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세계화
국악을 세계화해야 한다는 당위 역시 오늘날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 실상 세계화의 궁극적 의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화 작업의 모습과는 좀 다른 듯하다. 국악을 세계에 알리고 세계 시장에서 국악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것이 현재 국악 세계화의 방향이지만, 이 때 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가 아니라 미국과 유럽이다. 미국과 유럽이 지배하는 음악산업의 시장에서 국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필요한 작업이긴 하지만 주류 음악 자본이 집중되어 있는 ‘판’에 얼굴을 알리려는 이런 모습을 국악의 세계화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국악이 세계화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판소리와 산조를 배우기 위해서 세계 도처에서 음악가들이 서울을 찾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국악춘추사나 서울음반의 국악음반이 미국과 유럽의 음반산업 유통구조가 아닌 자신들의 유통망을 타고 전 세계로 팔려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늘날 영어를 배우기 위해 세계 도처에서 영어권 국가로 단기 유학을 가거나 클래식 음반이 대형 음반자본의 힘에 의해 세계 여러 나라로 팔리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세계화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세계화는 단지 음악만의 힘으로 결코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정치·경제·군사력이 세계를 지배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결코 음악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영어나 클래식 음악이 오늘날처럼 ‘세계화’된 것은 그 언어와 음악의 힘이 아니라 제국주의 시대 서구의 힘의 팽창에 기인한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정치·경제·군사력이 과거 영국이나 미국처럼 세계를 지배할 수 있으면 지금처럼 국악의 세계화를 애써 부르짖지 않아도 세계화는 가능하다.
오히려 현재의 세계화 지향은 다분히 식민성의 표출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상품시장에 상당 부분 종속되어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미국과 유럽의 상품시장을 뚫기 위한 노력은 결국 그들 지배구조의 하위에 포섭되기 위한 노력일 수 있다. 특히, 세계화를 한다는 주장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음악 작업의 실질적인 모습은 더더욱 그렇다. 세계화의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작업은 전통음악의 아주 일부 요소를 가지고 미국과 유럽인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유성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메이저 상품시장이 원하는 음악으로 변모시켜야만 그 유통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문화적·경제적 종속의 또 다른 모습이며, 이는 현재 세계화 작업이란 식민성 표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른바 국악을 월드뮤직화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같은 맥락이다. 획일화되어 있는 주류 음악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월드뮤직을 상정하지만 사실 이 역시 미국과 유럽의 주류 음악문화를 중심에 두고 상정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음악이 아닌 세계 여러 곳의 음악에 가치부여를 한 것처럼 월드뮤직이 홍보되었지만, 이는 음반 기획사의 마케팅 전략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월드뮤직의 시장 역시 미국과 유럽이며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 또한 미국과 유럽의 산업 자본이다. 전통음악에 ‘현대적인’ 여러 요소를 가미한 음악이라 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월드뮤직 음반들은 상품화를 위해서 미국과 유럽의 취향을 따를 수밖에 없고, 이 때 ‘현대적’이란 말은 ‘서구적’이란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구미 음악산업을 위한 상품으로서의 월드뮤직은 그것의 비서구 음악에 대한 가치부여가 이미 상업적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고, 현실적 시장구조 역시 기존 주류 음악시장의 유통구조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국악의 월드뮤직화 역시 미국과 유럽 음반자본의 마케팅에 말려든 또 다른 식민성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국악계뿐만 아니라 대중음악의 시각이나 문화산업의 맥락에서 국악의 향후 지향점으로 월드뮤직화를 말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마치 현재는 월드뮤직만이 국악의 생존을 위한 출구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자칫 빠질 수 있는 식민성의 문제는 미처 각인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