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여러 학자의 성리학
16세기 후반에는 퇴계와 율곡 이외에도 많은 성리학자가 배출되었다. 퇴계와 율곡 당시까지는 아직도 교조적인 학파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학자가 저마다 개성 있는 학설을 제기하였다. 그 중에서 몇몇 중요한 학자와 그들의 학문을 개괄해 본다.
일재(一齋) 이항은 호남의 재야 유학자였다. 그는 화담 서경덕에게 배우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은 화담의 주기론과 흡사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기가 혼연한 하나의 것(一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기는 하나의 몸체(一身) 안에 있으므로 별개의 것(二物)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기가 비록 별개의 것과 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혼연히 하나의 형체를 이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의 근원성과 실재성을 부정하고, 이를 다만 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하나의 조리(條理)라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기론적 세계관은 퇴계와 하서(河西) 김인후 등에게 비판을 받았다.
남명(南冥) 조식은 서울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경상도에서 일생을 은거하였다. 그는 한때 유교 경전과 노장학(老莊學)에 심취하였으나, 후에는 『성리대전』에 몰두하였다. 그는 주돈이의 ‘태극도 설’, ‘성론(誠論)’, 장재의 ‘서명(西銘)’ 등에 심취하여 자신의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다. 남명의 학문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을 강조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의 학문과 인격에는 호탕하고 준엄한 기상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는 절의의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오건(吳健), 최영경(崔永慶),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 등이 그의 제자였다. 남명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를 주로 하였다. 내적 수양에는 공경을, 외적 행동에는 의리를 강조하였고, 기초부터 다져 올라가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을 중시하였다. 학문의 요체는 인사(人事)를 바탕으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때문에 실천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남명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역설하였기 때문에, 윤리적 실천을 소홀히 하고 천리를 입으로만 논하는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비판하였다. 형이상학적인 성명(性命)의 오묘함만을 탐구하려 한다면 그 결실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추만(秋巒) 정지운도 일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한 학자였다. 그는 주자의 설을 기초로 하고 권근의 『입학도설』을 참고하여 자신의 천명도를 작성하여 스승인 김안국, 김정국(金正國, 1485∼1541) 등에게 질의하기도 하였으나, 퇴계와의 강론을 통하여 그것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의 천명도는 권근의 『입학도설』 중에서 천인심성합일지도와 대체로 부합하는데, 도 전체를 천지인(天地人)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 로 나누어 붙였는데, 이는 퇴계 호발설의 기초가 된 것이다.
하서 김인후는 인종의 총애를 받은 학자로, 인종이 서거한 후에는 은퇴하여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한때 퇴계와 친교를 맺고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정지운의 ‘천명도해(天命圖解)’ 안에는 김인후의 천명도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정지운의 것과 비슷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정주의 성리설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퇴계와 같이 서경덕과 이항의 주기설을 비판하였다. 그는 인성(人性)을 중(中)으로 파악하였으므로 천명도에서 선악을 화(和)와 과불급(過不及)으로 나타내었다. 선과 악은 기미(幾)에서 나누어지는데 천명으로부터 곧게 내려와 중(中)으로 이어지고, 또 다시 곧게 내려와 화를 이룬 것이 선이 되고, 기에서 나뉠 때 과도하거나 미흡(不及)한 것은 악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학문 체계는 『중용』의 중화(中和)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는 서울에 살았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하여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김근공(金謹恭), 서기(徐起), 박응복(朴應福), 박응남(朴應南), 윤두수(尹斗壽) 등이 그의 문인이었다. 그도 권근의 도설에 근거하여, 심성정도(心性情圖)를 지었는데 퇴계가 극찬하였다고 한다. 그 도상은 전하지 않으나 박세채(朴世采)의 발문에 의하면 세 종의 도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제1도에는 성(誠)과 성(性)의 관계를 그렸고, 제2도에는 성성(性誠)과 정(情)의 사단 및 기(氣)와 칠정을 표현하였으며, 제3도에는 인 도(人道)의 지(智)와 우(愚)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호남의 유학자로서 『육서부주(六書附註)』, 『강목고이(綱目考異)』, 『역대요록(歷代要錄)』, 『속몽구(續蒙求)』, 『주자대전어류전석(朱子大全語類箋釋)』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율곡과 함께 『경서구결급언해(經書口訣及諺解)』를 찬술하였다. 그의 『미암일기초(眉庵日記抄)』는 당시의 정치 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는 박학다식하였고, 경학을 중시하고 주자학을 숭상하였으며 양명학을 배척하였다.
소재(蘇齋) 노수신은 을사사화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문장과 학문이 탁월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진무경(陳茂卿)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는데, 이 문제로 퇴계와 논변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이견을 내세운 이항과도 논변하였고, 그 결과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지었는데, 기대승의 사단칠정론과 비슷하였다. 그의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에서는 사단칠정을 선악을 겸한 것으로 해석하여 인심의 난에 배열하였다.
구봉(龜峰)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은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두루 박식하였다. 그는 율곡, 우계와 왕복 논변하여 ‘태극문(太極問)’ 등을 지었고, 『예문답(禮問答)』, 『가례주설(家禮註說)』 등을 저술하여 17세기 김장생(金長生, 1548∼1631) 등의 예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