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4장 왕실의 권위와 상징물3. 궁중 복식

국왕의 복식과 권위

[필자] 신병주

왕실의 복식은 국가의 주요 의식 때 더욱 화려하게 갖추어졌고, 행사마다 갖추는 복식이 서로 달랐다. 또한 복식에 맞추어 서로 다른 관(冠)을 착용하였다. 왕실의 주요 의식이나 일반 정무를 볼 때 착용하던 복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면복(冕服)은 국왕이 조회를 보거나 종묘나 사직 등에 제사를 지낼 때 입었던 옷이다. 『태조실록』에는 조선이 건국 직후 태조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면서 면복을 입었다는 기록으로 보아,136) 고려의 유제(遺制)를 이은 것이긴 하지만 면복은 조선의 시작과 함께 왕실의 대례복(大禮服)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태종실록』에는 1403년(태종 3) 10월 황엄(黃儼)이 명나라에 가서 면복과 왕비복을 가져온 기록이 상세하여 중국 황제로부터 따로 왕복과 왕비복을 하사받았음을 알 수 있다.137) 명나라 황제는 면복에 열두 가지 수를 놓은 십이장복(十二章服)이었지만, 조선에서는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다. 황제와 제후의 관계를 복식에서도 적용한 것이다. 명나라와 사대 외교를 수립한 조선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예법을 지키는 것이 국제 질서에 합당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구장복>   
구장(九章)을 수놓은 국왕의 대례복이다. 왕위에 오를 때, 종묘 제례, 정초의 하례식, 비(妃)를 맞을 때 등의 의식에 입었다.

왕실의 혼례 의식 때도 육례(六禮) 중에서 납채(納采,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敎命文)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의식), 고기(告期,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 친영(親迎, 국왕이 별궁(別宮)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는 왕비를 친히 궁궐로 모셔 오는 의식), 동뇌(同牢, 국왕이 왕비를 궁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잔을 주고받는 의식) 때 면복을 입었다.138)

면복은 중국 전설상 삼황(三皇) 중의 한 사 람인 황제(黃帝)가 만들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의복, 배와 수레, 활과 화살을 처음 만든 문명의 시조로 추앙받아 온 황제가 만든 의복인 면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신성함과 권위를 한껏 상징하는 것이다. 면복은 고려시대 공민왕이 원나라에 대한 자주 운동을 전개하면서 몽고식 복장을 혁파하고 명나라 관제(官制)를 따르면서 명나라로부터 사여(賜與) 받은 이래로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착용되었다고 한다.

<십이장복 착용한 순종>   
십이류면(十二旒冕)을 쓰고 십이장복을 착용한 순종 황제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국왕은 구장복을 입었으나 고종이 황제에 등극한 뒤부터 십이장복을 착용하였다.

면복은 대개 면류관(冕旒冠), 곤복(袞服),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 혁대(革帶), 패옥(佩玉), 대대(大帶), 수(綏), 말석(襪舃), 규(圭) 등으로 구성되었다. 수는 예복을 입을 때 허리 뒤에 달아 늘이기 위해 색실로 짜서 대대에 매단 것이며, 말은 붉은색 버선, 석은 붉은색 신발을 의미하며, 규는 면복을 입고 손에 들던 물건으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지게 만든 긴 관으로 왕은 청색 옥을 사용하였다. 면복은 단독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면복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부속물이 함께하였다.

면류관은 면복을 입을 때 쓰는 관으로 면판(冕板)의 겉은 검정색, 안은 붉은색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이 뒷면보다 약간 숙여지는 형태이다. 면판의 앞뒤에는 구슬이 달려 있는데 중국의 천자가 12류(旒)를 단 데 비하여 조선의 국왕은 9류로 하고, 앞뒤 모두 18개의 구슬을 달았다. 매 유마다 9개의 옥이 있었으며, 옥의 빛깔은 붉은색·흰색·푸른색·금색·검은색의 오채색(五彩色)이었다.

곤복 역시 중국의 천자가 십이장복인데 비하여 조선에서는 구장복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십이장복을 착용하였는데, 대한제국의 선포는 왕실의 복식에도 변화를 가 져왔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어진>   
조복(朝服)으로 원유관 대신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강사포를 입은 고종 황제의 모습이다.

곤복과 함께 혼인 예복으로 입은 것으로는 강사포(絳紗袍)가 있다. 국왕은 납징(納徵), 책비(冊妃)의 의식 때 강사포를 입었는데, 강사포는 흔히 조복(朝服)이라고도 불렸다. 강사포를 착용할 때에는 원유관(遠遊冠)을 쓰므로 원유관포 또는 원유관복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복제(服制)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공민왕 때 명나라로부터 조복으로 사여 받은 이래로 정착되었다. 원유관은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며, 18개의 오색 구슬이 앞뒤 각 9개씩 달려 있었다. 금비녀를 꽂았으며, 황색·푸른색·백색·붉은색·검은색의 오색 구슬을 앞뒤 각 9개씩 18개 장식하였다. 강사포의 구성은 포(袍), 상(裳), 중단, 폐슬, 대대, 패옥, 수, 말, 석 등으로 이루어져 면복의 경우와 같았다. 다만 포와 상은 붉은색 비단으로 하였고 문양이 없는 점이 면복과 다르다.

왕이 평상시에 착용한 복장은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였다. 만원권 지폐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세종대왕이 착용한 관모가 바로 익선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영조의 초상 또한 익선관을 착용한 모습이다. 왕의 평상복에서는 권위만을 강조하는 모습이 아니라 소박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국왕이 착용한 복식의 구체적인 내용은 의궤(儀軌)의 기록에서 자주 발견된다. 영조가 66세 되던 해에 15세 신부 정순 왕후를 맞이한 혼례식의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에는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 주는 복식이 대부분 등장한다. 왕실 혼례식 중 국왕 의 혼례식은 흔치 않았고 영조는 오랜 기간 집권한 왕이었던 만큼 이 의궤에는 궁중 의례의 엄숙함과 함께 궁중 복식의 내역도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 나타난 왕의 주요 복식은 ‘대전법복(大殿法服)’과 ‘의대(衣襨)’로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영조 어진>   
평상복 차림의 영조 모습이다. 높이 솟은 익선관을 쓰고 깃의 파임이 많고 보가 크게 달린 곤룡포를 입고 있다.

1) 대전 법복

면복 1건, 평천관(平天冠) 1건, 적말(赤襪) 1건, 적석(赤舃) 1부

강사포 1건, 원유관 1부, 적말 1건, 적석 1부

2) 의대

유철릭(襦天益)139) 1감 : 초록토주(草綠吐紬) 1필, 안감 반홍정주(磻紅鼎紬) 1필

유과두(襦裹肚) 1감 : 백토주(白吐紬) 1필, 안감 백정주(白鼎紬) 1필

곁주름(腋注音) 1감 : 백토주 1필, 안감 백정주 1필

장삼아(長衫兒) 1감 : 백정주 1필

단삼아(短衫兒) 1감 : 백정주 1필

핫바지(襦把持) 1감 : 백토주 1필

홑바지(短把持) 1감 : 백정주 1필

말총두건(馬尾頭冕) 1부

말총망건(馬尾網巾) 1부

흑궤자피화(黑麂子皮靴) 1부 : 백양모정(白羊毛精, 백양 털로 만든 신발 창)을 갖춤

흑사피화(黑斜皮靴) 1부 : 백양모정을 갖춤

흑웅피삽폐(黑熊皮靸鞋) 1부

의궤의 기록에 따르면 왕의 예복은 면류관, 강사포, 원유관을 비롯하여 버선, 신발 등을 기본으로 갖추었다.

[필자] 신병주
136)『태조실록』, 태조 4년 10월 5일(을미).
137)『태종실록』, 태종 3년 10월 27일(신미).
138)『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에는 대전 법복(大殿法服) 항목에 국왕이 착용할 복장으로 면복(冕服), 평천관(平天冠), 적말(赤襪), 적석(赤潟), 강사포(絳紗袍), 원유관(遠遊冠)을 기록하고 있다.
139)솜을 두어 만든 철릭. ‘유’는 속에 입는 짧은 옷을 의미한다. 상의와 아래의 치마를 따로 재단하여 치마를 주름잡아 상의에 연결시켰다. 인조대 이후 공복(公服)으로 사용하였으며, 당상관(堂上官)은 남색, 당하관(堂下官)은 홍색이다. 천익(天益)은 왕이 입었을 때의 호칭이며, 신하들의 것은 첩리(帖裏·貼裏)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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