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하이브리드
국악작곡의 결과물은 통상 창작국악이라고 불린다. 이는 창작된 국악이라는 말로 다시 말하면, 국악 작곡은 국악을 창작하는 행위이다. 이 말은 국악작곡의 결과물은 국악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국악작곡은 국악을 창작하지 않는다. 소위 국악작곡은 국악의 요소를 활용해서 국악 이외의 요소와 결합한 ‘작곡’ 행위이다. 이 때 작곡은 전통적으로 국악을 만들어냈던 행위가 아니라 서구식 작곡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기존의 국악작곡은 국악과 국악 아닌 것의 이질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곡의 창조 방식이 서구식 작곡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국악을 만드는 행위와는 거리가 있다. 여기에는 반드시 국악이 아닌 요소가 들어가고, 반드시 서구 작곡 마인드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흔히 이런 방식의 음악 만들기는 ‘퓨전음악’ 혹은 ‘하이브리드음악’ 만들기라고 불리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국악계의 셈법으로는 국악작곡이라고 간주된다.
이질적 요소들을 섞어 놓고 그것을 서구식 마인드와 방식으로 다시 정돈시켜놓은 결과물을 국악이라고 간주하는 사고방식은 지난 반세기 동안 국악의 서구화를 정당화시켜 주고 그것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서구식 요소가 지배하는 하이브리드음악’을 ‘국악’이라고 간주해왔으므로 모든 서구적 방식과 요소들이 마치 국악의 결과물인 것처럼 오해되어 온 것이다. 결과를 국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국악이 아닌 모든 행위들이 다 정당화되었다. 게다가 이런 작업을 국악작곡이라고 간주하다 보니, 정말로 전통적 양식으로 국악을 만드는 행위들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전통음악 어법 그 자체만으로 창작된 음악들은 창작국악이라고 여겨지지 도 않았다.
반면 서구식 하이브리드음악 만들기 작업은 대단히 엘리트적이고 권위적인 음악행위로 간주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악을 만드는 행위는 낡고 주목받지 못한 행위였고 서구식 작곡행위(국악이 부분적으로 개입된)는 대단히 바람직하고 엘리트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국악계에서 국악을 만드는 행위를 폄하하고 국악 아닌 것을 만드는 행위를 선망하였던 이런 황당한 관습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앞서 말하였듯이 개념상의 착각에 있다. 국악 아닌 것을 만드는 작업을 국악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창작 국악은 국악의 정체성 확보나 내적 역량 강화라는 취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창작국악이 활발해지고 양적으로 축적될수록 작품들 속에서 국악의 모습은 약화되어 갔다. 이전 시대에 비해 서양 음악을 듣는 귀로 들으면 음악적 완성도는 높아졌지만, 그 속에서 ‘핵심’으로서의 국악의 위치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그 속에서 국악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창작 국악의 활성화와 국악의 내적 역량 강화가 전혀 같은 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은 창작국악이라고 여태까지 생각해 왔던 음악이 실은 창작국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창작국악이 아니라 국악의 요소가 개입된 하이브리드음악이었으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곡가들은 국악을 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음악을 더 많은 노력을 해왔다. 따라서 국악의 미래가 창작에 있다고 많은 이들이 여겨왔지만, 이제는 국악의 미래가 현재 개념의 창작국악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길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하이브리드음악은 국악을 대중화한다는 명목 하에 대중음악적 요소와 습합이 매우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소위 ‘퓨전국악’ 혹은 ‘실험적 음악’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 감성에 호소 하는 다양한 형태의 혼종적 경향이 공연장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퓨전국악’이든 ‘실험적 음악’이든 상관 없이, 그것이 국악 대중화의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역시 또 다른 개념적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다. 하이브리드음악은 말 그대로 이질적 요소가 섞여 있는 음악이다. 국악과 비국악이 뒤섞인 음악이며, 그 안에서 국악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것을 통째로 국악이라고 여기는 관습은 개념적 오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퓨전국악’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이 국악의 범주에서 이해되고 있다.
사실 국악을 대중화한다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하이브리드의 역사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국악 대중화는 물론 필요하다. 그런데 국악 대중화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작업들은 주로 가벼운 하이브리드음악들이고, 상당 부분은 대중음악화된 음악들이다. 그런데 그런 음악들이 국악을 대중화시킨다는 것은 제대로 검증된 바가 없다. 국악을 대중화시킨다는 명목은 있지만, 그런 가벼운 음악들이 대중으로 하여금 국악 본연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지 실제로 확인된 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대중들은 그런 가벼운 음악에 서 머물러 있을 뿐 자연스럽게 국악의 심화된 공간으로 들어온 건 예외적인 현상에 가깝다. 물론 그런 음악들이 대중들에게 국악기에 대해서 친숙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일견 사실이지만, 거기까지일 뿐 대중들을 본격적인 국악으로 더 이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가벼운 음악들이 국악을 대중화시킨다는 것은 검증된 바 없는 막연한 기대이자, 가벼움을 지향하는 음악가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소위 대중적 감성에 호소하는 하이브리드음악들은 국악을 대중화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대중음악의 영역을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말하자면 대중음악을 더욱 대중화시키는 역할을 해왔지 국악을 대중화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상 현대화, 세계화, 혼종화의 세 가지 화두를 종합해 보면, 전통음악의 생존과 변형이라는 중차대한 문제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통음악만으로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자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전통음악만으로는 음악가들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개념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이런 화두들이 깊이 있는 반성이 되지 않은 채 현상적 지속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국악이 진정으로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이런 화두의 반성과 함께, 음악가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장의 논리에 대한 대응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