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2장 조선 후기의 대외관과 일본 인식4. 실학파의 일본 인식

이익, 일본에 대한 재인식을 주장하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실학자 사이에서도 전통적인 일본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임진왜란 후 1세기가 지나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서 벗 어나 임진왜란을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서 객관화할 수 있었고, 통신사행원이 저술한 일본 사행록을 통해 일본 사회의 문물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새로운 일본 인식을 제창한 사람은 근기 남인계의 실학파 종장(宗匠) 이익이었다.

이익은 17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 사이에서 풍미하던 숭명적(崇明的) 중화주의를 비판하면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제시하였고, 청나라를 이적시하지 않고 ‘중국’으로 보자는 청조 긍정론을 제창하였다. 또 현실적인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면서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된 조선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청나라를 인정하고 문화 교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청대 문화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이익은 일본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일본 사회의 실상과 변화 양상에 주목하였다.

<『성호사설』>   
이익이 평소에 지은 글을 엮은 백과전서적(百科全書的) 저술이다. 천지문(天地門)·만물문(萬物門)·인사문(人事門)·경사문(經史門)·시문문(詩文門) 등의 다섯 가지 부문으로 나누었다. 모두 3,007편의 항목이 실려 있는데, 일본에 관해서는 90여 개 항목을 기술하였다.

이익의 일본 인식에는 통신사행원을 통한 일본 서적 입수와 전문(傳聞)이 중요한 정보 통로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1)의 역할이 컸다. 이맹휴는 1744년(영조 20) 예조 정랑(正郞)이 되어 조선시대의 외교에 관한 사례를 수집한 『춘관지(春官志)』와 『접왜역년고(接倭歷年攷)』를 편찬하였다. 따라서 그는 조선의 대일 관계에 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익은 이맹휴를 통해 조일 외교에 관한 자료나 일본 서적 등을 얻어 볼 수 있었다. 그 밖에 홍성원, 안정복 등을 통해 일본 서적을 보거나 일본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이러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90여 개 항목에 걸쳐 일본에 관해 기술하였고, 『성호선생전집(星湖先生 全集)』에도 많은 기록을 남겼다. 비록 일본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은 아닐지라도 분량이 방대할 뿐 아니라 관심의 다양성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일본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익은 일본 이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익이 가진 일본 인식의 특징적인 면모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일본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할 것을 제창하였다. 당시 그는 조선 지식인들의 일본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한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일본에 대해 관심과 경각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구체적인 역사 인식에서 명분보다 시세(時勢)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일본에 대한 ‘만세원(萬世怨)’, ‘구세 복수설(九世復讐說)’을 부정하였다.

임진왜란 때 두 능(陵)이 변을 당한 일은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이고, 만력 연간(萬曆年間, 1573∼1620)에 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는 만세까지 잊기 어려운 덕이지만 원수는 이미 흔적이 없고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왜의 원수에 대해서는 그래도 할 말이 있지만 원흉의 머리는 이미 베었고 남은 무리들은 허물을 고쳤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무기를 풀고 백성을 쉬게 해야 할 것이다. ……대개 교린이란 오직 친목을 중히 여겨 감정을 안으로 다스리면서 정성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을 시대의 대세에 따라 할 따름이다.132)

이 글에서 보듯이 그는 임진왜란의 원한을 갚는 것보다 미래 지향적이고 현실적인 입장에서 조일 관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일본의 기술과 문화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일본이 군사적 강국이며 물산이 풍부하고 무기 제조 기술이 조선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일본의 문화에 대해서도 부분적이지만 긍정적 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일본의 기술 수준에 대해서 “이제 듣건대 일본은 큰 바다 가운데 있어 사방으로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그 기계의 정교함도 배워 익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니 더욱 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라고133) 하여 전반적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았다. 또 철의 제련, 축성법 등의 기술은 일본이 우수함을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조선의 기술 수준에 대해 비판하였다.134) 특히 무기 제조 기술에서는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으로 평하였다.135)

일본의 문화 수준에 대해서 “그 백성이 중화를 절실히 사모하여 서적을 많이 발간하고 약간의 시문도 전해 오지만 그래도 시골 수재(秀才)의 미숙한 기미를 면하지 못하였다.”라고136) 하여 전체적인 수준은 아직 낮다고 보았다. 따라서 문화적 교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문화 교류 또는 전수의 한 방편으로 통신사행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익은 일본 문화의 발전된 면모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며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즉, 당시 일본이 조선에도 없던 전적(典籍)을 풍부히 갖추고 있었다는 점과 인쇄 기술이 발전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37) 또 1757년(영조 33)에는 안정복에게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의 『화한명수(和漢名數)』에 대한 소개를 받고, “왜서(倭書)의 색다른 이야기는 실로 한번 보기를 원한다. 성(性)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 내외에 풍부하고 인색한 구별이 있겠는가. 그 충효와 의열(義烈)이 중화에서 전해진 것이니 선(善)을 좋아하는 한 단서이다.”라고138) 하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히 인성(人性)에서 내외의 구별을 부정하며 일본의 문화도 중화 문명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한 점은 당시 소중화 의식 속에서 일본 이적관을 고수하였던 조선 지식인의 일반적인 일본 인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이보다 2년 후인 1759년의 서신에서는 “왜인의 문자는 비록 해박하거 나 통달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오히려 틀림이 없다. 언어가 이를 따라 나아가면 그 끝에는 반드시 올바른 지식과 실천에 이를 것이다.”라고139) 평한 구절이 나온다. 논평 내용으로 볼 때 여기에서 ‘왜인 문자’는 일본 유학자의 서적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와 그 제자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학문이 자세하고 밝다.”고 논평하였고, 그들이 군신의 의리를 강조하면서 천황의 복권을 추구하였던 점에 대해 ‘충의지사(忠義志士)’, ‘기이한 선비(奇士)’라고 평하기도 하였다.140) 이러한 측면은 17세기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대조적이며, 조선 후기의 일본 인식에 하나의 전기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익은 조일 관계의 바람직한 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일 관계사의 정리에 심혈을 기울였고, 당시 조일 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나름대로 대책을 제시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이 군사적으로 강성하여 언제든지 재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나, 그것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는 평화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만큼 일본과의 관계에서 교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대일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교린 체제의 유지와 강화였다. 이를 위해 그는 기본적으로 평등의 정신과 의례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허목이 『동사』에서 일본사(日本史)를 ‘흑치열전(黑齒列傳)’으로 배치한 것에 대해 “일본은 우리의 이웃 나라이므로 마땅히 ‘일본세가(日本世家)’로 해야 한다.”고 비판하였다.141)

한편 이익은 통신사행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에 불평등한 방식을 바꾸어 일본 사신도 한양까지 오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고, 3년마다 한 번씩 상호 방문하는 정기 사행으로 바꾸어 양국의 친선과 문화 교류를 더 깊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42) 즉, 당시 조선의 통신사는 막부 쇼군이 있는 일본의 수도까지 가서 접대를 받은 반면, 일본의 사신은 한양이 아닌 부산에서 접대를 하였다. 또한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의 요청을 받고 가는 제도에 대해서도 일본에 대한 올바른 성신(誠信)의 자세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를 좀 더 평등한 관계로 수정하여 접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통신사행을 3년에 한 번씩 교류, 왕래하도록 하고 양국의 사신 모두 각국의 수도에 가서 교빙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지적과 제안은 전통적인 화이적 명분론이나 감정적 차원에서 벗어나 평등과 성신의 자세로 일본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그의 인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신사음대도병풍(通信使飮待圖屛風) 부분>   
1640년(효종 6) 통신사행을 환대하는 모습을 그린 병풍 가운데 통신사 일행이 에도성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부분이다. 통신사 일행이 에도에 도착하면 막부에서는 로쥬가 통신사 숙소까지 와서 영접하였고, 다시 막부의 유력 친족인 고산케(御三家)가 주관하는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국서 전달이 끝난 후의 연회에는 막부 쇼군이 직접 삼사에게 술을 권하는 등 극진히 대접하였다. 이익은 통신사행이 에도까지 가는 반면 일본 사신은 부산에서 접대하는 방식을 바꾸어 한양까지 오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넷째, 이익은 조선 국왕과 일본의 막부 쇼군이 동격(同格)으로 교빙하는 것이 명분상 타당하지 않고 교린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막부 쇼군이 실권자이고 대외적으로 일본을 대표하고 있지만 일본 국내에는 천황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조선 국왕과 천황의 신하인 막부 쇼군이 대등한 의례를 갖추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며, 조선의 대신과 막부 쇼군이 대등 의례를 해야 한다는 이맹휴와 안정복의 견해에 찬동하였다.143) 이익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차 국제 정세와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의 변화 가능성을 예상하고 그것이 조일 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왜황이 권력을 잃은 것이 600∼700년에 지나지 않는데 국민의 바라는 바가 아니다. 점차 충의지사가 그 사이에 나오는데 명분이 바르고 말이 옳으니 뒤에 반드시 한번 통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만일 하이(蝦夷, 에조. 아이누 족)와 연합하고 천황을 보좌하면서 제후에게 호령한다면 반드시 대의를 펴지 못할 것도 없다. 66주의 태수(太守)들 가운데 어찌 호응하는 자가 없겠는가. 만일 그렇게 되면 저쪽은 천황이요, 우리는 왕이니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144)

즉, 그는 장차 천황이 복권하게 될 경우 당시 막부 쇼군과 대등 의례를 갖추었던 조선 국왕의 외교적 지위가 두 나라 사이에 쟁점으로 떠오를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였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외교적·군사적 대비책의 강구를 촉구하였다. 실은 이것도 평등한 외교 의례를 갖추어 평화적인 교린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이익의 조일 관계에 대한 기본 인식의 발로(發露)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 하우봉
132)이익,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만력은.
133)이익, 『성호사설』 권17, 인사문, 기병(騎兵).
134)이익, 『성호사설』 권8, 인사문, 생재(生財) ; 권11, 인사문, 왜지수성(倭之守城).
135)이익, 『성호사설』 권5, 만물문(萬物門), 화포(火砲), 화구(火具) ; 권6, 만물문, 화전(火箭).
136)이익, 『성호사설』 권9, 인사문, 왜승현방(倭僧玄方).
137)이익, 『성호사설』 권17, 인사문, 일본충의(日本忠義).
138)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6, 답안백순정축(答安百順丁丑).
139)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7, 답안백순기묘.
140)이익, 『성호사설』 권17, 인사문, 일본충의.
141)이익, 『성호사설』 권18, 경사문, 일본사(日本史).
142)이익, 『성호사설』 권9, 인사문, 왜승현방.
143)이익, 『성호선생전집』 권25, 답안백순문목.
144)이익, 『성호사설』 권17, 인사문, 일본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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