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6장 일제와 서양인이 본 식민지 조선

4. 일제 강점기 일제와 서양인의 조선 인식

한말 시기까지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서양인의 기행문이 서구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모습을 소개하는 것에 주력하였다면, 일제 강점기는 이미 조선에 관한 많은 정보가 서양에 알려져 있었다. 나아가 1910년 일제가 식민지로 삼자 조선에 관한 사정은 서구 열강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식민지 지배자인 일본은 외국어로 된 조선 관련 내용을 서양 세계에 배포, 선전함으로써 조선에 관한 정보 전달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였다면, 여기에서 살펴볼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의 기록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조선의 민족 운동을 높게 평가하거나, 조선인의 활동을 서구 사회에 전달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서양인이 조선을 바라보는 스테레오 타입의 논의는 지속되었다.

조선에 관해 기술할 때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매혹적인 부제를 붙여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일이다. 그것은 늘 그래 왔으며 적어도 일본과 만주를 여행하는 도중에 잠시나마 조선의 수도에 체류하면서 기차로 그 나라의 각지를 여행하였던 사람들이 이미 이를 입증하였다. 흥 미로운 선택에 의하였든 아니면 환상적인 사건에 의한 것이었든 간에 상투를 튼 무리들과 함께 살아 본 적이 있는 마음 약한 백인들에게는 이 호칭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조선이라는 토착어의 공인된 명칭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 상징성과 반어(反語)를 부각시키기 위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수사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510)

‘조용한 아침의 나라’인 조선에게 일본의 식민지화는 민족적으로 큰 시련이었다. 1910년의 병합에 관해서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사실보다 조선을 ‘문명화’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병합에 관해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은 “병합은 한국에 대한 평화와 질서, 진보를 가장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인 만큼 한국인들도 당연히 문명상의 일대 사실로서 이를 기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511) 서술하였다.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도 “한국인이 일본인이 되는 것은 한국인을 위해 행복한 일이다. 대체로 한국에서 일본의 행동은 문명을 의미하며, 따라서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병합을 기뻐해야 할 사람은 누구보다 한국인이었다.”라고512) 강조하였다.

<병합>   
1910년 9월에 『도쿄 퍽(東京パック)』이란 잡지의 표지 그림이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을 기념하는 내용이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바위를 열어 태양의 여신이 ‘광명’을 조선인에게 비추도록 하고 있다. 우렁차게 울고 있는 닭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병합’은 왜소하고 초라한 조선인에게 문명의 세례를 준 것이라고 묘사하였다.

한말 시기부터 일본은 조선을 ‘발전’시킨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조선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이전 시기처럼 ‘문명 대 야만’의 구도를 설정할 수 없었다. 즉, 권력 주체인 일본은 계속해서 조선인을 ‘미개’로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인의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하려고 ‘민족 성’을 바탕으로 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에 대해 ‘빈곤’, ‘불결’, ‘나태’, ‘교활’ 등의 용어로 규정하고, 이를 조선인의 민족성이라고 강조하였다. 반면 이에 대비되는 ‘청결’, ‘근면’ 등을 일본인 자신의 이미지로 전유하고자 하였다.513) 이러한 부정적인 조선인의 이미지는 ‘반도’라는 지형적인 요소에도 적용하였다.

<근역강산맹호기상도(槿域江山猛虎氣象圖)>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의 형상을 호랑이에 비유한 그림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형상이 서 있는 사람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야쓰 쇼에이 등 일본인 지리학자가 한반도를 토끼가 중국 대륙을 향하여 뛰어가는 모양에 비유하자 최남선은 호랑이가 대륙을 할퀴듯 달려드는 모양에 비유하였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 세력 사이의 각축 속에서 조선의 반도적 성격이 부각되었다. 189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조선은 일본의 ‘이익선(利益線)’이고 이를 보호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모리야마 시게노리(森山茂德)에 따르면 ‘보호’는 곧 간섭을 의미하였다.514) 즉,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길이 일본 제국주의가 발전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나아가 ‘반도’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은 조선인의 민족성 내지 국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켄들은 조선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하나의 ‘완충’ 국가로 모습이 이탈리아와 다소 닮았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에 동양이 잠든 혼수상태에서 깨어남에 따라서 이 작은 민족은 아시아의 패권을 다투는 투쟁에서 하나의 볼모가 되고 말았다.”라고 표현하였다.515) 일본은 조선에 유약하다는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한반도의 반도적 성격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일본인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矢津昌永)는 1902년 발행된 그의 『지리학 소품(地理學小品)』에서 한반도(韓半島)를 토끼로 묘사하였는데,516) 이러한 시도는 조선인 지식인 사회에서 많은 반발 내지 대응 논리를 낳았다.

최남선(崔南善)은 식민지화 과정에 있는 조선의 모습을 토끼로 묘사한 논리에 대항하여 한반도의 지리적 외곽선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지적하였 다. 잡지 『소년』을 통해 그는 한반도가 “맹호가 발을 들고 허우적거리면서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르는 듯 뛰는 듯 생기 있게 할퀴어 달려드는 모양”이라고 밝혔다.517) 토끼라는 유약한 이미지로 조선과 조선인을 규정하고자 한 일본 측과는 정반대로 최남선은 ‘생기 있는 호랑이’라는 이미지로 일본인의 논리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서양인과 대비되는 조선인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의 논의는 지속되었다. 1911년 런던에서 출판된 와그너의 글에서도 미신으로 인한 조선인의 ‘비과학적’인 의료 활동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한국인들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하는 일들은 여러분에게 소개하기조차도 끔찍하다. 예를 들면 호랑이 뼈로 만든 만병통치약…… 곰쓸개로 만든 환약, 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잎이나 뿌리 등과 같은 것으로서 별로 해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뱀탕이나 지네 분말 등과 같은 매우 극단적인 치료제들은 때로는 사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518)

한말 시기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에 관한 평가는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 후반 조선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드레이크는 “조선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독단적이고 모순에 차 있었다.”라고 보았다.519) 하지만 조선인에게 애정을 가진 서양인은 조선인의 천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발전 가능성에 기대감을 피력하였다. 조선에 와서 호수돈 여학교 교장을 지낸 와그너의 경우 “한국인들의 마음은 본래 밝고 민감하여 정신 훈련을 좋아한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학생들이 된다. …… 일본인들은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지능이 높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주목을 받는데, 동일한 기회와 동기가 주어지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모든 면에서 일본인과 동등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라고 주장하였다.520)

<민속 조사>   
조선 총독부 촉탁(囑託)으로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窖)가 찍은 사진이다. 인종을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등으로 구별하고, 인종에 관해 야만과 문명의 대비 속에서 서열화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인종학’의 특징이었다. 이러한 서구의 방법론을 모방한 일본인 관학자(官學者)들은 조선인의 외형에 관한 사진 자료를 많이 남겼다. 가슴에 번호판을 단 조선 여성들이 민속 조사에 동원되었다.

아울러 ‘지능이 높은’ 조선인은 외국인의 눈에 외국어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였다.521) 그러나 일본인은 조선인의 언어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이 식민 지배를 받는 피식민자의 특성이라고 호도하였다. 그들은 조선인이 ‘수동적인’ 존재여서 자신들의 지배자뿐 아니라 외국의 지배자에게 지배받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외국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다고 왜곡하였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군 대장 가운데에서 임명하였는데, 초대 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맡았다. 1910년대는 ‘무단 통치기’로 불리는데, 이들은 군인인 헌병이 경찰 업무를 맡도록 하는 헌병 경찰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헌병 경찰은 치안뿐 아니라 사법, 행정 등에 관여하여 ‘위생 검열’의 명분으로 가정집의 부엌까지 감시하였다. 아울러 조선 총독부는 모든 정치 결사(結社)를 해체하고, 조선 총독부 기관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제외한 조선어로 발행되는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리고 조선인을 위압하기 위해 일반 관리나 교원에게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조선을 병합한 직후 조선 총독부는 민족 운동의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항일 애국 인사를 대거 체포, 구금하였다. 1911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던 안명근(安明根)을 체포한 것을 계기로 황해도 지방 애국 인사 16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을 ‘안악 사건’이라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을 모의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당시 가장 강력한 민족 운동 단체였던 신민회 회원 600여 명을 검거하여 고문을 자행하고, 그 가운데 105명을 기소하였다. 이 사건이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켄들은 자신의 책에서 1912년 11월 미국의 선교 기구 대표와 관계 인사들이 뉴욕에서 발행한 팸플릿을 재인용함으로써 한일 병합 직후에 발생하였던 ‘105인 사건’을 재차 서양인에게 알렸다. 이 글에서는 일제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을 시도하였다는 명목으로 조선인 활동가들을 구속 수감하였는데, 이는 조선인에게 ‘무서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조작되었음을 밝혔다.522) 매켄지 역시 ‘105인 사건’이 경찰의 고문과 조작에 의한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523) 이렇듯 무단 통치는 일본의 지배 정책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무단 통치’로 대표되는 지배 정책은 조선인의 민족적 감성 형성과 정치적 능력 배양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쳤다. 매켄지는 “총독의 체제 아래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정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파괴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사실상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막고, 일본인들의 오만한 우월감을 턱없이 가정하거나 과시해 보이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악을 배양함으로써 한국인을 교묘하게 저질화시켰다.”라고 하면서,524) 총독 정치를 비판하였다. 켄들 역시 “한국의 학생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란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에 대하여는 무지하도록 만들고, 일본 군사 독재의 발굽 아래 그들을 정신적으로 저급한 인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조직적인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바,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정당한 정치의 근본 원리에 무지하게 되고, 뒤를 이을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의 배출을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525) 일제의 식민 지배로 인해 조선인이 민주주의를 훈련할 기회를 박탈당하였다고 보았다.

<탑골 공원>   
탑골 공원은 1897년(고종 34)에 우리나라 최초로 만든 공원이다. 영국인 브라운(J.M.Brown)이 중종대 이후 빈터로 남아 있던 종로의 이곳을 공원으로 설계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무단 통치’ 기간 동안 일본에 저항하였던 다양한 작은 물줄기는 1919년 3·1 운동이라는 커다란 강물로 모이게 되었다. 일제와 일제의 선전에 속은 서양인은 “한국인은 열등 민족이어서 자치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존재”라고 이해하였다.526) 하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지배와 3·1 운동을 통해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서구인의 인상이 바뀌게 되었다. 3·1 운동은 민족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어 일제에 저항하여 독립을 찾고자 하였던 평화적 만세 시위였다.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군중 시위에 이어 평양, 의주, 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지방의 중소 도시와 농촌에까지 확산되었다. 5월 말까지 지속된 이 운동에는 전국 218개 군에서 200여만 명의 주민이 참여하였다.

거족적인 3·1 운동에 대해 일제는 외국의 선교사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매켄지는 이러한 일제의 주장에 반대하며 “한국인 은 한일 합방(合邦)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통신 수단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자신의 주장을 바깥 세계에 충분히 알릴 수가 없었다. …… 선교사들이나 그 밖의 우리들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독립운동의 진정한 뿌리는 한국인들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며, 밖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부당한 폭압 정치에 의해서 조장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527)

<3·1 운동 시위 장면>   
1919년 3월 서울 종로 거리에서 여성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3·1 운동은 조선 여성들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획기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메켄지는 이에 관해 “한국 사회의 모든 계층들이 단결되어 있다는 것이 곧 밝혀졌다. …… 지금은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남녀가 함께 단결하였고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합세하였다.”라고 서양에 알렸다.

한편 거족적인 3·1 운동에 놀란 일제는 군대, 헌병,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자를 ‘폭도’로 규정해 총칼을 사용하여 살육하고, 검거자를 고문하는 등 무자비한 방법으로 탄압하였다. 예를 들면 4월 15일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에서는 마을 주민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질러 타 죽게 하였다.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7,500여 명이 피살되고, 4만 60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1만 60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켄들은 서구인에게 3·1 운동의 실상을 전달하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본 경찰과 헌병이 ‘인도주의 정신과 문명에 거역하는 행위’인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528) 그는 수원 근처의 제암리에서 조선인 35명이 학살 당한 사건과 어린 소녀와 여학생이 체벌 및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 평화적인 시위자들에 대한 일본 군인과 경찰의 폭행 등을 폭로하였다. 그는 서구인에게 일제의 ‘잔혹성’에 관해 “독립운동을 진압한다는 미명 아래 모든 문명국의 법을 파기함으로써 일본의 군사 독재는 문명인의 존경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도 없이 증명하였다.”라고 강조하였다.529) 나아가 조선에 ‘애정’을 가진 서양인은 조선인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다른 서양인에게 당부하였다.

매켄지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어 “미국과 캐나다의 기독교인 여러분은 이 민족에 대해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다. 여러분이 보내고 지원해 준 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었고, 그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자유를 갈망하게 이끌어 주었다. …… 여러분의 민주주의적인 정부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힘을 여러분에게 주었으며, 여러분은 바로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여러분은 공공 집회나 도시 집회나 교회 집회를 열어 이 문제에 관해 여러분이 처해 있는 입장의 배후에 있는 단체의 압력을 동원하여 공식적인 성명서를 낼 수도 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감성을 여러분의 정부나 일본 정부에 알릴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이 잔혹한 불법 행위의 희생자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확대할 수도 있다.”라고 서양인에게 호소하였다.530) 3·1 운동은 이렇듯 조선에 ‘애정’을 지닌 서양인을 통해 조선인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떨쳐 일어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다른 서양인에게 알려졌다.

세계의 정치가들이 무기력하고 비겁하다고 꼬리표를 달아 주었던 한 민족이 이제 고도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억눌리며 도망 다니리라고 예상하였던 모든 것을 견디기 위해 부름 받았다. 그들이 감옥으로 끌려가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를 채우고 들어갔다. 그들이 잡혀가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만약 문명 세계의 요구가 일본으로 하여금 더 이상 만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설득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무서운 행렬에 참여하려고 기다리고 있을 정도이다. 세계가 애당초부터 한국인의 성품을 평가하면서 실수를 하였거나 아니면 이 국민들이 새로운 탄생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고 있다.531)

<경성 전경(1890년)>   
1890년에 남산에서 경복궁 쪽을 향하여 촬영한 한양 전경 사진이다.
<경성 전경(1921년)>   
1921년에 남산에서 조선 총독부 쪽을 향하여 촬영한 경성 전경 사진이다. 조선 총독부, 경성부 청사, 조선은행 등의 건물과 넓고 곧게 뻗은 대로가 등장하는 등 도시의 경관이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외형의 변화 뒤에는 식민지 ‘근대’의 실체가 은폐되어 있었다.

한편 일제의 식민 지배는 ‘문명’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일제의 정책을 지지하던 서양인의 시선에는 “경성(京城)은 20년 동안 과거와 같은 도시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너무 많이 변화하였다. …… 경성은 모든 분야 에서 발전해 왔고 전에는 심각하였던 가난과 궁핍도 최근에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532) 드레이크도 “일본은 도로, 철도, 우편과 전신 서비스, 그리고 공중위생(公衆衛生) 설비를 만들었고 전기 가설의 대중화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든 되지 않든 간에 그들은 지금 거기에 존재한다. 일본은 가장 우수한 품종의 닭을 대대적으로 곳곳에 보급해 왔기 때문에 조선의 달걀은 더 이상 빈약하지 않으며 품질과 크기에서 모두 만족스러워 부화시켜 고기를 얻을 만하였다.”라고 하여 일본에 의한 ‘발전’을 주목하였다.533)

<신장하는 조선>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에 조선의 경제가 성장하였다고 선전하는 그림엽서이다. 원 모양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1911년과 엽서가 발행된 해인 1933년의 수치를 대비하여 제시하였다. 위로부터 농업, 공업, 우편, 전신, 전화, 철도, 무역 등 각 부분의 ‘양적 성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외형만의 변화에 불과하였다. 켄들의 시각에서는 “한국을 우연히 찾아오는 여행자들에게는 일본의 업적, 물질적 진보, 그리고 서울에 세워진 훌륭한 정부 박물관 등 한국의 아름다운 측면만을 보여 주었다. 일본인이 저지르는 합법화된 강도, 상해, 협박, 공창제(公娼制)의 도입, 감옥 안에서 벌어지는 고문, 명분 없는 탄압 그리고 불법 행위 등 이러한 비리는 눈에 띄지 않게 은폐된”534) 것이 식민지 ‘근대’의 실체였다. 이러한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공간이 바로 경성이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한양은 경성으로 불렸으며, 한말 시기에 비해 외면상으로 ‘발전’한 곳이었다. 다른 서구 식민지의 동남아시아 도시에 비해 경성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비율은 높았다. 그 이유는 일본과 거리상으로 가까웠으며 벼농사와 공업 등의 영역에서 일본과 비슷한 경제 구조가 만 들어졌기 때문이다. 경성에는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다. 한일 병합 직후인 1911년 6월의 조사를 보면 일본인 1만 7281명 가운데 관공서에 근무하는 공무원이 3,427명, 군인 군속이 58명이었다. 이에 비해 상점원이 1,478명, 남의집살이 하는 사람이 1,055명, 고용인이 683명, 직공이 609명, 기생이 515명, 일용직이 496명, 노동자가 290명이었다.535) 경성에는 청계천을 기준으로 조선인 거주지 북촌(北村)과 일본인 거주지 남촌(南村)으로 나뉘었다. 조선인 거주 지역은 동(洞)으로, 일본인 거주 지역은 정(町)으로 불렸는데, 당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본정(本町, 혼마치), 황금정(黃金町, 고가네마치)은 오늘날 명동, 충무로, 을지로 일대에 해당한다.

<표> 경성 거주 조선인과 일본인 관련 통계(1935년)
구분 일본인(A) 조선인과 외국인 총인구(B) A/B×100
정(町) 지역 99,689명 94,224명 193,913명 51.4%
동(洞) 지역 13,632명 196,657명 210,289명 6.5%
합계 113,321명 290,881명 404,202명 28.0%
✽하시야 히로시, 김제정 옮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 모티브, 2005, 79쪽.

일본에 의한 식민지 상황은 경성이라는 도시의 외관을 바꾸었다. 1909년에 이미 일제가 궁내에 동물원을 개설함으로써 개방된 창경궁(昌慶宮)은 1911년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벚나무를 옮겨 와 매년 봄 ‘밤 벚꽃 놀이’가 열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중반에 광화문(光化門)을 헐고 경복궁(景福宮)을 가로막은 채 들어선 조선 총독부 건물을 비롯하여 근대적 건물이 경성 곳곳에 생겨났다. 아울러 이들은 남산에 조선 신사(朝鮮神社)를 세워 경성의 모습을 일본 제국주의의 ‘영광’의 기록으로 삼고자 하였다.

한편 전차와 전신, 전화 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하였다고 주장하는 상징물과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편의 시설은 경성 인구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일본인을 위한 것으로 정류장의 이름이 일본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전보도 일본어만 사용할 수 있었고, 전화 교환원도 일본어만 사용하였다. 이렇듯 일본인이 주장한 ‘진보’의 중요한 지표인 도시의 외형 변화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조선 신사 입구>   
1926년경에 촬영한 조선 신사의 입구 사진이다. 당시 남산에 있던 조선 신사에서는 일본의 태양신과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제는 경성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에다가 신사의 자리를 잡아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조선 신사 전경(1926년경)>   

조선인의 독립운동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인에게 조선은 점차 중국과 일본에 비해 잊혀진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의 상황을 재차 서양에 알린 것이 한국인 민족 운동가의 삶을 기록한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었다. 웨일스는 1930년대 중반 중국 혁명에 참여한 홍군(紅軍) 장군들에 관한 전기를 쓰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延安)을 방문하였다. 이곳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김산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조선인 혁명가 장지락(張志樂)을 만나게 되었다. 김산은 1905년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15세의 나이에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식자공(植字工)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뒤 사회주의를 수용하여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였다. 김산과 웨일스가 만난 1937년 여름, 김산을 통해 조선의 사정을 들으면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민족 해방을 위한 조선인의 피나는 노력을 확인하고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자 하였다. 그녀는 조선인에 관해 “비교적 아름답고, 총명하며, 우수 해 보이는 민족이 외형상 확실히 두드러진 점이 없는 조그마한 일본인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걸맞지 않는 느낌이 든다.”라고 하여 조선인에 관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536) 웨일스가 김산을 통해 재인식한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인상은 다음과 같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은 극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다. …… 비 온 후의 신선함과 푸르름이 느껴지는 나라이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일본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 축소판이 아니라 더욱 확대된 느낌이다. …… 냇가에서는 언제나 부인네와 처녀들이 무명옷을 눈처럼 희게 빨고 있다. 이상주의자와 순교자의 민족이 아니라면 이처럼 눈부시도록 깨끗한 청결을 위하여 그토록 힘든 노동을 감내하지는 않으리라. 일본은 화려하기는 하지만 그림엽서류의 디자인처럼 약간은 인공적이다. 반면에 한국은 순수하고 자연적이다. ……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한국인이 극동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단정하였다. 키가 크고, 강인하고, 힘이 세며, 항상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뛰어난 운동 선수들을 배출하고 있다.537)

웨일스의 이 글은 식민지 조선과 조선인에 관한 서양인의 서술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켄들과 매켄지의 노력으로 3·1 운동은 전 민족적 평화 시위였음이 알려졌지만, 이들은 조선인에게 ‘폭력’의 사용을 자제하기를 당부하였다. 그렇지만 웨일스를 통해 식민지 백성이 무력 항쟁을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서양에 알려졌다.

김산은 3·1 운동에 대해 “한국은 평화를 원하였으며, 그래서 평화를 얻었다. 저 ‘평화적 시위’가 피를 뿌리며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난 이후에 …… 한국은 멍청하게도 세계열강을 향하여 ‘국제 정의’의 실현과 ‘민족 자결주의’의 약속 이행을 애원하고 있는 바보 같은 늙은이였다. 결국 우리는 그 어리석음에 배반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한국 땅에 태어나서 수치 스럽게도 그와 같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나는 분개하였다. 노령(露領)과 시베리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모두가 싸우고 있었고, 또한 이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들은 치열한 투쟁이라는 권리를 행사하여 자유를 쟁취하였다. 나는 그곳에 가서 인간 해방의 비책을 배우고 싶었다.”라는 식민지 백성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였다.538) 이렇듯 웨일스의 책을 통해 조선인 내부의 변화상에 관한 실상이 새롭게 서양인에게 전달되었다.

조선에 ‘애정’을 지닌 서양인은 일본이 서양에 선전해 왔던 “비겁하거나 복종받기 좋아하는” 조선인상과 전혀 다른 조선인의 목소리를 서양에 전달하고자 하였다. 켄들과 매켄지가 1910년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선 민족 운동가에 대한 탄압과 1919년 일제에 대한 전 민족적 항거인 3·1 운동을 서양에 알렸다. 아울러 3·1 운동 당시 평화적 시위에 대한 일제의 폭압적 탄압을 알려 양심적인 서양인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당부하였다. 한편 웨일스는 1930년대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사회주의자 김산의 삶을 서양에 알렸다. 켄들과 매켄지가 강조하였던 교육 등의 장기적인 준비 과정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입장과 달리, 김산은 조선의 독립을 평화적 방법으로 서구 열강에 호소하기보다는 무력 투쟁의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하였던 것에 차이점이 있었다. 이렇듯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의 방법론에는 차이가 있지만, 서양인의 저술 활동을 통해 조선인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치열한 활동이 서양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도 역사적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할 훌륭한 자료이다.

[필자] 류시현
510)H. B. 드레이크, 신복룡·장우영 역주, 『일제시대의 조선 생활상』, 집문당, 2000, 17쪽.
511)『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10년 8월 28일자.
512)『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10년 8월 26일자.
513)미즈노 나오키 외, 정선태 옮김, 『생활 속의 식민지주의』, 산처럼, 2007, 24쪽.
514)모리야마 시게노리, 김세민 옮김, 『근대 한일 관계사 연구』, 현음사, 1994, 23∼24쪽.
515)C. W. 켄들, 신복룡 역주,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 집문당, 1999, 21∼22쪽.
516)권정화, 『최남선의 초기 저술에서 나타나는 지리적 관심』, 『응용 지리』 13, 성신 여자 대학교 한국 지리 연구소, 1990, 14쪽.
517)최남선, 「봉길이 지리 공부」, 『소년』 1-1, 1908, 67쪽.
518)E. C. 와그너, 신복룡 역주, 『한국의 아동 생활』, 집문당, 1999, 45∼46쪽.
519)H. B. 드레이크, 앞의 책, 145쪽.
520)E. C. 와그너, 신복룡 역주, 앞의 책, 53∼54쪽.
521)E. 키스·E. R. 스콧, 송영달 옮김,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책과 함께, 2006, 78쪽.
522)C. W. 켄들, 앞의 책, 114∼118쪽.
523)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89쪽.
524)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69쪽.
525)C. W. 켄들, 앞의 책, 30쪽. 매켄지도 식민지 상황은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을 동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민족성을 되살리는 데 성공하였다.”라고 이해하였다(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2쪽).
526)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271쪽.
527)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207쪽.
528)C. W. 켄들, 앞의 책, 50쪽.
529)C. W. 켄들, 앞의 책, 52쪽.
530)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269∼270쪽.
531)F. 매켄지, 『한국의 독립운동』, 11쪽.
532)S. 베리만, 신복룡·변영욱 역주, 『한국의 야생 동물지』, 집문당, 1999, 247쪽.
533)H. B. 드레이크, 앞의 책, 146쪽.
534)C. W. 켄들, 앞의 책, 27쪽.
535)하시야 히로시, 김제정 옮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다』, 모티브, 2005, 77쪽.
536)님 웨일스, 조우화 옮김, 『아리랑』, 동녘, 1984, 16쪽.
537)님 웨일스, 앞의 책, 14∼16쪽.
538)님 웨일스, 앞의 책, 28쪽. 김산은 테러리즘에 관해 “노예화된 민족만이 진정으로 실감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한 열망”이라고 표현하였다(님 웨일스, 앞의 책, 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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