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3. 벼농사의 발전과 확산

벼농사와 밭·논

벼농사는 보통 논에서 이루어지지만 밭에서도 벼를 재배하였다. 처음에는 밭에서 벼를 재배하다가 나중에 논에서 재배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주로 벼농사가 화북 지방을 통해 한반도 북쪽으로 전래되었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실제로 기원 전후의 습지(濕地) 유적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볍씨·검게 된 쌀 등과 벼 껍질 더미가 확인되었다. 토양을 분석한 결과 다량의 벼 식물 규산체가 검출되었는데, 출토된 벼 중에는 논벼와 밭벼가 모두 들어 있었다. 밭에서 벼를 재배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벼농사는 논농사로 짓는 방법 자체로 수용되었다고 하여 견해를 달리하는 주장도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561년에 지금의 경남 창녕에 건립한 비이다. 화강암의 자연석 앞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기고, 비면의 둘레에는 윤곽을 선으로 새겼다. 진흥왕과 여러 신하가 새로 개척한 창녕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문에 ‘백전답(白田畓)’이라는 말이 있어 당시 신라에서는 토지를 ‘백전’과 ‘답’으로 구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밭벼에서 논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경우에 눈길을 끄는 기록이 561년(진흥왕 22)에 세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이다. 이 비에는 “해주백전답(海州白田畓)”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당시 신라에서 토지가 백전(白田)과 답(畓)으로 구분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논을 뜻하는 ‘답(畓)’이라는 한자는 ‘수(水)’ 자와 ‘전(田)’ 자를 합해서 한 글자로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글자이다. 수전(水田)은 한자 그대로 ‘물이 있는 밭’이라는 뜻이고, 백전(白田)은 ‘물이 없는 밭’이라는 뜻이다. ‘백(白)’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의미이다. 전(田) 또는 백전(白田)에서 답(畓), 즉 수전(水田)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만들어졌으니, 밭에서 벼를 재배하는 방식에서 답, 즉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방식으로 변화해 간 것을 보여 주는 증거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벼를 재배하는 더 일반적인 방식이 논이었음은 분명하다. ‘답(畓)’이라는 한자가 등장하는 가장 이른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가야의 수로왕이 즉위 2년(기원 43) “수레를 타고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畓坪)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16)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기원 1세기부터 ‘답(畓)’이라는 한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연대에 의심을 가질 수도 있어 그대로 따르기에는 조심스런 측면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전(田)’ 자는 밭을, ‘수전(水田)’, 즉 ‘답(畓)’ 자는 논을 가리키는 반면, 일본에서는 ‘전(田)’은 논을 뜻하고 밭은 ‘백전(白田)’을 합한 ‘전(畠)’이나 ‘화전(火田)’을 합한 ‘전(畑)’이라는 한자로 표시하였다. 농경지를 뜻하는 ‘전(田)’이 우리나라에서는 밭으로, 일본에서는 논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다. 이것은 농경이 우리나라에서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일본에서는 논농사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상황을 반영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농사의 대표성을 우리나라에서는 밭농사가 차지하고, 일본에서는 논농사가 차지하였기 때문에, 농경지의 대표성을 띠는 ‘전(田)’ 자가 각각 우리나라에서는 밭으로, 일본에서는 논으로 달리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한자 ‘답(畓)’의 등장과는 별도로 일찍부터 논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청동기시대 논의 형태는 크게 계단식으로 만든 논과, 일정한 형태가 없이 작은 구획으로 만든 논의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이것은 농경의 형태 차이에 따른 결과였다. 작은 구획으로 나누어 만든 논은 네모난 방형(方形)으로, 물길 등의 관개 시설이 함께 확인된다. 반면, 계단식 논은 우리나라에서만 확인되는 한반도 고유의 독자적인 논의 형태이다.

일본 야요이(彌生)시대 초기에 논이 위치한 형태를 보면, 습지형(濕地型)과 반건전형(半乾田型)의 두 가지가 있다. 습지형은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낮은 구릉과 습지가 만나는 계곡 입구 부분을 논으로 활용하는 형태이다. 이때 주거지는 구릉 꼭대기 부분에 만들고, 물이 흐르는 수로는 계곡의 가 운데 부분에 설치하여 구릉과 수로 사이의 양 측면을 논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반건전형은 평야의 중앙 부분에 생긴 낮은 대지 위의 중앙에 집락과 묘역(墓域)을 설치하고, 동쪽과 서쪽의 낮은 평지와 대지 사이의 충적지에 논을 만드는 형태이다. 이때 논의 평면보다 높은 대지 측에 접해서 U자형의 수로를 파고 보(洑)를 만들어 급수와 배수가 자유자재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논을 만든다.

<청동기시대 논 유적>   
충남 논산시 연무읍 마전리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논이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무덤, 우물, 논과 삼국시대의 주거지, 저장 시설이 조사되었다. 생활 영역과 무덤 구역이 각기 다른 구릉에 형성되어 있으며, 구릉과 저지대의 경계에 두 기의 우물과 논이 자리하고 있다. 저지대에서는 구릉에서 흘러내린 물을 막기 위한 보 시설과 물웅덩이, 수로 시설, 논이 조사되었다.

우리나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논은 구릉 사면(丘陵斜面)의 말단(末端)을 개간한 골짜기와 중소 규모의 하천이 범람하여 형성된 곳에 자리한다. 충남 보령 관창리 유적은 구릉의 골짜기 중앙을 관통하는 자연적인 도랑을 정비하고 물길 양편에 경작지를 조성하였는데, 논이 발견된 논산 마전리, 울산 옥현 유적도 구릉 아래부터 골짜기 입구까지 대부분의 지역을 논으로 개간하였다.

철제·목제 농기구를 이용한 초기의 수전(水田) 농업은 처음에는 하천의 델타(delta: 삼각주) 지역, 소택지(沼澤地) 등에서 간단한 수리 시설 없이 행하였던 듯한데, 점차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 적은 인력으로 물을 통제, 이용할 수 있는 산 계곡의 계곡물 주변으로 경작지가 늘어나게 된다.

<개선사지 석등>   
전남 담양군 남면 개선사지(開仙寺址)에 남아 있는 석등이다. 팔각으로 된 기둥 부분에 10행에 걸쳐 글이 새겨져 있다. 경문왕과 문의 왕후, 그리고 공주(뒷날의 진성여왕)의 발원으로 승려 영판이 석등을 조성하여 868년(경문왕 8) 첫 불을 밝히고, 891년(진성여왕 5) 승려 입운이 논을 산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에는 습지형이나 반건전형을 만들 수 있는 지형이 논으로 선택되고, 소택지를 비롯한 평지는 고대 사회가 정비되면서 중앙 정부나 지방의 정치 집단이 개간하였던 듯하다. 백제에서는 33년(다루왕 6)에 “남쪽의 주·군(州郡)에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稻田)을 만들게 하였다.”고17) 하고, 242년(고이왕 9)에 “남쪽의 진펄(南澤)에 논(稻田)을 개간하게 하였다.”는18) 기록은 청동기시대 이래 습지형이나 반건전형 논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쌀의 공급이 한계에 이르자 중앙 정부가 직접 관여하여 평지의 논을 개간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신라에서도 4∼5세기에 철제 농기구의 발달을 기반으로 지방 세력이 성장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었고, 6세기에 중앙 정부의 관리와 통제 아래 전국적으로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소택지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옛 개선사 터의 ‘개선사석등기(開仙寺石燈記)’는 9세기 말 경문왕과 진성왕 때의 사실을 전해 주는데, 이 석등기에는 두 가지 논의 명칭이 나온다. ‘저답(渚畓)’과 ‘오답(奧畓)’이라는 용어가 보이는데, ‘저답’은 ‘물가 가까이에 있는 논’, ‘오답’은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 안쪽 산곡에 가까운 논’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저답’과 ‘오답’을 풀어서 해석하지 않고 고유 명사로 이해한다면, 9세기 당시에 논의 유형이 이미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신라 촌락 문서>   
일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촌락에 대한 기록 문서이다. 1933년 10월 『화엄경론질(華嚴經論帙)』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다가 발견하였다. 가로 58㎝, 세로 29.6㎝ 정도의 닥나무 종이 두 매에 서원경(西原京: 충북 청주) 아래의 촌을 비롯한 네 개 촌의 위치, 크기, 연호(烟戶), 구(口), 소와 말, 토지, 나무의 숫자와 3년 동안의 변동 사항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이 끝난 뒤 사회가 안정된 뒤에는 논의 개발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일본 쇼소인(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 촌락 문서(新羅村落文書)에도 여러 가지 명목의 논이 보이고 있다. 문서가 작성된 연도에 대해서는 695년(효소왕 4), 755년(경덕왕 14), 815년(헌덕왕 7) 등 여러 견해가 있는데, 적어도 7세기 말 이후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표 ‘신라 촌락 문서의 토지 종목과 면적’을 보면, 신라 촌락 문서에 등재된 토지 가운데 논은 266결 53부 3속, 밭은 319결 58부 9속으로 각각 45.5%와 54.5%를 차지한다. 후대와 비교해서도 논의 비중이 매우 높다. 이 문서에 보이는 촌의 성격에 대해서 내성(內省) 소속인지 아니면 일반 자연 촌락인지 등에 대해서 다른 견해가 있는데, 논이 많은 것이 촌락의 특별한 성격과 관련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신라의 촌락 가운데 이 문서의 사해점촌(沙害漸村)이나 이름을 알 수 없 는 ○○○촌처럼, 밭보다 논의 비중이 매우 많은 촌락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논이 많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벼농사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결국 쌀을 먹는 인구도 많았다는 것이다.

<표> 신라 촌락 문서의 토지 종목과 면적
토지 종목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 기타 합계
사해점촌 논(畓) 94결 2부 4속
(촌주위답 19결 70부 포함)
관모답 4결
내시령답 4결
102결 2부 4속
밭(田) 62결 10부 ○속   62결 10부 ○속
삼밭(麻田)   1결 9부 1결 9부
살하지촌 59결 98부 2속 관모답 3결 66부 7속 63결 64부 9속
119결 5부 8속   119결 5부 8속
삼밭   ? ?
○○○촌 68결 67부 관모답 3결 71결 67부
58결 7부 1속   58결 7부 1속
삼밭   1결 ○속 1결 ○속
서원경 25결 99부 관모답 3결 20부 29결 19부
○○○촌 76결 19부 관모전 1결 77결 19부
삼밭   1결 8부 1결 8부
  564결 8부 5속(?) 22결 3부 7속(?) 586결 12부 2속(?)

특히 주목되는 점은 촌주위답(村主位畓), 내시령답(內視令畓), 관모답(官謨畓)이다. 촌주위답은 촌주의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촌주 자신이 소유한 논에 설정된 지목(地目)이다. 원래는 다른 일반 백성들의 토지인 연수유전답(烟受有田畓)과 마찬가지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해야 하는 토지이지만, 아마도 세금을 면제받은 토지일 것이다. 그런데 촌주의 토지가 모두 논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 촌주의 토지가 다른 촌에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문서에 따르면, 촌주의 토지는 모두 논이다. 또 정부 관리로 생각 되는 내시령에게 지급된 내시령답도 논이고, 관청의 경비로 쓰이는 관모답도 관모전 1결을 제외하면 모두 논이다. 즉, 관리, 관청, 토착 지배층은 모두 논을 소유하거나 지급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촌주나 내시령 등의 관리, 관청의 관리 등은 쌀을 주식으로 먹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문서를 통해 당시 신라에서 논의 비중, 즉 쌀의 중요성이 컸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필자] 박찬흥
16)『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2, 가락국기(駕洛國記).
17)『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다루왕 6년.
18)『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고이왕 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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