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농사와 물
벼농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의 관리이다. 초기 벼농사에서는 하천의 삼각주 지역이나 소택지 등에서 간단한 수리 시설 없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점차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 물의 통제가 가능한 계곡 주변으로 경작지가 늘어나고 있다. 초기의 가장 일반적인 수리 시설은 작은 하천의 지류나 계곡 물을 담아서 쓰는 보(洑)의 형태였던 듯하다.
그 뒤 논의 개간이 평지나 하천가로 확대되면서 제방과 둑을 쌓아 물을 관리할 필요가 생겼고, 저수지도 만들게 되었다.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 달과 더불어 늘어났고, 벼농사가 많이 이루어졌던 백제와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제방과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관리하였다. 144년(일성이사금 11)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는19)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신라에서는 2세기 무렵에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리 시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벼농사는 늘 가뭄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402년(아신왕 11)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 마르자, 백제 왕이 친히 횡악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20) 기록으로 보아, 벼농사가 널리 이루어졌던 백제나 신라에서는 물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수리 시설은 330년(흘해이사금 21)에 만든 벽골지(碧骨池)이다. 당시 벽골지가 있던 김제는 백제 땅이었으므로 이 기사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벽골제는 790년(원성왕 6)에 전주 등 일곱 개 고을의 백성을 징발하여 보수하였다.21)
벽골지 이외에도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은 여러 개가 보이고,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뒤 비석을 세워 놓은 경우도 있다.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을 보면, 429년(눌지마립간 13)에는 시제(矢堤)를 쌓았고,22) 531년(법흥왕 18)에는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으며,23) 859년(헌안왕 3)에도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24) 또 저수지를 만든 뒤 세워 놓은 비석으로는 청제비와 오작비가 있다. 536년(법흥왕 23)에는 경북 영천에 청제(菁提)를 만들었고, 798년(원성왕 14)에는 청제를 다시 수리하였다는 것이 영천 청제비(永川 菁堤碑)에 새겨져 있다. 또 578년(진지왕 3)에는 둑을 뜻하는 ‘오(塢)’를 대구에 만들었음이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수리 시설의 축조로 당시 신라에서는 논의 비율이 증가하고 기존의 논들도 더욱 안정적으로 물을 관개할 수 있게 되자 생산물의 수확이 증가하였을 것이다. 특히 영천 청제비 정원명(798)의 비문에 보이는 ‘상배굴리(上排掘里)’는 물을 빼는 수리 시설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때까지 물을 대기 위해 둑을 허물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배수를 조절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수리 관개 시설을 만들었다는 것은 논농사가 그만큼 중요하였고 또 이 지 역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수리 관개 시설을 쌓거나 정비하여 안정적으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쌀 생산을 증대시킴은 물론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효과적으로 백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