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국왕과 그 계승자들1. 국왕 즉위식의 유형

등극

등극(登極)이라는 형식의 즉위식은 고종에게서만 나타난다. 고종은 1863년에 철종의 뒤를 이어 사위로 국왕이 되었지만,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건설하면서 황제위에 오르는 등극의(登極儀)를 거행했다. 조선의 국왕에서 대한제국의 황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고종의 황제 등극의는 선위, 사위, 반정과는 즉위식 형식이 달랐기 때문에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고종 황제 어진>   
1899년 동남아시아 여행 중에 우리나라에 온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가 그린 고종 황제의 어진이다. 고종은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사위로 국왕이 되었지만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등극의를 거행하여 황제위에 올랐다.

1897년 2월 20일에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오면서 대한제국의 탄생은 본격화되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인해 왕비가 일본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본인까지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지 1년 만이었다. 그해 10월 3일(양력)에 고종은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였다. 모든 사람이 요청하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실제로 대한제국을 출현시킨 것은 고종의 작품이었다. 고종은 열강의 압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한제국의 건설을 통해 실추된 왕권의 위엄을 높여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체면을 세울 것을 결심했다. 관리와 백성들은 국가가 위기 에 처한 것을 보면서 자주 국권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고종의 이러한 결심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고종이 황제 등극의는 10월 9일에서 14일까지 6일 동안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그동안 여러 행사가 거행되었지만 가장 중심이 되는 행사는 고종이 환구단에서 고유제와 등극의를 거행하고, 경운궁의 정전인 태극전(太極殿)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조칙을 반포하는 행사였다.

환구단에서 진행된 고유제와 등극의는 10월 12일에 있었다. 먼저 환구단 고유제는 천신(天神)인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지신(地神)인 황지기(皇地祇)의 신위(神位)에 고종이 술잔을 올리면서 황제 등극의를 거행함을 알리는 행사였는데, 천신과 지신의 신위는 환구단 제1층에 위치했다. 고유제가 시작되자 고종은 면복을 갖추어 입고 환구단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폐백(幣帛)을 올렸으며, 두 신위에 술잔을 세 차례 올린 다음 음복(飮福)을 하고 축문(祝文)을 태웠다.

<황궁우>   
1913년 일제가 환구단을 철거하고 조선 호텔을 세운 환구단터에 남아 있는 황궁우(皇穹宇)의 모습이다. 황궁우는 1899년에 세운 3층의 8각 건물이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덕수궁 즉조당에서 출궁해 환구단에서 고유제와 등극의를 거행하였다.

환구단 등극의는 고유제를 지낸 바로 그 자리에서 연이어 진행되었다. 환구단에 황제의 금의(金椅)를 설치하자 고종이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다음으로 의정(議政) 이하 신하들이 고종에게 황제를 상징하는 면복을 입혔는데, 황제의 곤룡포는 열두 가지 문양이 장식된 십이장복(十二章服)이었다. 그전까지 국왕이 입던 구장복(九章服)에 비해 위격을 한 등급 높인 복장이었다. 다음으로 의정이 황제를 상징하는 대보를 올리자 고종이 이를 받았 다. 이후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세 번 뛰는 삼무도(三舞蹈)와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三叩頭)를 거행했고, 황제의 만수를 기원하는 “만세(萬歲) 만세 만만세(萬萬歲)”를 외쳤다. 국왕에게는 천세를 외치고 황제에게는 만세를 외치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었다.

<대한국보도(大韓國寶圖)>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나오는 대한국새(大韓國璽)의 도설(圖說)이다. 대한국새는 대한제국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다.

10월 13일에 고종은 즉위 조서를 반포했는데,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며, 사직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바꾸고 황후와 황태자를 책봉함을 선포했다. 국왕의 교서가 황제의 조서로 바뀐 것이다. 고종은 또한 14개조로 된 사면령을 내렸는데, 대한제국이 탄생한 기쁨을 신하와 백성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종의 황제 등극의는 궁궐 안이 아니라 환구단에서 거행되었고, 황제를 상징하는 금의, 십이장복, 대보를 썼다는 점에서 국왕의 즉위식과 달랐다.

[필자] 김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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