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식 공연장과 음악의 변화된 향유 방식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음악을 향유하던 양상은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본래 전통 사회에서 음악을 향유하는 공간은 장르적 구별과 함께 신분적 구별짓기를 통해 나뉘어졌다. 예컨대 궁전의 정전에서 임금과 대신들에게 들려지던 궁중음악은 일반인들이 평생 들을 수 없던 음악이었다. 또한, 중인계층 이상의 선비들은 그들만의 풍류를 자신들의 풍류방이나 후원(後園)에서 현악영산회상이나 가곡 등을 향유하며 발전시켰다. 그런가 하면 서민들의 음악은 장터나 움집에서 연주되었다. 한 예로 19세기 후반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였던 잡가는 평민들이 즐기던 도시의 서민 음악으로서 공청(公廳), 혹은 ‘깊은 사랑’이라고 하는 반지하식 움집에서 향유된 일종의 ‘유행가’였다.
신분제가 해체되기 전까지만 해도 잡가와 가곡의 구별이 엄격하여 관기(기생)는 가곡만을 불렀고 잡가는 민간에서 평민 가객집단과 함께 노래하던 삼패라고 하는 창기들만 부르는 등 신분과 계층, 공간에 따른 장르의 구별이 엄격하였고 서로 공유되지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신분제가 제도적으로 폐기되고 근대식 극장과 방송, 음반 등 각종 대중매체가 증가하면서 전통사회의 장르 구별법은 퇴조하게 되었다. 근대식 극장을 비롯한 공공 장소와 매체를 통해 잡가와 가곡이 함께 불리고 궁중 정재와 민속악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등 변화가 생겨났다.
전통음악이 근대식 공간으로 가장 먼저 진입하게 된 통로는 각종 근대식 극장이었다. 1902년 최초의 관립극장인 협률사가 개관한 이후 1907년에는 사설 극장으로 장안사, 연흥사, 단성사 등이 설립되고 각 극장에 소속된 종합예술단의 활동이 활성화된 것이다.204) 협 률사는 1902년에 개관하여 1908년 원각사로 개장한 후 1914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국가가 재정 충당을 목적으로 민속악 출신 중심으로 최초로 조직한 종합예술단이자 관립극장이었다.
여기에는 가기 20명과 창부 김창환 등 제 1급의 명창·명인 등 40명이 전속으로 활동하였고 공연 종목으로는 창장무, 검무, 포구락 등의 궁중정재와 승무, 살풀이, 판소리, 창극, 산조, 풍물, 무동타기 등 궁중음악, 정악, 민속악 등을 두루 망라하는 것이었다.205)
한편, 민간에서 1930년대까지 전통연희를 위한 공연장 구실을 담당하였던 공간은 광무대였다. 광무대에서 배출된 박춘재(朴春載, 1881∼1948)는 전통 예인이 근대적인 대중스타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춘재는 시조·잡가·선소리·재담 등에 능한 당대 최고의 경서도 명창으로서 1900년에 궁내부 가무별감으로 임명되어 어전에서 공연을 하며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일종의 국민가수였다.206)
박춘재의 명성은 공연장 광무대를 중심으로 쌓아진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광무대 박춘재 소리>라는 이름을 단 잡가집이 여럿 간행될 만큼 경기소리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다. 박춘 재 외에도 김창환, 송만갑 등 남자 명창들과 김옥엽, 홍도와 같은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도 당시 인기 연예인과 같이 경서도 소리와 남도 잡가 및 창극조의 음악을 부르며 광무대에서 활동하였다.
광무대 외에도 장안사·연흥사 등에서의 공연 종목은 남사당패의 땅재주, 민간무용, 민요, 판소리 등으로 대동소이 하였다. 특히, 장안사의 경우 송만갑과 김창룡 등의 판소리 명창 등이 연일 인기를 끌면서 관객이 몰렸다. 비록 경영난으로 7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존속하였던 장안사에는 판소리 명창뿐만 아니라 기생과 평양 날탕패 등의 선소리꾼들도 공연에 참가하였다. 지금은 영화관으로 더 잘 알려진 단성사 역시 1914년 극장의 외부를 서구식으로 바꾸고 내부를 일본식으로 바꾼 신축 기념공연에서 각종 궁중정재와 민간무용이 올려졌는데, 광교조합 소속의 기생들이 출연하였다.
이렇듯 근대식 공연장이 등장한 이후 각 지방에서 활동하던 명인·명창들이 서울로 대거 진출하게 되고, 극장에 소속된 종합예술 단은 전통예술이 근대적인 문화환경 속에 적응하는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음악, 무용, 극(창극과 탈패)을 종합하고 궁중정재, 민요, 판소리, 민속춤, 남사당패놀이, 잡가 등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상설공연이 시작되면서 이제 궁중과 양반들의 풍류 공간에서 즐기던 음악과 무용이 평민이 즐기던 음악 및 무용과 함께 공공의 무대에 같이 올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음악과 무용을 감상하는 청중들도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서 불특정 다수의 근대적 시민으로 그 주체가 바뀌었다. 또한, 이렇게 극장을 중심으로 전통 예술 공연이 공공의 시민들에게 향유되고 민속악의 새로운 수요가 생기게 된 이유로 또 다른 창조의 원동력이 되었다. 판소리에서 창극이 탄생하고 각 지역의 향토민요가 대중가요의 하나인 신민요나 신속요로 재탄생되어 대중매체를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