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3. 궁녀

궁녀가 하는 일

조선 후기에는 대전을 비롯하여 중전과 대비전 등에 각각 100명 내외의 궁녀를 두었고, 그 아래 세자궁이나 세손궁에도 수십 명의 궁녀가 예속되어 있었다. 이들 궁녀는 자기가 속한 각 처소에서 주인을 성심껏 모셔야 했다. 그렇기에 각기 그 맡은 일에 따라 소속된 부서가 따로 있었다. 왕과 왕비 옆에서 일체의 시중을 드는 지밀을 비롯하여 침방, 수방, 세수간, 생과방, 내소주방(內燒廚房), 외소주방(外燒廚房), 세답방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궁녀는 각 처소마다 마련된 각 방에서 음식 장만, 의복 제조 등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수행하였다.

각 처소마다 소속된 궁녀 전체를 관리 통솔하는 이가 제조상궁(提調尙宮)이다. 대개 나이가 지긋하되 인물 좋고 리더십이 뛰어난 자를 임명하였다. 제조상궁의 권세나 권위는 대단하였다. 궁녀 세계에서 으뜸이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사 이면에 주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제조상궁은 대전 어명을 직접 받들고, 내전의 크고 작은 일을 주관하기 때문에 재상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였다. 제조상궁 아래에는 부제조상궁을 두었다. 부제조상궁은 왕의 사유 재산을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는 내전 곳간을 관장하였기 때문에 ‘아랫고’라고 불렀다. 이들은 가장 격이 높은 지밀방에 소속되어 있었다.

<제조상궁>   
성장(盛裝)한 제조상궁의 모습이다. 제조상궁은 각 처소마다 소속된 궁녀 전체를 관리 통솔하였고, 대전의 어명을 직접 받들고 내전의 대소사를 주관하였기 때문에 위세가 대단하였다.

각 방 상궁이 특정한 일을 맡은 때는 그 업무에 따른 호칭으로도 불렸다. 언제 떨어질지 모를 어명 때문에 임금 곁을 지키면서 항상 대기해야 하는 지밀상궁은 특명상궁(特命尙宮) 혹은 대령상궁(待令尙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 임금이 낳은 자녀 양육을 맡은 보모상궁, 서적을 관리하고 글을 낭독하 는 일을 맡은 시녀상궁(侍女尙宮), 궁녀들의 근무나 소행을 감시하는 감찰상궁(監察尙宮)도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아무 직함 없이 아래 나인을 다스리면서 소관 업무를 책임지는 일반 상궁도 처소마다 7∼8명씩이나 있었다.97)

<보모상궁 묘비석>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에는 궁녀들의 무덤이 집단적으로 산재한 곳이다. 봉분은 사라진 채 묘비만 뒹구는 이름 모를 보모상궁 김씨의 무덤이 조선시대 궁녀의 영욕을 잘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렇듯 각 처소별로 제조상궁·부제조상궁·감찰상궁을 두었고, 그 아래 일반 상궁·나인·생각시가 있었으며, 맨 아래에 나인에도 끼지 못하는 하녀가 예속되어 있었다. 물을 긷는 무수리,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수모, 심부름과 청소를 도맡은 파지가 그들인데, 궁녀는 품계가 있었지만, 이들은 품계도 직명도 없이 그냥 이름만 있는 하녀였다. 간혹 이들 중에는 임금님 눈에 들어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숙종의 처소에서 물 긷던 최 무수리가 승은을 입어 아들(영조)을 낳자 정1품 숙빈 지위까지 올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아들이 왕위를 잇기까지 하였으니, 사람 팔자 시간 문제였던 곳이 바로 궁중 생활이기도 하였다.

궁녀로 있다가 승은으로 갑자기 신분이 높아진 이들을 가리켜 승은상궁이라 한다. 특별상궁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들은 임금의 승은을 입었기에 승은상궁이라 부른다. 승은이란 왕의 손길이 닿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만약 용종을 임신하여 왕자를 낳으면 후궁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면 승은상궁 지위에 머무는 수가 많았다. 승은상궁 역시 후궁과 마찬가지로 왕을 모시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니, 모든 업무에서 해방이 된 채 꽃단장만 하면서 꿈을 먹으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궁녀들은 각자 맡은 전문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 아갔다. 지밀나인은 한시도 왕과 왕비의 곁을 비우지 못하였다. 신변 보호와 기거, 잠자리, 음식, 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내전 물품을 관리하고, 내시부(內侍府)·내의원(內醫院)·전선사(典膳司) 등 임금과 직결된 관청의 중요 교섭을 담당하였다. 항상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기에 후궁이 될 가능성이 어느 나인보다도 높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비교적 이른 나이에 궁으로 들어와 엄격한 궁녀 견습 훈련을 거쳐야 했다.

<소주방과 수라간>   
동궐도 중에서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서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환경전(歡慶殿) 주변 모습이다. 환경전 남쪽 행각(行閣)에 소주방(燒酒房)이 있고(아래), 환경전 뒤에 있는 함인정(含仁亭) 동쪽 행각에 수라간(水剌間)이 있다(위). 두 곳은 국왕의 일상 수라를 마련한 곳으로 보인다. 궁녀들은 대부분 각 처소에 소속되어 각자 맡은 전문 분야에 종사하였다.

침방나인은 왕과 왕비의 옷을 비롯해 궁궐에서 소요되는 각종 의복을 제조하는 일을 맡았고, 수방나인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복식이나 장식물에 수(繡) 놓는 일을 하였다. 지밀 다음으로 침방과 수방의 격이 높다 하겠다. 세수간나인은 아침저녁으로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였다. 간이 화장실인 요강 시중을 들어야 하고, 수건과 그릇 세척도 그들의 몫이었다. 왕비가 궁내에 나들이할 때는 가마를 메고 수행하는 일도 도맡아야 했다.

<궁체>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고전 소설 『낙성비룡(洛城飛龍)』으로, 한글 궁체(宮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모양을 닮은 글씨체이다.

생과방나인은 간식거리인 음료와 과자 만드는 것이 주 임무였고, 소주방 나인은 조석 식사와 잔치 음식을 관장하였다. 소주방은 내소주방과 외소주방으로 나누어지는데, 내소주방은 평상시 수라를 장만하는 곳이었고, 외소주방은 궐 안의 다례(茶禮)와 크고 작은 잔치에 쓰는 음식을 맡아 마련하였다. 따라서 큰 행사에 동원되는 음식은 모두 외소주방에서 담당하게 된다. 세답방나인은 빨래와 다림질 등 세탁에 관련된 일을 맡아 하였다.

각 방별로 소속된 궁녀 수는 대체로 10명에서 20여 명 정도였는데, 열 살 전후의 어린 생각시부터 70대 이후의 노인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이 분포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층이 혼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 방별로 업무 교육이 가능하였다. 열 살 전후에 입궁한 어린 궁녀는 한평생을 궁에서 보낸 노련한 선배에게 궁중 문화의 진수를 직접 전수받을 수 있었다.98) 그러니 음식이나 바느질 등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시대의 최고봉을 자처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궁녀였다.

궁녀의 하루 생활은 매우 빠듯하였다. 온종일 바쁜 업무에 매달리다 보 면,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자기 방의 청소나 개인 심부름을 시키는 방자(房子), 음식을 장만하는 종인 취반비(炊飯婢) 등을 두었다. 여기에서 방자란 남자 종이 아니라 여자 종을 말한다. 이들 종은 비교적 자유롭게 궁궐을 드나들었다.

궁녀는 이렇듯 빠듯한 궁중 생활 속에서도 짬짬이 교양도 익혀야 했다. 단정하고도 품위가 물씬 풍기는 한글 필체인 궁체(宮體)를 보노라면 머리를 곱게 빗은 단정한 궁녀가 먼저 떠오른다. 왕비와 왕대비를 위해 대필(代筆)할 일도 많았지만, 자신의 삶과 한을 차원 높은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궁녀도 의외로 많다.

태조 때 이미 궁녀의 품계와 녹봉(祿俸) 문제가 거론되었듯이,99) 이들은 어엿한 여성 관리였다. 그 구체적인 액수가 잘 나타나지 않지만, 쌀과 콩 같은 곡식과 옷감 등을 따로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때에는 월급으로 쌀·콩·북어 등 세 종류를 받았으며, 그 외 옷값과 밥값 등 일종의 복리 후생비까지 받았고 한다.100) 궁녀가 개인적으로 부리는 방자와 취반비에게 지급하는 비용도 국가에서 부담하였다.

무너져 가는 조선의 마지막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기도 하였는데, 순종 연간에 발급한 월급 명세서를 기준으로 환산해 보면, 지금 화폐 가치로 약 150만 원 정도였다. 궁녀가 죽음을 맞이하면 상례에 필요한 곡식이나 관곽(棺槨) 등의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고, 공로가 있을 때에는 특별한 혜택도 주었다.

[필자] 박홍갑
97)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제1장 궁녀.
98)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99)『태조실록』 권11, 태조 6년 3월 무진(15일).
100)신명호, 『궁녀』, 시공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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