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3. 벼농사의 발전과 확산

벼농사와 물

벼농사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의 관리이다. 초기 벼농사에서는 하천의 삼각주 지역이나 소택지 등에서 간단한 수리 시설 없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점차 제한된 지역을 벗어나 물의 통제가 가능한 계곡 주변으로 경작지가 늘어나고 있다. 초기의 가장 일반적인 수리 시설은 작은 하천의 지류나 계곡 물을 담아서 쓰는 보(洑)의 형태였던 듯하다.

<벽골제(碧骨堤) 장생거>   
벽골지는 전북 김제 부량면에 제방이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저수지이다. 장생거는 벽골제에 있는 제2 수문(水門)이다. 330년에 축조된 이후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간헐적으로 증축하였다. 1975년 두 개의 수문터 발굴 조사에 따르면 제방 높이 약 4.3m, 윗변 너비 7.5m, 밑변 너비 17.5m의 규모로, 물이 가득할 때 확보되는 총 점유 면적은 37㎢라고 한다. 사진은 1970년대에 촬영한 것이다.

그 뒤 논의 개간이 평지나 하천가로 확대되면서 제방과 둑을 쌓아 물을 관리할 필요가 생겼고, 저수지도 만들게 되었다. 수리 시설은 벼농사의 발 달과 더불어 늘어났고, 벼농사가 많이 이루어졌던 백제와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제방과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관리하였다. 144년(일성이사금 11)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는19)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신라에서는 2세기 무렵에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리 시설을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영천 청제비>   
경북 영천 도남동에 있는 신라시대 비석이다. 영천 청못의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으로, 높이는 대략 130㎝이다. ‘병진년’에 작성한 앞면의 ‘병진명’은 536년(법흥왕 23)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원 14년, 곧 798년(원성왕 14)에 작성하여 ‘정원명’이라고 부르는 뒷면은 청제를 수리한 뒤에 새겼다. 이 비석 옆에는 1688년(숙종 14)에 청제를 다시 수축하고 세운 비석이 하나 더 있다.

하지만 벼농사는 늘 가뭄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 402년(아신왕 11)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 마르자, 백제 왕이 친히 횡악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는20) 기록으로 보아, 벼농사가 널리 이루어졌던 백제나 신라에서는 물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수리 시설은 330년(흘해이사금 21)에 만든 벽골지(碧骨池)이다. 당시 벽골지가 있던 김제는 백제 땅이었으므로 이 기사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기록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벽골제는 790년(원성왕 6)에 전주 등 일곱 개 고을의 백성을 징발하여 보수하였다.21)

벽골지 이외에도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은 여러 개가 보이고,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 뒤 비석을 세워 놓은 경우도 있다.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을 보면, 429년(눌지마립간 13)에는 시제(矢堤)를 쌓았고,22) 531년(법흥왕 18)에는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으며,23) 859년(헌안왕 3)에도 제방을 수리하고 농사를 권장하였다.24) 또 저수지를 만든 뒤 세워 놓은 비석으로는 청제비와 오작비가 있다. 536년(법흥왕 23)에는 경북 영천에 청제(菁提)를 만들었고, 798년(원성왕 14)에는 청제를 다시 수리하였다는 것이 영천 청제비(永川 菁堤碑)에 새겨져 있다. 또 578년(진지왕 3)에는 둑을 뜻하는 ‘오(塢)’를 대구에 만들었음이 대구 무술명 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에 새겨져 있다.

<영천 청제 전경>   
536년(법흥왕 23) 경북 영천시에 축조한 저수지이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처음 축조할 때 7,000명의 인력을 동원하였다. 이로 보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것을 알 수 있다. 목책이나 말뚝으로 제방을 견고히 하는 기술을 사용하였고, 나무 수문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수리 시설의 축조로 당시 신라에서는 논의 비율이 증가하고 기존의 논들도 더욱 안정적으로 물을 관개할 수 있게 되자 생산물의 수확이 증가하였을 것이다. 특히 영천 청제비 정원명(798)의 비문에 보이는 ‘상배굴리(上排掘里)’는 물을 빼는 수리 시설로 추측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그때까지 물을 대기 위해 둑을 허물던 방식에서 벗어나 이제는 배수를 조절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대구 무술명 오작비>   
신라 무동리촌에 저수지를 축조하고 세운 기념비로, 높이 103㎝이다. 작성 연대는 일반적으로 578년(진지왕 3)으로 추정한다. 비문에 보이는 오(塢)는 농사에 필요한 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제방을 가리킨다. 이 비에는 오의 축조에 참여한 책임자들의 이름과 오의 규모, 동원된 인력, 작업 기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의 수리 관개 시설을 만들었다는 것은 논농사가 그만큼 중요하였고 또 이 지 역에서 널리 행해졌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수리 관개 시설을 쌓거나 정비하여 안정적으로 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쌀 생산을 증대시킴은 물론 농민 생활을 안정시켜 효과적으로 백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을 것이다.

[필자] 박찬흥
19)『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1년.
20)『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3, 아신왕 11년.
21)『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6년.
22)『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13년.
23)『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법흥왕 18년.
24)『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안왕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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