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3. 궁녀

[필자] 박홍갑

압못세 든 고기들아 뉘라셔 너를 모라다가 넉커늘 든다

북해 청소(北海淸沼)를 어듸 두고 이 못세 와 든다

들고도 못 나는 정(情)은 네오 늬오 다르랴83)

조선 후기에 이름 모를 어느 궁녀가 쓴 엇시조 한 소절이다. 굳이 해석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앞 못에 들어 있는 물고기들아. 누가 너를 몰아다가 넣었기에 들었느냐. 북쪽 바다나 맑은 연못 어디 두고 이 연못에 와 들어 있느냐. 한번 들어가 못 나오는 심정은 너와 내가 다르랴.”

들어오는 길만 있을 뿐 빠져 나갈 길은 없는 게 궁녀의 생활이었다. 연못에 갇힌 물고기에 빗대어 체념을 노래한 그녀의 궁중 생활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나인(內人), 궁인(宮人), 여관(女官), 궁관(宮官) 등으로도 불렀던 궁녀는 일종의 궁중 시녀였는데, 먹고 입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등 궁중에서 필요한 여성 노동력 일체를 제공하였다. 왕과 비, 그리고 왕실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하는 몸종이었지만, 정치적 음모에 희생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짓누를 수 없는 이팔청춘의 호기심 어린 춘정(春情)에 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들이다.

천한 신분이라 할지라도 궁녀가 되면 국왕에 예속된 존재가 된다. 따라 서 궁녀는 국왕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성적 접촉이 금지되었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번 궁녀면 영원한 궁녀였다. 내명부 조직에 들어간 이상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궁중 법도였기 때문이다.

<친잠례 기념사진>   
1906년 순종 계비인 순정효 황후의 친잠례를 한 뒤 촬영한 기념사진이다. 가운데에 정좌한 순정효 황후와 함께한 내명부의 부인과 상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행여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궁궐에서 쫓겨나거나 병으로 더 이상 궁녀 생활을 할 수 없을 때뿐이었다. 그도 아니면 모시던 주인이 세상을 떠나야 출궁이 허락되는 정도였다. 궁궐을 나와도 조관(朝官)이나 종친의 처첩이 될 수 없었다. 이런 규정은 조선시대 내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그러니 출궁된 궁녀는 머리 깎고 승려가 되거나,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이토록 한 많은 궁녀 생활이었건만, 행여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 승은이라도 입으면, 갑자기 신분이 크게 뛰어올라 수많은 궁녀를 부릴 수도 있었다. 이는 천운을 타고난 억세게 재수 좋은 여자나 바라볼 일이지, 아무나 용종(龍種)을 받아 볼 팔자는 아니지 않는가. 따라서 대다수 궁녀 생활은 연못에 갇힌 물고기나 진배없었다.

이렇듯 바깥세상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수백 명의 궁녀가 득실거렸건만, 남아 있는 자료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왕실의 은밀한 부분을 누구도 거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84) 필자 역시 그럴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사대부와 일반인의 은밀한 사생활 자료는 넘쳐날까? 모르긴 해도 이 역시 궁녀 자료보다 결코 더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저 세상에서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순종 비)를 모실 수 있도록 그 분 위패가 있는 백운사에서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지내 주오.

조선 왕조 마지막 상궁 성옥염(成玉艶) 씨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1933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나이로 창덕궁 침방나인(針房內人)으로 입궁한 그녀는 김명길(1983년 작고), 박창복(1981년 작고) 두 상궁과 함께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 30여 년간 ‘조선조 마지막 왕비’를 모셨다. 침방나인으로 입궁한 그녀는 막내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순명효 황후를 모시고 부산 피란살이를 함께하였고, 전쟁 직후에는 낙선재를 국유지로 만드는 통에 정릉 별장에서 황후를 모셨다. 황후가 세상을 뜨자 그녀는 궁중 법도대로 삼년상을 치렀다. 그런 후 궁 밖으로 나오더라도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지켜 홀몸으로 여생을 살다간 마지막 상궁이었다. 2001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이렇듯 맡은 바 직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궁녀가 있었기에, 조선의 왕실은 장장 500년이나 지탱되었던 것이다.

[필자] 박홍갑
83)『화원악보(花源樂譜)』 No 160.
84)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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