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2. 궁중 의례궁중 의례에서 나타나는 왕실의 권위

왕실 태의 봉안과 태봉

조선시대 왕실의 태(胎)를 신성시한 것은 무엇보다 태가 인생의 첫 출발임을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종대에 정앙(鄭秧)은 당나라 때 일행(一行)이 저술한 『육안태(六安胎)』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사람이 나는 시초에는 태로 인하여 자라게 되는 것이며, 더욱이 그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에 관계가 있다. 이런 까닭으로, 남자는 15세에 태를 간수하게 되나니, 이는 학문에 뜻을 두고 혼가(婚嫁)할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 다만 태를 간수함에는 묻는 데 도수(度數)를 지나치지 않아야만 좋은 상서(祥瑞)를 얻게 된다. 그 좋은 땅이란 것은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하여야만 길지(吉地)가 된다.131)

안태(安胎)란 태를 매장함을 뜻한다. 깨끗이 씻어서 백자 항아리에 담 아 놓고 길방(吉方)에 안치해 두었던 태를 태봉(胎峰)을 선정하여 묻는 의식을 말한다. 태를 묻을 때는 먼저 석실(石室)을 만든 다음, 태를 넣은 작은 항아리를 담은 큰 항아리를 석실에 묻었다. 항아리 옆에는 태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밝혀 주는 태지석(胎誌石)을 놓았다. 태를 봉안한 후에는 이곳을 정기적으로 지키는 군사를 배치하였다. 왕세자의 경우는 4명, 왕이나 왕비의 경우 8명의 수호 군사를 두는 것이 관례였다.

<세종의 태지석>   
1601년(선조 34) 경남 사천 곤명에 있던 세종의 태실을 수리할 때 다시 만들어 묻은 태지석이다. 태지석은 태의 주인, 태어난 때, 태를 묻은 때를 새겨 태 항아리를 묻을 때 함께 묻는 돌판이다.

안태하는 때는 생후 5개월째 되는 날이다.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풍수설(風水說)에 따라 태봉이 선정되면 궁궐에서는 태를 봉출(奉出)하는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安胎使)를 위원장으로 하는 행렬이 태봉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안태할 때 올리는 제물은 종묘 제사 때에 준하였으며, 안태 행렬이 도착하면 지방관들이 이를 맞이하여 장태(藏胎)가 끝날 때까지 행사를 지원하였다.

태봉이란 계란형의 지표 높이 50∼100m 정도 되는 야산을 골라 정상에 태를 매장하고 아래에 재실(齋室)을 지은 공간이다. 전국 각지의 ‘태봉리’라 부르는 지명은 대개 태를 봉안해 두었던 곳이다. 태봉은 산 위에 석물(石物)로 안치하는데 석물은 원형(圓形)이고 아래로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리고 위에는 태함(胎函)을 석물로 덮어 안치하였다.132) 『조선 왕조 실록』에는 태봉에 화재가 났다 하여 군수로 좌천한 기록과 태봉 수호를 소홀히 한 이유로 지방관이 처벌을 받은 기록이 있고, 『해동지도(海東地圖)』나 1872년(고종 9) 군현 지도 같은 조선시대 지도에는 대부분 태봉이 그려져 있어 조선 왕실이 태봉을 매우 신성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종 태실>   
1546년(명종 1) 충남 서산 운산에 축조한 명종의 태실이다. 나지막한 구릉 정상부에 있는데, 모양은 조선시대의 부도(浮屠)와 비슷하며, 전체 높이는 273㎝, 태실은 90㎝이다.
<헌종태봉도(憲宗胎封圖)>   
1847년(헌종 13) 충남 예산 덕산에 있던 헌종의 태실 석물을 단장한 뒤 주변 산세와 함께 그려 왕실에 보관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다.
[필자] 신병주
131)『세종실록』 권74, 세종 18년 8월 8일(신미).
132)김용숙,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261∼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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