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2. 원의 이중적 고려관과 중화적 세계관부정부패와 하급 문명의 나라

원나라 사람들의 은근한 멸시

물론 그러한 변화가 중원적 화이론의 투영이나 자존 의식 확대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문명이나 야만이라는 ‘단순한’ 표상으로 점철되던 고려와 몽골 양국의 상호에 대한 인식은 서로 간의 교섭과 접촉이 지속됨에 따라 그 깊이를 더해 갔다. 그리고 그러한 깊이가 고려를 단순히 이질적이거나 문명적인 나라로 인식하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고려의 모순이나 문제점을 직시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하였던 것이다.

화이론적 인식을 근거로 고려인을 비하하거나 고려의 문화적 후진성을 강조하는 인물 가운데 많은 이가 한족 출신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저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는 오직 화리(貨利)만을 중하게 여기니 나는 능히 그들을 경멸한다.”고 하였던 요수나 고려를 “바다 끝의 궁벽한 곳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192) 표현하였던 소천작(蘇天爵)은 모두 한족이다. 물론 이 점은 현전하는 자료들이 대개 한족이 저술한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자료적 제약에서 온 측면도 있다. 하지만 원나라 사람으로 망라할 수 있는 일단의 관료가 당시 고려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멸시하는 듯한 풍조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원나라 사람의 은근한 멸시를 고려인도 감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인복(李仁復, 1308∼1374)은 자신과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한 원나라의 친구들에게 “그대들은 부디 동이(東夷)가 비루하다고 웃지 마소. 바다 위 삼산(三山)에 푸른빛이 솟아 있소.”라고 하여 고려인의 자존 의식을 보이려 하였다.193)

원나라 사람들의 은근한 멸시는 앞서와 같은 고려인이나 고려 문화에 대한 전체적 평가보다 고려 내정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 과정에서 표출된 인식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엿보인다. 우선 그것은 부정적 인식으로 실체화되었다. 원나라는 내정 간섭을 하면서 고려의 부정부패(不正腐敗)에 대해 직시하고 개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려 고관(高官)의 불법적인 토지 침탈과 인민 수탈, 관리의 탈세 행위 등을 지적하였다. 또한 왕조 의 수탈 때문에 평안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고려 백성을 도울 방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때로는 부정부패 세력을 직접 처단하거나 비행(非行)을 금지하였다. 예를 들어 착취(搾取)를 견디기 어려웠던 당시 가림현(嘉林縣) 사람들이 어느 날 원나라 행정관에게 “우리 마을은 한 촌락만 빼고 모두 고려의 여러 관청에 소속되어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앙에서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나머지 한 곳마저 또 다른 관청에 소속시켜 세금을 걷으려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 많은 세금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소연하였다. 그 말을 들은 원나라 행정관은 “너희 고을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고려에는 이러한 데가 많다.”고 대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재상이 “원나라 행정관이 각 도를 조사하여 우리의 실정을 모두 알아내어 원나라 조정에 보고하면,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관청에서 몰수한 백성들의 재산은 돌려주고 본래의 세금만을 부담하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함으로써 지방민에 대한 이중적 수탈은 잠시 중단되었다.194)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당시 원나라에서 파견된 관리가 하였던 말이다. “고려에는 이러한 데가 많다.”는 언급은 고려를 불법과 착취의 온상(溫床)으로 바라보는 부정적 인식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륵하생경변상도 부분>   
일본 신노인(親王院)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佛畵)인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의 하단 부분으로, 1350년(충정왕 2)에 그렸다. 고려시대 농민들이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고, 낫으로 벼를 베며, 볏단을 나르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원나라는 고려 내정을 간섭하는 과정에서 고려 고관의 불법적인 토지 침탈과 인민 수탈, 관리의 탈세 행위 등을 지적하고 개정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필자] 이정란
192)소천작(蘇天爵), 『자계문고(滋溪文稿)』 권26, 「재이건백십사(災異建白十事)」 ; 장동익, 앞의 책, 1994, 223쪽.
193)장동익, 앞의 책, 1994, 218∼219쪽.
194)『고려사절요』 권20, 충렬왕 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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