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와 성혼의 이기심성 논변
율곡 이이는 사림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정치 활동의 신조로 삼았고,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림의 추종을 바탕으로 사림 정치의 이념을 확립하고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건의하여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복잡한 정치적 요인으로 인하여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이 많았다. 그는 또 사림 일반의 목표였던 개인의 수양과 향촌의 교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가훈(家訓)’,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約)’을 지어 향촌 교화를 강조하였고, 『격몽요결(格蒙要訣)』, ‘학규(學規)’, ‘약속(約束)’,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을 지어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도 조광조와 마찬가지로 군주의 도덕성 확립이 지치의 핵심 과제가 되는 것으로 믿어 임금의 학문을 위한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을 지어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율곡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고 도교에도 상당한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나 후에는 성리학에 몰두하여 공맹과 정주의 정통 학문을 자기 학문의 토대로 삼았다. 그도 역시 정자와 주자의 설을 자신의 철학 체계에 기초로 삼기는 하였으나, 정주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창적인 사유와 소신으로 절충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학문은 명나라의 정암(整蓭) 나흠순(羅欽順, 1465∼1547)과 화담 서경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율곡은 『성학집요』에서 주자와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였다. 그도 우주 만물이 이와 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그들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 및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주역』에서 “태극(太極)이 양의(兩儀, 음양)를 낳았다.”고 하였으나, 그는 이 말이 태극보다 음양이 후에 생긴 것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음양은 태극과 함께 있는 것이며, 생겨난 시초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선기후설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가 무위(無爲) 무작용(無作用)의 단순한 조리(條理)로서 만물에 대하여 절대 공평하고 증감이 없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정(情) 즉 심의 활용에 선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의 성질에 의하여 선정(善情)과 악정(惡情)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덕 수양을 위해서는 기질을 변화시켜 잡박(雜駁)한 기질을 청수(淸秀)한 기질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곡은 인간의 감정은 도덕적인 것과 비도덕적인 것의 구분 없이 모두 다 기의 발동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기의 발동이 이의 원리에 그대로 합치하는 것을 사단이라고 하고, 그 합치 여부와 관계없이 발동하는 것을 칠정으로 인식하였다. 이를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퇴계의 설을 지지하던 성혼과 다년간에 걸쳐 이기심성 논변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변에서 고봉의 논리가 직절하고 명쾌한 것으로 지지하였다. 퇴계는 이를 중시하여 성선(性善)을 강조하려는 윤리적 입장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고봉은 기를 위주로 하여 자연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해명하려는 이론적 입장을 견지한 것이었다.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라는 퇴계의 호발설은 무작위의 가능성 원리인 이에 기와 동등한 주체적 작위 능력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성리학의 일반적인 이기 개념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것이 고봉이 반론을 편 이유였으며, 율곡이 고봉의 설에 찬동한 까닭이었다. 퇴계의 호발설은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있어 그것이 자발적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도덕적 이상주의의 표명이기는 하였으나 우주 자연과 인간의 심성을 보편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논리적 취약점을 가진 것이었다.72)
율곡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은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 없이 모두 기의 발동에 의해 형상화된다. 다만 그 감정 발현의 근저에 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운행을 설명하는 동일한 이론으로 인간의 심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논리였다. 율곡의 이기설은 퇴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논리 체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천지자연과 인간 심성을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하는 성리학에서는 인간 내면의 이기 관계도 자연에서의 이기 작용과 마찬가지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곡의 심성론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도덕 실천의 원리를 제시하는 데는 미흡하였다. 선에 대한 원리인 이가 실제로 바람직한 모습으로 형상화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작용 능력을 구비한 기의 향배에 달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곡의 이기심성론에서 취약점으로 생각되는 것은 기질의 환경이 나쁜 경우 자발적인 도덕의 실천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계 성혼은 벼슬을 단념하고 자기 수행의 학문을 닦은 학자였다. 그는 율곡과 교분이 두터워 학문적 토론을 많이 하였고, 고매한 재야 학자로 명성이 높아 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이르렀고, 율곡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퇴계의 호발설이 불가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여 율곡과 논변을 벌였으나, 후에는 율곡의 설에 찬동하여 기 호학파의 중심적인 학자가 되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72) | 김현, 앞의 책, 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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