸은 엘리트적 신여성과는 다른 종류의 여성이었다. 모던 걸의 범위에는 여학생과 직업여성뿐 아니라 교육을 받지 않 고 직업이 없더라도 이들과 같은 옷차림을 한 여성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1920년대의 신여성은 짧은 치마와 긴 저고리의 개량 한복, 트레머리, 높은 구두로 멋을 냈지만, 1930년대의 모던 걸은 단발에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복식과 화장으로 여성의 신체를 강조하곤 하였다.
모던 걸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도시가 발달하면서 새로운 직업여성이 등장한 것과 관계가 있다. 다방이나 카페에서 일하는 여성, 회사의 여사무원, 백화점 직원, 미용사, 전화 교환수 등의 모던 걸은 경제력을 가졌고, 직업상 양장(洋裝)을 하였으며, 남성과 접촉할 기회도 많았다. 선진적 이미지를 가졌던 신여성과 달리 모던 걸은 소비 지향적이고 유행에 민감하며, 가볍고 풍기 문란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비쳐졌다. 모던 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도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과도 중첩된다. 화려한 도시의 외형 뒤에는 빈민 노동자가 있었고 타락의 나락이 있었다.309) 화가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도시의 부정적인 특성을 연탄 연기, 가솔린, 비단옷, 뾰족한 구두, 허영만 지니고 희망은 갖지 못하는 것, 자연미에 대한 무지로 보았다.310)
신여성이나 모던 걸로 대변되던 근대 여성의 이미지는 1937년에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또 다시 변화하였다. 전쟁에는 전방과 후방이 없으며 각자의 직장이야말로 전장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여성의 역할은 후방에서 가정을 지키고 아이들을 건강한 황국의 시민으로 교육시키는 일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42년 제21회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서 명예로운 창덕궁상을 탄 윤효중(尹孝重, 1917∼1967)의 ‘현명(弦鳴)’(1942)에 서 보이는 강인하고 군사적인 여성의 이미지는 현대적 여성의 성을 부정한다. 군복 입은 건강한 청년들의 모습과 몸뻬 바지를 입고 노동을 하거나 아들을 학병(學兵)으로 보내는 어머니, 또는 종군 간호부와 같이 체력을 단련한 강한 여성의 이미지가 『소국민』, 『신시대』, 『소년』 같은 잡지의 표지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식민 치하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1940년에 이르러 인구 100만의 도시로 성장한 경성은 이미 자본주의가 정착하고 소비문화가 형성되면서 근대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 시각 문화의 중심은 신문, 잡지, 광고 등의 인쇄 매체와 사진이었다. 비록 조선 미술 전람회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서양화, 동양화, 조각으로 나뉘어 전시된 미술 전람회를 관람할 수도 있었지만, 일반인이 근대 문화를 경험하고 동경하고 소비하게 한 것은 고급문화보다 주로 신문과 잡지에 기사와 함께 실린 삽화나 사진, 주거와 거리에서 본 시가의 변화, 그리고 상점과 백화점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1940년에 들어서면서 태평양 전쟁은 모든 문화적 활동을 위축시켰고 많은 신문, 잡지가 폐간되거나 검열을 당하여야 했다. 바야흐로 ‘정치화된 신체 이미지’가 포스터, 잡지, 신문 등을 휩쓸고 있었고, 이것은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우리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302) | 전혜자, 「한국 근대 문학에서의 도시와 농촌」, 『한국 근대 문학의 쟁점』 II,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2, 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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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 녹안경(綠眼鏡), 「카페 여급 언파레-드」, 『별건곤(別乾坤)』 1931년 11월호 : 김진송, 앞의 책, 259∼260쪽 재인용. |
304) |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 공간 :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와 조선관」, 『서양 미술 사학회 논문집』 13, 서양 미술 사학회, 2000, 33∼53쪽. |
305) | Augus Hamilton, Major Herbert H. Austin, Viscount Masatake Terauchi, Korea its History, its People, and its Commerce, Oriental Series, v. XIII, (J.B.Millet Co., 1910), p.293. |
306) | Tony Bennett, “The Formation of Museum,” The Birth of Museum, History, Theory, Politics, Routledge, London, 1995, pp. 29∼33. |
307) | 「새로 낙성된 오층루 화신 백화점 구경기」, 『삼천리』 제7권 제9호, 1935년 10월호, 142∼144쪽. |
308) | 김영나, 「논란 속의 근대성 : 신여성과 모던 걸」, 『미술사와 시각 문화』 2, 미술사와 시각 문화 학회, 2003, 8∼37쪽. |
309) | 전혜자, 「한국 근대 문학에서의 도시와 농촌」, 『한국 근대 문학의 쟁점』 II,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1992, 141쪽. |
310) | 김용준(金瑢俊), 「서울 사람. 시골 사람」, 『조광』 1936년 1월호, 335∼3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