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조선 성리학의 정치 이념과 갈등3. 성리학적 사회 사상의 확산

『삼강행실도』의 편찬

고려시대에도 1346년(충목왕 2)에 권보(權溥) 일가가 『효행록(孝行錄)』을 만든 것을 보면 유교 윤리의 보급이 일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효라고 하는 가족 윤리에 한정되어 있었고,104) 여러 가지 제한을 받아 사회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 초기 위정자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세 가지 중요한 윤리 틀인 삼강(三綱), 곧 군신(君 臣)·부자(父子)·부부(夫婦) 관계를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사회 운영의 전범(典範)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군왕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비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벼리가 된다는 삼강은 국가와 가족을 성리학적 이념 아래 명확하게 위치 지워 주었다. 이러한 삼강의 윤리를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목적은 국가와 가족에 일관하는 유교 통치 윤리를 체계화하여 유교 윤리에 따라 정치를 펼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다.105)

<『삼강행실도』 서문>   
1434년(세종 16)에 직제학 설순 등이 세종의 명에 의해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효자·열녀의 행실을 각각 110명씩 모아 만든 책이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국가와 가족에 일관하는 유교 통치 윤리를 체계화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행실도』를 편찬한 직접적 계기는 1428년(세종 10) 진주에 사는 김화(金禾)라는 인물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하여 강상죄(綱常罪)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을 때 세종은 단죄에 앞서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항상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설순(偰循)에게 『효행록』을 개간(改刊)하게 하였다.106)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을 뿐이고 성리학 윤리서 편찬 계획은 이미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리학을 국시로 내건 조선으로서는 그에 부합하는 사회 윤리의 정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세종은 윤리서 편찬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세종은 1431년(세종 13) 여름 부제학 설순에게 『삼강행실도』의 편찬을 다시 지시하였다. 이에 설순 등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서적에서 삼강에 모범이 될 만한 충신(忠臣), 효자(孝子), 열녀(烈女)의 행실을 모아서 대략 1년여의 수정과 증보 과정을 거쳐 1432년에 완성하였다.107) 이후 서문(序文)과 전문(箋文)을 붙이고 발문(跋文)을 실어 1434년(세종 16) 4월에 인쇄·반포하고 윤회(尹淮)가 지은 교서(敎書)를 발표하였다.108)

<『삼강행실도언해』>   
1434년에 편찬한 한문본 『삼강행실도』를 한글 창제 이후 1481년(성종 12)에 한글로 번역한 책이다. 충신·효자·열녀의 인원을 각각 35명으로 줄이고 책의 윗면에 한글 번역을 넣었다.

『삼강행실도』의 효자도(孝子圖)에는 역대 110명의 효자를, 충신도(忠臣圖)에는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烈女圖)에는 94명의 열녀를 소개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실었다. 체재는 효자, 충신, 열녀의 행실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 사례를 글로 설명한 다음 시(詩)와 찬(讚)을 붙였다. 이후 성종대에는 한글로 된 삼강행실 산정 언해본(刪定諺解本)이 나와 윤리서 보급에 힘썼으나 연산군대에는 다소 주춤하는 양상을 보였다. 중종대에는 다시 『삼강행실도』의 보급이 강조되었고, 기존 책을 보완한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광해군대에는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가 편찬되었다.109)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효자, 충신, 열녀의 사례를 반영하였으므로 자연히 분량도 매우 방대해졌다. 또 『삼강행실도』, 『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사례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사례를 모두 모았다는 점에서 당시 찬자(撰者)의 표현대로 ‘성대(盛代)의 전서(全書)’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물 수록의 기준이 모호하였고 정치권력의 개입이 문제가 되어 이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해 널리 보급되지는 못하였다.110) 당시 정권을 담당하던 북인 측의 인물들이 다수 채 록되었다는 점이 훗날 문제로 지적된 것이다. 그러나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소재와 내용이 우리나라 사람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617년(광해군 9) 왕명에 따라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생긴 효자, 충신, 열녀의 사례를 반영하여 만든 책이다. 18권 1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행실도』가 보급되던 시기는 사회 윤리에서 불교적 요소를 제거하면서 성리학의 윤리 질서를 공고히 하거나, 전쟁 이후 윤리관을 새롭게 제시할 필요가 있을 때였다. 이는 효자도와 열녀도를 통해 가부장적 윤리를 확립하여 가족 내의 질서를 확고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군신의 윤리와 명분론적 사회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한 까닭이었다.

[필자] 조성산
104)김훈식,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보급의 사회사적 고찰」, 『진단학보』 85, 진단학회, 1998, 248쪽.
105)김항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편찬의 추이」, 『진단학보』 85, 진단학회, 1998, 233∼234쪽.
106)『세종실록』 권42, 세종 10년 10월 3일 신사.
107)『세종실록』 권56, 세종 14년 6월 9일(병신).
108)『세종실록』 권64, 세종 16년 4월 27일(갑술).
109)『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대해서는 김혁,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의 구성과 편찬 과정」, 『서지학보』 2, 한국 서지학회, 2001을 참조할 수 있다.
110)김항수, 앞의 글, 1998,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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