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6장 일제와 서양인이 본 식민지 조선

3. 한말 서양인의 조선, 조선인 인식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을 더욱 노골적으로 가속화하였다. 반면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서구 문명을 수용하여 근대 국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다양한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통감부의 설치에서 보듯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일제의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헐버트는 “한국은 지형상 중국과 정면하고 있으며 일본을 등 뒤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형상의 여러 가지 조건은 한국의 역사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라고 보았다.463) 서양인들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조선을 세계열강의 각축장(角逐場)에서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지배권이 확립되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스웨덴의 기자 출신인 아손 그렙스트(W. A, son Grebst)는 을사조약 직전에 조선을 방문하고는, “경쟁이 심해지면 약삭빠른 자에게 유리한 법이다. 코레아인들은 눈을 떠서 시대에 적응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들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인식하기도 전에 구제될 길 없이 낙오자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라고 전망하였다.464)

서구인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쇠락해 가던’ 대한제국에 관한 그들의 첫인상은 어떠하였을까? 1880년대 조선에 왔던 외국인들의 조선의 풍경에 관한 인상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알렌의 입장과 유사하였다.

배의 갑판에서 바라보면 조선의 해안은 너무도 황량하여 도무지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사람들이 자기네의 국토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은 탓이다. 실제로는 물론이고 명목상으로도 ‘은자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이 나라에서는…… 외국인들이 그들의 국토에 상륙하여 입국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농민들은 연안의 언덕에 있는 나무와 숲을 모두 베어 버렸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해안을 쓸쓸하고 매력 없는 모습으로 만들어 그곳을 지나가는 항해사들로 하여금 이 금단의 나라에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465)

<한국의 풍경>   
1901년 12월 초에 약 2주 동안 한양을 여행한 조르주 뒤크로(Georges Ducrocq)가 쓴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Pauvre Douce Corée)』에 실려 있는 사진으로, 제목은 ‘인천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서’이다. 아마 당시 제물포를 통해 서울로 들어온 서양인들이 본 조선의 풍경은 이 사진처럼 ‘황량함’과 ‘자연미’가 교차되었을 것이다.

조선이 황폐한 이유가 가능한 한 외국 사람들에게 낙담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은 1930년에 나온 샌즈의 글에서도 다시 반복된다.466) 하지만 이들 서양인은 조선에 오래 거주하거나 조선에 관해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애정’을 기반으로 조선의 풍경을 바라보면 이러한 전형적인 인식과 다른 서술이 가능하였다. 헐버트는 “기선을 타고 갑판에 서서 바라볼 때 느끼는 바와 같이 한국의 풍경이란 매우 보잘 것이 없는데 이러한 탓으로 한국을 둘러본 관광객들은 귀국해서 한국은 나무 하나 없는 황무지라고 말하게 된다. …… 빽빽이 들어선 숲이 없는 탓으로 산의 경치는 오히려 웅대하고도 평온하게 보이는데, 이런 점에서는 일본과 다르다.”라고467) 하며 서양인에게 조선의 풍경에 관해 좀 더 깊게 이해하기를 당부하였다. 게일의 경우에도 헐버트와 비슷하였는데, 그는 “조선의 일반적인 양상은 나무가 거의 없고 산이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이따금씩 언덕 너머로 아름다운 조망과 전망이 펼쳐지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철저하게 자연미를 즐기지만,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라고 해서,468) 인공적인 것으로 꾸미지 않는 조선 풍경의 ‘자연미’를 강조하였다.

<제국주의와 위생>   
이 그림은 영국 피어스사(Pears社)의 비누 광고이다. 비누를 사용하면 흑인의 피부색이 하얗게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누는 비유럽 사회의 ‘불결함’과 대비되는 ‘위생’을 지칭하는 ‘문명의 상징’이었다. 아울러 서양 어린아이는 옷을 입고 있고, 흑인 어린아이는 벌거벗고 있는 것 역시 문명과 야만의 대비였다.

그럼에도 서양인은 개항기와 마찬가지로 ‘동양·조선 대 서양’이라는 대조 속에서 조선을 바라보았다. 조선은 ‘문명화’된 서양과 대비되는 공간이었다. 심지어 정체된 공간으로까지 이해되었다. 게일은 서구와 조선을 비교하여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서구 세계와 비교해 볼 때 조선은 가장 조용한 침묵의 나라”라고 평가하였다.469) 서양과 동양 혹은 조선과의 비교나 대조는 ‘냄새’처럼 감각적인 것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 사람들은 오랜 경험으로 이런 냄새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들은 사방 8피트의 침실에서 이 해로운 공기를 어떻게 호흡하며 이 작은 방에 불을 때고 6∼8명이 한방에서 잠을 자고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런 방에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 순간 확 끼치는 냄새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으며, 이럴 때면 백인들은 누구든지 바깥 일기가 아무리 나빠도 숨이 막혀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470)

<여성의 삶>   
물을 길어 오는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다. 서양과 동양은 여성들의 삶의 차이에서도 대비되었다. 특히 조선 여성이 감내해야 했던 열악한 지위, 힘겨운 가사 노동, 은둔 생활, 사회적 천대 등이 강조되었다.
<여성의 삶>   
빨래를 이고 가는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다.

나아가 동양, 조선에 관한 스테레오 타입과 같은 논의가 반복되는 부분이 존재하였다. 게일은 “수세대에 걸쳐 한국인들은 본능에 의해 살아왔지, 이성에 의해 살아온 것은 아니다. 가능한 모든 상황이 가정되어 있으며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단지 눈을 감고 자기 자신을 내맡길 뿐”이라고 보았다.471) 조선인의 ‘본능’은 서구인의 ‘이성’과 대비되었다. 위생적인 면에서도 “인과론(因果論)이라는 규범이 지구의 반대편인 이쪽에서는 분명치 않은 것 같다. 의학적인 치료도 불합리하다.”라고 평가되었다.472)

또한 조선과 서양의 대비는 여성들의 삶의 차이에서도 두드러졌다. 알렌은 조선의 여성을 언급하면서 “조선의 여인들처럼 은둔 생활을 하는 여인들에게 있어서 남의 흉을 보는 일이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혹은 “중국과 조선의 여자들은 천대를 받고 있다. 참을성도 많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압박을 받다가 반항할 때 그들의 분노는 상상하기조차 무섭다.”라고 보았다.473) 이러한 동양과 서양 여성의 차이를 염두에 둔 서술은 알렌이 비록 조선에 대한 애정이 있음에도, 개별적인 사실을 무리하게 일반화하는 부당 확대(不當擴大)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   
1937년 조선 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부산 압록 간 사진첩』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장승은 마을 어귀나 길가에 세운 푯말로 이수(里數)를 나타내는 이정표 구실을 하거나,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다. 20세기 초반 우리나라를 찾은 서구인은 대개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를 선교할 목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장승과 같은 것을 뿌리 깊은 ‘미신’의 상징으로 보았다.

기독교를 기준으로 보면 20세기 초반 조선은 여전히 ‘미신의 나라’였다. 서구인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거나 기독교를 선교할 목적으로 파견된 인물이 많았다. 따라서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조선인의 신앙생활은 미신으로 보였고, 이들은 이러한 신앙 체계에 관해 부정적이었다. 언더우드는 “논리의 단순한 철학 체계인 유교는 조상 숭배를 요구하는 원칙 때문에 사람들을 강하게 끌고 있다. 조선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만연된 미신을 야기하는 이러한 관습은 강철보다 더 강하게 그들을 구속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474) 하지만 헐버트는 “동양인들에게는 어디까지가 종교이고 어디부터가 미신인가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라고 전제한 후, “논리적인 점에서 보면 한국인들이 신봉하는 여러 가지의 상이한 의식들은 서로가 상충되지만 그들의 내부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수세기에 걸쳐 서로가 익숙해지는 동안에 하나의 종교적인 혼성물을 이루었으며, 한국인들은 이러한 혼성물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요소를 취하면서도 그 나머지에 대하여는 아무런 멸시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다.”라고 평가하였다.475)

이렇듯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조선인은 흰옷 입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관해 긍정과 부정의 입장이 외국인의 시선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조선인의 의생활에 관해 “더럽고 흰 토속 옷이다. 가난한 하층 국민의 경우 한 달에 두 번 이상 옷을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라고 평 가하였다.476) 이러한 ‘불결함’의 강조는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싫어하기 때문에 침례식(浸禮式)에 참석하지 않았다. 침례교는 결국 조선을 떠나 목욕을 잘 하는 일본으로 들어갔다.” 등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반복되어 설명되었다.477) 그렇지만 흰옷에 관해 다른 인상기도 존재한다. 게일은 “한국인은 깨끗한 의복을 입는다. …… 일본 사람들처럼 목욕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의복으로 자주 갈아입는다.”라고 평가하였다.478) 그런데도 조선에 관한 스테레오 타입의 논의가 존재하였고, 그 기준은 ‘문명과 야만’의 잣대였다.

<세계 국가별 서열화>   
1878년 일본 『마루마루친분(團團珍聞)』에 실린 삽화로, 세계의 여러 나라를 인형 축제의 장면으로 묘사하였다. 위에서 아래까지 네 단계로 나뉘어 있고, 단계 설정의 기준은 맨 하단에 나오는 기차, 기선, 전선 등으로 대표되는 ‘문명’이었다. 맨 위에 일본인이 위치하고, 그 다음 단에 영국·프랑스가, 그 아래 미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네덜란드가 배치되어 있다. 이들은 문명을 상징하는 양복을 입고 있는데 비해, 세 번째 단에 있는 중국인과 조선인은 인간보다 동물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 놓았다.

문명과 야만을 대비하였을 때 당시 일본은 서구를 본받아 문명화를 진행한 모범적인 사례로 인식되었다. 특히 이들 일본인의 문명화 과정은 문호 개방은 먼저 하였지만 ‘정체’되었다고 판단한 중국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언더우드는 청일 전쟁에 관해 “일본인들은 군대의 훌륭한 규율로 커다란 신망을 얻었다. 한 도시에서 질서가 잡히고,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모두 평안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동방의 그 승전국의 덕분이었다.”라고 보았다.479) 중국 군대와 달리 일본 군인들은 규율을 잘 지키고, 외국인을 ‘보호’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일본과 일본 군대의 역할은 1900년 중국 베이징에서 발생한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에서도 확인된다. 매켄지는 이 에 관해 “1900년의 의화단 사건에서 연합군으로 활약하던 때에 일본군이 보여 준 실력과 자제력은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들의 용기, 놀라운 조직, 그리고 그들의 군기는 군사 전문가와 각국에서 온 특파원에게 호평을 받았다.”라고 평가하였다.480)

<러일 전쟁 풍자화>   
러일 전쟁 직후에 러시아에서 발행한 사진엽서이다. 등장인물은 조선 여성과 그녀를 위로하는 일본 군인 그리고 둘을 지켜보는 러시아 군인이다.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논리였다. 아울러 조선을 의인화한 여성은 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문명에 대비된 ‘야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서구 및 일본의 공사관이 위험할 때 어느 나라보다 먼저 군대를 파견하였던 것은 거리상으로 가까웠던 일본이었고, 이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이해한 서양인에게 일본은 동양의 ‘야만’으로부터 서구인을 보호하는 ‘극동의 헌병’으로 불렸다. 국제 외교적으로 러시아에 반대 입장에 서 있던 서구 국가들에게 러일 전쟁에서 거둔 일본의 승리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서구 여러 나라들은 일본인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경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주한 외국인들의 불평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서구 여러 나라들이 이처럼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은 러일 전쟁 동안에 있었던 일본의 빛나는 업적 때문이었다. …… 우리는 일본을 매우 호의적으로 보았으며, 일본 민족은 이 나약한 한민족을 잘 우대해 주리라고 믿었다.481)

나약하다는 이미지는 작다는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조선을 여성이나 미성숙한 어린아이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뒤크로는 한양(漢陽)에 관한 첫인상을 “겉보기가 볼품없는 농촌의 아낙 같아 보인다.”라고 평가하였다.482) 조선을 어린아이와 연결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알렌은 “사람은 모두가 어린애처럼 생각될 수 있다. 한국인들도 여러 면에서 어린애들과 같다. 오락도 거의 없고 최근까지 신문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한가한 시간이 많고 오늘 못 하면 내일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 수다스럽고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한 조선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듣고 보고 싶어 한다.”라고 보았다.483) 그런데 조선에 애정이 있었던 이들의 논의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은 미성숙의 상태에서 ‘문명’의 교화를 받으면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조선인에게서 찾고자 하였다.

조선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이러한(서양인과 같은) 독립된 사고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 3000년 동안 그에게 진보라는 것은 관목 숲속에서 풍성한 감을 기르는 것만큼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이제 에디슨과 같은 사람들이 어둠 가운데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새로 태어나고 있다.484)

게일이 조선인은 서구인과 달리 이성적 사고가 없고, 진보가 불가능한 존재로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한 점은 스테레오 타입의 조선인에 관한 인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게일의 조선인에 관한 인상은 미국의 발명가인 에디슨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한 점에 특징이 있다.

만약 제대로 된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선과 조선인이 문명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의 관찰에 많이 나타난다. 그렙스트는 조선인에 관해 천성적으로 명석한 민족으로 무기력에서 깨어나면 탐구심이 다시 불붙을 것으로 희망하였다.485) 또한 뒤크로는 조선인을 총명하 며 ‘머리 좋은 종자’라고 보았으며,486) 매켄지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487) 이처럼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이 조선인에게 발전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조선인의 ‘민족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인식과 연동되어 나타났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들은 심각한 도전이 없는 한 악의를 품지 않으며 복수심이나 잔인함도 없다.”라고 보았으며,488) 독일인 지크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1870∼1904)는 선량, 관대, 손님 후대, 활발, 자유분방, 쾌활 등의 용어로 조선의 민족성을 설명하였다.489)

그렇다면 서양인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동양이란 ‘집합적 단위’ 속에서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 존재였을까? 1901년 당시 겐테는 조선을 중국과 일본에 비해 신선하고 생소함이 있다고 지적하였다.490) 그리고 헐버트는 “일본인은 다혈질의 민족이다. 그들은 민첩하고 다재하며 이상주의적이며 그들의 명랑한 기질은 변덕스러울 정도이다. …… 중국인들은 미신을 좋아하면서도 비교적 냉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은 …… 기질도 두 나라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다. 이와 같이 두 가지의 성격이 조화됨에 따라서 한국인들은 합리적인 이상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라고 세 나라 국민을 비교하였다.491) 조선과 중국, 일본 세 나라 가운데 조선인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것은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의 저술에 많이 등장한다. 게일은 “문호가 개방되고 서구의 생활 방식이 유입되자 이 모든 것이 변하였다. 이제 조선은 새로운 시대를 깨닫고 거기에 스스로를 맞추어야만 한다.”라고 강조하였다.492)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우리나라의 발전은 높은 교육열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1950∼1970년대에 우리나라의 각 가정에서는 풍족하지 않은 경제생활 속에서도 교육비는 다른 어떤 명목의 지출보다 앞서 고려하였다. 또한 당시 고학생들은 비록 집안 형편이 어려워도 독학을 통해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교육의 강조는 오늘날에도 여 전히 계속되고 있다. 매년 대학 입시철에 보이는 높은 사회적 관심이 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교육열’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외국인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자강 운동(自强運動) 시기 계몽 운동가는 교육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책임질 중요한 방안이라고 강조하였다. 한말 시기 게일의 시선에도 그것이 포착되었다.

한국인들은 굉장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모든 공공 모임에서는 교육이 언급되고 있으며, 천 개의 전기 단추를 누르자 사람들은 일어나 크게 각성하여 힘차게 달린다. 교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모든 사람의 눈이 빛난다. 학교가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는 한 푼도 써 보지 않은 구두쇠들도 교육을 위한 기금에는 수천 냥을 선불한다. 오늘날에는 계명 학교, 대성 학교, 경신 학교, 전문학교 그리고 그와 비슷한 명칭을 가진 많은 학교들이 널리 선전되고 있다.493)

반면 일본인은 조선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하였다. 스웨덴 기자 그렙스트는 경부선을 타고 한양으로 올라오던 길에 일본군 대위와 동행하였다. 러일 전쟁 직후 상황에서 일본군 장교는 조선인에 대해 “장래성이 없고 중국인보다 더 엉망인 민족입니다. …… 코레아인들은 독립하기를 싫어합니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의존하기를 바라고 책임을 회피합니다.”라고 해서,494)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필연’이라고 강변하였다. 이러한 전형적인 일본인의 조선인 인식과 달리 조선 역사와 문화에 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서양인의 시선으로 볼 때 조선의 ‘과거’는 세계에 자랑거리로 내세울 만한 것이 많았다. 헐버트는 “한국의 역사나 고고학을 통해 언제인가 이곳에서는 훌륭한 도자기의 예술품을 많이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지만 오늘날 이 분야에서는 다만 조잡한 제품만이 만들어지고 있다.”라고 하였다.495) 화려한 과거에 비해 비참해진 현재가 초래된 이유를 서양인은 어떻 게 이해하였을까?

<게으른 조선인>   
사진의 제목은 ‘달콤한 포도주에 취해서’인데, 낮술에 취해 길에 잠든 조선인을 사진기에 담은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자조(self-help)의 사상은 영국 ‘빅토리안 가치관’의 핵심 내용이었다. 요행이나 운수를 믿지 않고, 성실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자본주의화에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근면, 성실과 대비되는 것은 나태, 방종 등이며, 서양인의 시선에서, 이를 동양인(혹은 조선인)에게 투영한 것이다.

조선이 쇠락한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우선 중국의 영향이었다. 헐버트는 “중국의 법제, 종교, 복식, 예술, 문자, 학문 및 윤리관이 한국에서 풍미하였으며 이때부터 한국인은 조락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과 같은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그러한 현상은 절정에 이르렀다고 나는 확신한다.”라고 하였다.496) 물론 서양인들이 진단하는 쇠락의 이유는 외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좀 더 본질적인 원인을 조선과 조선인 내부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근검절약 정신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설명하였다. 언더우드는 “조선 사람들은 하루에 100원을 벌고 1,000원어치를 먹지만, 일본인들은 반대로 하루에 1,000원을 벌고 100원어치를 먹는다는 것이다. …… 일본 사람들에게 그들의 최악의 적인 조선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근면과 검약이다.”라고 평가하였다.497) 그런데도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은, 그리고 앞서 설명하였듯이 조선인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던 서양인은 조선의 쇠락 원인을 조선인 전체가 아닌 구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서 찾았다.

조선에서는 이제 20세기의 세계적 결전의 첫 장면을 보여 주게 되었다. 그러나 보라! 조선은 깊이 잠들어 있다. …… 개혁을 위한 나약한 시도가 있었다. …… 그러나 조선은 내정 개혁은 한 번도 심각하게 다루어 본 적이 없다. 개혁을 위한 노력은 조정 대신들의 부패와 나약과 무능으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다.498)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 머리말에서 “한국이 그 자신의 독립을 상실한 것은 대체로 구왕조의 부패와 취약성에 그 원인이 있다.”라고 서술하였다.499) 조선 조정의 무능력이 강조될수록 서양인의 시선에서 일본의 ‘근대적’ 변화는 긍정적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조선에 깊은 애정을 표하고 조선인이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의병 활동’을 높이 평가한 매켄지마저도 “일본을 저토록 이끌어 온 그들의 충성심과 드높은 민족적 야망에 대한 깊고도 순수한 존경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500) 하며 일본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이해하였다. 일본 측은 서양이 인정한 자신들이 이룬 ‘문명’을 바탕으로 조선을 식민(植民)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만 두 민족 간의 우호 관계는 결코 손상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인이 인도주의적으로 대우를 받고 있다, 조선인이 일본인에 대해 우호적이다 등으로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서양인에게 호도하였다. 물론 전차, 전신(電信), 근대적 건물 등 물질적 ‘문명’을 기준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의견도 제시할 수 있다. 헐버트도 이 점을 인정하였다.

만약 20년 전에 한국을 방문한 어느 여행자가 서기 1906년에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는 대외 문호 개방에서 빚어진 물질적 변화에 적이 놀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개항지나 상업의 중심가를 벗어나서 돌아본다면 600마일에 이르는 철도와 전신선 이외에는 그러한 물질적 진보가 중심지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501)

그런데 개항 이후 조선의 ‘발전’은 조선인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발전’을 대표하는 철도와 전신은 일본의 자원 확보와 시장 확대를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은 이것에 주목하였다. 매켄지는 “상투를 잘라야만 한다는 일본인들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지만, 민중들이 개화 사조(開化思 潮)를 통해 서서히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법으로 다스리려고 하였다는 점에 과오가 있다.”라고502) 하면서 일본의 급속한 ‘개혁’과 조선인의 반발을 지적하였다. 언더우드도 일본인들이 “중국에 승리를 거둔 후에 매우 행운이 트인 듯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이 유화 정책으로 만족하였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더욱더 강력해지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평가하였다.503) 헐버트는 좀 더 분명하게 “일본의 자기중심주의 정책의 수레바퀴가 이 민족을 짓밟고 무너뜨린다면 일본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과오를 저지르는 범죄인이 될는지도 모른다.”라고 비판하였다.504)

1905년 일본이 조선에 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고 한 당시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를 불러 밀지(密旨)를 내리면서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부 요인에게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호소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헐버트는 미국에 가서 여러 정치가를 만나고 지인을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지만 미국의 태도는 냉담하였고, 큰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헐버트가 조선에 돌아왔을 때 이미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일본의 침략적 정책이 헐버트로 하여금 더욱더 ‘약소국’ 조선을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헐버트는 “왜 세계는 러시아가 만주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꾸짖고 그를 국제적 악당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른, 러시아보다 10배나 더한 만행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없이 이를 외면하고 묵인하였던가?”라고 하면서505) 일본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미국과 서양인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우리 미국 시민들은 이제까지 미국이 주창하던 여러 가지 원칙에 배치되는 그러한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인에게 납득시키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 길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인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토록 흔하게 쏟 아져 나온 한국을 비방하는 성명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수많은 미국인들의 선의를 무시한, 진의가 아닌 것이었음을 한국인들이 알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길은 곧 한국인의 교육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이다.506)

헐버트는 을사조약으로 잃어버린 외교적 자주권을 찾기 위해, 나아가 강력한 일제의 무력 앞에 조선이 ‘독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교육에 힘쓰라고 강조하였다. 알렌도 조선인에게 “어떤 사람은 침입자에게 무기를 들고 대들지만 그것은 사실상 자살이나 다름이 없다. ……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도록 부르는 것을 수락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거리요, 슬픔을 위로해 주는 기독교에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라고 하면서,507) 무력 사용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중심으로 조선인이 ‘각성’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매켄지가 이들과 유사하게 일본이 ‘군국주의’로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한 점은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일제의 침략성에 저항하여 무력으로 대결하고자 하였던 의병 전쟁에 주목한 사람이었다.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에 분노한 조선인의 항일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명성 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던 을미의병의 전통을 계승하여 을사조약 이후 민종식(閔宗植), 최익현(崔益鉉), 신돌석(申乭石) 등의 의병 부대가 새로 조직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자 조선인 군인들은 의병 부대에 합류하였다. 의병 활동이 거의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본은 1개 사단 이상의 보병, 1개 연대 이상의 기병, 6,000여 명의 헌병을 투입하여 의병 활동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1907년에서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교전 횟수는 3,500여 회에, 전투에 참가한 의병은 15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의병들의 활동을 잘 보여 주는 사진이 있는데, 이는 매켄지가 직접 의병을 찾아가서 찍은 것으로 『대한제국의 비극』에 실려 있다.

<한말 의병>   
매켄지가 1907년 충북 제천 지역에서 의병을 직접 만나 찍은 사진이다. 이들은 18∼26세 사이의 청년이었고, 휴대한 총은 제각기 다른 종류였으며 그 중의 어느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병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 존재였다.

당시 일본은 의병 활동에 관해 “의병이란 단순히 백성을 뜯어먹고 사는 무질서한 비적”이라고 알려지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선전은 일정 정도 세계 여론을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매켄지가 직접 만난 조선인 의병의 목소리는 이와 달랐다. 일본의 강력한 군사적 공세 속에서 이들의 무장력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의 인식처럼 일본군에게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의병 활동은 ‘사실상 자살’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매켄지가 만난 의병은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508) 이는 조선인이 나약하고 비겁하다는 일본인과 서양인의 전형적인 조선 민족에 관한 부정적 인식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국가의 국민으로 살고자 한 조선인의 목소리였다. 이러한 의병 활동을 통해 매켄지 스스로도 “한국인에게 대한 ‘비겁하다’거나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무심하다’는 식의 조롱은 이제 그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509) 이러한 의병들의 목소리가 매켄지를 통해 당대 서양인에게는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필자] 류시현
463)H. B. 헐버트,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집문당, 2006, 32쪽.
464)아손 그렙스트, 김상열 옮김,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과 함께, 2005, 81쪽.
465)H. N. 앨런, 신복룡 역주, 『조선 견문기』, 집문당, 1999, 51쪽. 언더우드도 “조선에 처음 당도해 보면 이곳의 산이 훼손되고 황폐하다는 사실에 대해 중압감을 느끼며, 특히 일본의 기름지고 울창한 언덕을 목격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은 자신의 국토를 외국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은둔시키는 것이 최선이며, 자기 나라를 황량하고 매력 없는 곳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의지에서 모든 해안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라고 보았으며, 게일은 언더우드의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였다(J. S. 게일, 신복룡 역주, 『전환기의 조선』, 집문당, 15쪽).
466)W. F. 샌즈, 신복룡 역주, 『조선 비망록』, 집문당, 1999, 41쪽.
467)H. B. 헐버트, 앞의 책, 33쪽.
468)J. S. 게일, 앞의 책, 29쪽. 스웨덴 기자인 그렙스트의 경우에도 조선의 풍경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내륙에 들어가면 풍경이 좋은 곳이 많다고 평가하였다(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76쪽).
469)J. S. 게일, 앞의 책, 28쪽.
470)H. N. 앨런, 앞의 책, 103쪽. ‘냄새’는 위생과 연결되었다. 언더우드는 조선인의 “집에 관련된 모든 것은 지독히도 비위생적이며, 대개는 불결하고 해충으로 가득 차 있다.”라고 보았다(L. H. 언더우드, 신복룡·최수근 역주, 앞의 책, 29쪽). 게일 역시 “한국인들의 생활이 두려울 만큼 지저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냄새가 진동하고 전염병이 만연되어 있으나, 이에 익숙해져 지나는 사람들도 둔감해지고, 후각 신경도 이러한 심한 자극에 거리끼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였다(J. S. 게일, 앞의 책, 91쪽).
471)J. S. 게일, 앞의 책, 93쪽. 게일은 ‘본능’에 의해 이끌린 조선 사람들은 “독자적인 행동이 결여되고, 사회라고 불리는 이 기계에 고착되어 있는 한국인은 철저한 운명론자이다. 그의 팔자가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라고 하여 ‘팔자’에 의존하는 조선인을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J. S. 게일, 앞의 책, 95쪽).
472)J. S. 게일, 앞의 책, 89쪽.
473)H. N. 앨런, 앞의 책, 92, 95쪽.
474)L. H. 언더우드, 앞의 책, 32쪽.
475)H. B. 헐버트, 앞의 책, 468쪽.
476)L. H. 언더우드, 앞의 책, 25쪽.
477)H. N. 앨런, 앞의 책, 161쪽. 조르주 뒤크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민족의 의복은 흰색이 으뜸을 차지한다. 흰색이야말로 순한 한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이다. …… 만약에 이들이 흰옷을 입지 않게 된다면, 이들의 쾌활함은 절반으로 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조르주 뒤크로, 최미경 옮김,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눈빛, 2006, 77∼78쪽).
478)J. S. 게일, 앞의 책, 92쪽.
479)L. H. 언더우드, 앞의 책, 147쪽.
480)F. 매켄지,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999, 106쪽.
481)F. 매켄지, 앞의 책, 195쪽.
482)조르주 뒤크로, 앞의 책, 67쪽.
483)H. N. 앨런, 앞의 책, 122쪽.
484)J. S. 게일, 앞의 책, 84쪽.
485)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103쪽.
486)조르주 뒤크로, 앞의 책, 122쪽.
487)F. 매켄지, 앞의 책, 43쪽.
488)L. H. 언더우드, 앞의 책, 78쪽.
489)지크프리트 겐테, 권영경 옮김,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책과 함께, 2007, 128쪽.
490)지크프리트 겐테, 앞의 책, 32쪽.
491)H. B. 헐버트, 앞의 책, 53∼54쪽.
492)J. S. 게일, 앞의 책, 38쪽.
493)J. S. 게일, 앞의 책, 112∼113쪽. 헐버트는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였는데, 그는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과 영국의 각 기관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 예외 없이 훌륭한 일을 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선천적인 지적 능력이 다른 어느 민족에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H. B. 헐버트, 앞의 책, 404쪽).
494)아손 그렙스트, 앞의 책, 52쪽.
495)H. B. 헐버트, 앞의 책, 324쪽.
496)H. B. 헐버트, 앞의 책, 106쪽.
497)L. H. 언더우드, 앞의 책, 128쪽.
498)F. 매켄지, 앞의 책, 48∼49쪽.
499)F. 매켄지, 앞의 책, 11쪽.
500)F. 매켄지, 앞의 책, 228∼229쪽.
501)H. B. 헐버트, 앞의 책, 523쪽.
502)F. 매켄지, 앞의 책, 59쪽.
503)L. H. 언더우드, 앞의 책, 212쪽.
504)H. B. 헐버트, 앞의 책, 69쪽.
505)H. B. 헐버트, 앞의 책, 412쪽.
506)H. B. 헐버트, 앞의 책, 534쪽.
507)H. N. 앨런, 앞의 책, 159쪽.
508)F. 매켄지, 앞의 책, 190쪽.
509)F. 매켄지, 신복룡 역주, 『한국의 독립운동』, 집문당, 1999,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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