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1장 벼농사의 도입과 쌀 문화의 시작5. 쌀과 농경의례

벼농사와 농경의례

청동기시대가 되어 농업이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 따라, 초자연적인 농경신(農耕神)에게 농작물의 풍작을 기원하는 의례 행위, 즉 농경의례(農耕儀禮)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농경은 해마다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농경의례도 매년 주기적으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생산 과정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농경의례는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중기 또는 후기부터 비롯되어, 오늘날까지 계절마다 행하는 계절제(季節祭)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단군 신화나 주몽 신화를 비롯한 고대의 건국 신화에서도 농경신이나 농경의례의 관념이 신화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또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5월제·10월제 등은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한 대표적인 제천(祭天) 농경의례이다. 삼한의 경우는 벼농사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나머지 건국 신화나 각국의 제천 농경의례 가운데 벼농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이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농경의례는 농경을 하는 과정에 따라 축원(祝願) 의례, 파종(播種) 의례, 성장 의례, 수확 의례의 네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축원 의례는 다가올 올해 농사의 수확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그 성과가 어떠할지를 미리 점쳐 보려는 행위로, 음력으로 12월에서 다음해 1·2월에 걸쳐 행한다. 파종 의례는 농작물의 씨를 뿌릴 때, 성장 의례는 농작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풍작이 들기를 바라는 의례이다. 수확 의례는 말 그대로 농작물을 수확한 뒤 농경신 또는 조상에게 감사를 드리는 의례로, 늦여름에서 가을, 초겨울에 행한다. 벼농사가 확대되면서 자연히 이들 농경의례에서도 벼농사의 풍작을 바라거나, 햅쌀을 바치는 의례를 행하였다.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   
경북 고령 양전동에 있는 청동기시대 바위그림 유적이다. 바위그림은 동심원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패형 신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고, 패형 신상은 신체(身體)를 상징한다고 한다. 물가에서 의례를 행하였다는 것은 벼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의례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은 바위그림(巖刻畫)이다. 그 가운데 동심원(同心圓)과 패형 신상(牌形神像)을 기본으로 구성된 경북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이 주목된다. 이 바위그림는 고령읍의 동쪽을 흐르는 대가천과 합천에서 남쪽으로 흘러 고령읍으로 흘러드는 안림천이 만나는 지점의 물가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바위그림이다. 동심원 무늬는 태양 숭배 사상을 반영하여 농경의 풍 요를 기원하고 재생(再生)의 상징으로 만든 것이고, 패형 신상은 신체(神體)를 상징한다고 한다. 특히 벼농사에 있어서 긴요한 물이 있는 하천가에서 의례를 행하였다는 점은 벼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비슷한 바위그림는 고령 안화리, 영일 인비동·칠포리, 영주 가흥동 유적 등지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청동기시대에 바위그림을 배경으로 각종 의례가 널리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논산 마전리 유적과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새 모양의 목제품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적이 벼농사와 관계가 있는 유적임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벼농사가 잘되기를 빌기 위해서 행하였던 의례와 관련이 있는 제품인 듯하다. 솟대는 마한의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솟대 가운데 개인 가정에서 임시로 경축이나 기도할 때에 세우는 신간(神竿)이나, 촌락의 입구나 경계 그리고 성역(聖域)에 늘 세워 놓는 신간은 대개 풍년을 빌기 위해 정월에 세우는 것으로 흔히 ‘볏가릿대(禾竿)’라고 부른다. ‘볏가릿대’라는 명칭으로 보아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충남 논산 마전리 유적 출토 새 모양 목제품>   
아마도 벼농사가 잘되기를 비는 의례와 관계가 깊은 유물일 것이다.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새 모양 목제품>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새 모양 목제품>   
<지진구>   
충남 부여 서나성의 논바닥 아래에서 출토된 지진구(地鎭具) 출토 상태이다. 백제 후기의 유적으로 추측되는 서나성의 논을 만들 때 지진(地鎭) 의례에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깨뜨린 넓적한 토기 편을 뚜껑으로 토기 항아리를 덮었는데, 토기 안에는 아마도 어떤 음식물을 넣었을 것이다.
<충남 부여 서나성에서 출토된 지진구와 토기>   

한편, 농작물을 재배하는 밭 유적에서 토기나 석기 등 의례와 관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부터 삼국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산청 묵곡리 유적에서는 거의 모든 유물이 파손되어 도랑 안에 정연하게 쌓은 것처럼 채워져 있다. 또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에서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이 출토된 진주 대평리 유적의 밭에서도, 깨진 토기나 석기 등과 함께 처음부터 의례용으로 만든 듯한 작은 모조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데 무더기로 모여 있는 채 출토되었다. 생활 용구나 농구·공구 등이 깨져 있고, 사용할 수 없는 모조품이 나오고, 밭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는 무기가 깨진 채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농경이 잘되기를 바라는 의례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지진구(地鎭具)가 주목된다. 지진구란 집, 건물, 무덤, 농경지 등을 만들 때 땅을 파헤치게 되므로, 먼저 토지신(土地神)에게 고하거나, 그 땅에 세우는 건물 등과 자라는 곡식들이 오래도록 잘 유지되고 풍성하게 수확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땅속에 묻어 두는 의식 용구이다. 농경의례의 경우, 당연히 토지신 또는 대지모신(大地母神)에 대해 풍작을 기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념은 농경의 시작, 특히 벼농사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거나 확대되었을 것이다. 백제 후기 유적인 부여 서라성의 논 바닥 아래에서 깨뜨려 낸 넓적한 토기편을 뚜껑으로 덮은 토기 항아리가 둥글게 판 구덩이에 놓인 채 출토되었다. 아마도 논을 만들 때 지진 의례에 사용한 것 으로 생각된다.

청동기시대에 벼농사가 퍼지면서, 일반 주거 공간과는 별도로 만든 고상 가옥에 벼를 저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상 가옥은 일본,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문화권의 경우로 보아, 벼의 혼이 쉬는 곳 즉 신전으로서, 마을 전체를 위한 곡령 신앙(穀靈信仰)의 제사 의례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농경문 청동기>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청동기시대의 청동제 의기(儀器)이다.
<농경문 청동기 뒷면>   
밭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농경문 청동기 부분>   
오른쪽 구간에 따비와 같은 농기구로 밭을 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다리 사이에는 남근(男根)이 삼각형으로 표현돼 있어 남자임을 알 수 있다.

백제 초기 유적인 부여 논티 유적에서는 토기 항아리에 쌀과 조 등의 곡물을 많이 담아 제사를 지냈던 넓은 범위의 제사 구역이 조사되었다. 여기에서는 철로 만든 도끼 모양의 작은 모조품을 비롯한 주조(鑄造)하거나 단조(鍛造)한 철 도끼와 철 낫 등의 농기구들과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토기 안에는 발기한 남성기(男性器)의 모습이 표현된 토기 손잡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유물은 부여의 구룡 평야를 배경으로 풍요를 바라면서 대규모로 행하였던 농경 제사 의례에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남성기는 성교(性交)를 연상시키면서 풍성한 수확을 바라거나, 남성의 강인한 힘과 활력을 투영하여 시들어 가는 벼를 재생시키며, 또는 이러한 강인한 힘으로 사악한 잡귀를 제거하는 남근의 상징성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전 괴정동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農耕文靑銅器)에 도 성기가 노출된 남성이 밭을 가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벌거벗고 경작을 하는 ‘나경(裸耕)’을 통해 풍작을 기대하는 의례와 유사하다고 추측된다. 다산력(多産力)을 지닌 대지 위에 남자의 성기를 노출시킨 것은 풍성한 수확을 비는 뜻이었다. 농경민들은 초기부터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결합을 통해서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하늘의 태양, 바람, 비 등으로 상징되는 남성과, 농작물의 씨앗을 품고 키우는 대지로 상징되는 여성의 조화로운 결합이 풍작을 가져온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논티 유적에서 출토된 남성기나 나경 같은 것은 강인한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들이 여성성인 대지와 순조롭고 조화로운 결합을 함으로써 벼농사의 풍작을 바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는 벼가 개화할 무렵 농부 부부가 밤에 논에 나가서 벼의 결실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부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44)

이렇게 풍요를 목적으로 한 농경의례에서 남성을 상징하는 천신(天神), 즉 태양신과 여성을 상징하는 지신(地神), 즉 곡신(穀神)의 결합을 놀이로 재현하려는 것이 줄다리기이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 남자 편과 여자 편으로 나누어 서로 줄을 당겨 승부를 갈라서 그해에 풍년이 들것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면서, 대풍이 들기를 기원하였던 의례이다. 줄다리기의 기원은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라고 보기도 하고 중국 양쯔강 이남 지역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던 곳이다.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등에 따르면, 중국의 줄다리기는 춘추시대 오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싸움에서 유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줄다리기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만,45) 중국에서 이미 6세기에 줄다리기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이른 시기부터 벼농사의 확산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것이다.

줄다리기는 벼농사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밭농사를 짓는 한강 이 북에는 줄다리기가 거의 분포하지 않으며, 벼농사 중심지인 전라도·경상도·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줄다리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도 쌀농사를 처음 시작한 규슈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줄다리기>   
19세기 말에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풍속 화를 수록한 『기산풍속도첩(箕山風俗圖帖)』에 들어있는 줄다리기 그림이다. 볏짚으로 만든 줄을 잡아당겨 승부를 겨루는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날 논밭에서 이루어지는데, 벼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줄다리기에서는 벼농사에서만 나오는 볏짚으로 꼬아 만든 줄을 사용하고, 이 줄은 벼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비를 불러오는 용이나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벼농사 지역에서 볏짚을 쉽게 또 많이 구할 수 있는 농한기(農閑期)여야 가능하다. 줄다리기할 때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고 비녀목을 꽂는 행위는 남녀의 성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풍요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줄다리기는 남성을 상징하는 태양신과 여성을 상징하는 지모신이 한 해에 한 번 서로 만나서 결혼하는 날로 여긴다고 한다. 태양신과 지모신이 결합을 해야만 비로소 풍년이 든다는 관념이 있는 것이다.46) 농사 시작에 앞서 남녀 두 패가 성 행위를 본떠,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가 뒤로 젖히는 동작을 거듭하며 줄을 당 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47)

며칠 동안 계속되는 줄다리기는 여자 편이 이겨야만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하여 대개 여자편의 승리로 끝을 맺게 된다. 돌싸움 등의 다른 싸움놀이와 마찬가지로 줄다리기에서 여자편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인식하는 것은, 달과 물과 여성의 증식 능력에 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고구려의 오회분 5호묘에는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이 그려져 있다. 중국 지안(集安) 지역에 있는 이 무덤은 6세기 이후에 만든 것으로 추측된다. 이 농사의 신은 흰 뿔에 푸른 눈이 있는 소머리에 사람의 몸체를 가지고 있는데,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농경신인 후직(后稷)을 연상시키는데, 흩날리는 옷자락과 몸짓에서 강렬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 벽화를 통해 볼 때, 북쪽의 고구려에서도 적어도 6세기에는 벼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농사의 신을 숭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에 있는 고구려 벽화 고분인 오회분 5호묘에 그려진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이다. 흰 뿔에 푸른 눈으로 소머리에 사람의 형체를 한 농사의 신이 오른손에 벼 이삭을 들고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수확 의례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추석(秋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유리이사금(24∼57) 때이다.48) 추석날 아침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데, 햅쌀로 밥을 짓고 술을 빚으며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낸다.

이러한 수확 의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가화(嘉禾)’를 바치는 기록이다. ‘가화’란 말 그대로 ‘상서로운 벼’라는 뜻인데, 벼 자체가 ‘상서로 운 곡식(嘉穀)’이므로 벼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대개는 벼 가운데 상서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일찍이 186년(벌휴이사금 3) 7월에 남신현(南新縣)에서 상서로운 벼를 바쳤다는49) 기록이 보이며, 242년(조분이사금 13) 가을에는 고타군(古陀郡: 경북 안동)에서,50) 294년(유례이사금 11) 7월에는 다사군(多沙郡)에서,51) 452년(눌지마립간 36) 7월에는 대산군(大山郡)에서,52) 697년(효소왕 6) 7월에는 완산주(完山州)에서,53) 880년(헌강왕 6) 8월에는 웅주(熊州)에서54) ‘가화’를 바쳤다. 고구려에서는 548년(양원왕 4) 9월에 환도(丸都)에서 ‘가화’를 바쳤고,55) 백제에서는 489년(동성왕 11) 가을에 남쪽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쳤다.56)

여기서 ‘상서로운 벼’란 유난히 잘 영근 벼라고 할 수도 있고, 벼 가운데 상서로운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라 효소왕 때 완산주에서 바친 벼는 밭고랑이 다른 줄기의 이삭이 합하여 하나로 된 것이며, 백제 동성왕 때 남쪽 바닷가 사람이 바친 벼는 이삭이 합쳐져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당 지역을 통합한다거나 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현상으로 국가나 왕실의 융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서(尙書)』에 의하면 중국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 당숙(唐叔)이라는 사람이 밭고랑이 다르면서도 줄기가 하나로 합쳐진 벼를 얻어 주공(周公)에게 바치자, 주공은 천자의 명을 받아서 ‘가화편(嘉禾篇)’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화’가 나타나는 것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현상이다.

그런데, ‘가화’를 바치는 시기가 모두 가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벼가 익어 수확을 하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7월이 많은 것은 가장 먼저 수확된 것 가운데 잘 여문 벼를 바친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경우 남쪽의 신라나 백제보다 한 달 이상 늦은 9월에 바쳤다는 것은 환도가 압록강 이북 지역인 것으로 보아 벼농사의 수확시기가 그만큼 늦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 박찬흥
44)황패강, 「단군 신화의 한 연구」, 『백산학보』 3, 백산학회, 1967.
45)『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8, 제주목(濟州牧), 풍속, 조리희(照里戲)(‘마을을 환하게 해주는 놀이’라는 뜻).
46)허용호, 「민속놀이의 전국적 분포와 농업적 기반」, 『민족 문화 연구』 41,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4.
47)김광언, 『동아시아의 놀이』, 민속원, 2004.
48)『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
49)『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벌휴이사금 3년.
50)『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조분이사금 13년.
51)『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2, 유례이사금 11년.
52)『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36년.
53)『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8, 효소왕 6년.
54)『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6년.
55)『삼국사기』 권19, 고구려본기7, 양원왕 4년.
56)『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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