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1 예와 수신으로 정의된 몸03. 조선 사회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

노동하는 몸, 지식과 학문으로부터 배제되는 몸

『예기』는 남녀가 나이에 따라 배워야 할 일을 소개하였는데, 여성은 10살이 되면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여자의 일[女事]’을 배운다고 하였다.

여자는 열 살이 되면 규문 밖에 나가지 않는다. 여선생[姆]이 유순한 말씨와 온화한 얼굴 빛[婉娩]과 순종하는 것[聽從]을 가르치며, 삼과 모시로 길쌈을 하고, 누에를 쳐서 실을 뽑으며, 비단을 짜고 실을 만들어서 여자의 일을 배운다. 이리하여 의복을 제공하고, 제사에 참관하여 술, 식초, 제기, 침채(浸菜), 젓갈을 올려서 예로 서로 도와 제사를 지낸다.215)

여성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여자의 일’은 길쌈을 해 가족에게 옷을 제공하고, 음식을 만들어 제사지내는 일이었다. 음식과 의복 만드는 일은 간단히 줄여 ‘음식의복(飮食衣服)’ 혹은 ‘의식’, ‘복식(服食)’이라고 하였으며, 여성이 담당해야 하는 일이란 의미로, ‘부공(婦功)’216) 또는 여공(女功), ‘여공(女工)’이라고217) 불렀다. 여공으로서 음식 만드는 일은 제사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식사와 손님접대도 포함되었다.

결국 ‘음식의복’은 살아있는 가족의 의식을 책임지는 일이었으며, 죽은 조상의 제사 음식도 책임짐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일, 즉 가문을 살리는 일이었다. 조선 여훈서에서도 여공을 중요하게 다루었는데, 송시열은 “부인이 맡아 할 일은 의복과 음식 만드는 일밖에 없다.”고218) 단언을 하였다.

여공을 여성의 고유한 직분으로 규정한 반면, 독서와 학문을 남성의 본업(本業)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이덕무는 “부인으로서 바느질하고 길쌈하고 음식 마련할 줄을 모르면, 마치 장부로서 시서(詩書)와 육예(六藝)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219) 하여, 음식과 의복을 시서육예와220) 같이 평가되었다.

유교의 성별분업에서 주목할 점은 여성의 직분이 몸을 이용하는 노동인 반면, 남성의 직분은 머리를 사용하는 정신 세계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여성이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반면, 남성은 정신세계에 속한 자이며, 남성의 몸은 이러한 정신 세계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여공을 강조할 때 눈에 띠는 것은 남녀의 직분 구분을 넘어서 여성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주로 지식과 정치 참여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차단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글을 읽고 의리를 강론하는 것은 남자가 할 일이요, 부녀자는 질서에 따라 조석으로 의복·음식을 공양하는 일과 제사와 빈객을 받드는 절차가 있으니, 어느 사이에 서적을 읽을 수 있겠는가?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풍속은 중국과 달라서 무릇 문자의 공부란 힘을 쓰지 않으면 되지 않으니, 부녀자는 처음부터 유의할 것이 아니다. 『소학』과 『내훈』의 등속도 모두 남자가 익힐 일이니, 부녀자로서는 묵묵히 연구하여 그 논설만을 알고 일에 따라 훈계할 따름이다. 부녀자가 만약 누에치고 길쌈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먼저 시서(詩書)에 힘쓴다면 어찌 옳겠는가?221)

이익은 여성이 여공에만 힘쓰고 남성 영역인 시서를 넘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하나는 현실적인 이유로서 여공에 소요되는 노동 시간의 과다함을 들었다. 즉, 계절에 따라 조석으로 음식과 의복을 장만하고 봉제사와 접빈객에 충실하다 보면, 책 읽을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책을 읽기 위해 한자를 익히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여성의 직분을 다 하고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 포기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소학』과 『내훈』조차도 남자가 읽을 책으로 규정하였다. 그만큼 여성의 노동량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성의 지식 교육을 제한하는 또 다른 이유에는 다분히 정 치적인 판단이 깔려있다. “부녀자로서 고금의 역사를 통달하고 예의를 논설하는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몸소 실천하지 못하고 폐단만 많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언급은, 아래의 글과 연결시켜 읽을 때 그 뜻이 명확해진다.222)

『안씨가훈』에 말하기를 “부인은 집안에서 음식을 주관하는 지라, 오직 술·밥·의복의 예의를 일삼을 뿐이니, 나라에서는 정치에 간여시키지 말아야 하며, 집안에서는 집일을 주장하게 말아야 한다. 만일 총명하고 재주와 지혜(才智)가 있으며, 지식이 고금에 통달한 부인이라도 마땅히 남편을 보좌하여 부족한 점을 보충하도록 권유할 뿐이니, 절대로 암탉이 새벽에 울어(여자가 자기의 직분을 초월하여) 화(禍)를 초래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223)

여기서는 여성의 본업인 ‘음식 의복’이 남자의 집안 경영, 정치 참여와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여성이 총명함과 재지를 바탕으로 남편을 보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집안 경영과 정치 참여 같은 남성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은 화를 초래하는 일이라고 경계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재지와 지식의 사용을 여화론과 연계시켜 경계한 것으로서, 여성이 자신의 직분을 초월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게 되는 매개로서 ‘지적 재능’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히 여성의 지식 교육을 불온시하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여훈서들이 여공과 시서를 병렬로 대비시켜 ‘음식 의복’을 강조한 이유가 성별 직분 구별을 강조하기 위한 기법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식교육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풀이될 수 있다.

실제로 유교는 여성에게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강조하였지만, 학문을 남성의 영역으로 제한하고 여성에게 여공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교육을 부정하는 경향을 초래하였으며, 조선에 여성 교육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활용되고 있다.224)

<길쌈, 김홍도>   
베틀에 걸터앉아 베짜는 모습과 실에 풀먹이는 모습이다. 길쌈은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모든 과정을 말하며, 신분을 불문하고 여성이 담당하였다.[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음식 의복으로 지칭되는 여공은 가정이 유지되는데 필수적인 생산 노동으로서, 남성이 독서와 학문에 몰두하는 대신 가정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간 것은 여성이었다. 현실적으로 여성의 노동 능력은 가정 운영에서 매우 절대적인 요소였으며,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집의 경우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생존을 좌우하였다. 내외관과 본업 규정에 따라 가정 경제를 짊어졌던 여성에게 일부의 사대부들은 재산 관리 및 경영[治産] 능력까지 요구하였다.

권구(權矩, 1672∼1749)는 여성의 치산 능력이 가문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하였다.

사람의 집이 일어나고 패하기는 거의 가산(家産) 성패(成敗)에 있고, 가산 성패는 거의 부인에게 있으니, 세업(世業)을 보전치 못하여 기한곤궁(飢寒困窮)하여 사망에 이르는 자가 달리 그런 이도 있거니와 대강 부인의 치산 잘못하기로 이뤄짐이 많고, 적수(赤手)로 기가(起家)하여 양반의 몰골을 잃지 아니하는 자는 달리 그런 이도 있거니와 대강 부인의 치산 잘하기로 이룬 이가 많으니, 이런 고로 옛사람이 이르되 집이 가난하매 어진 아내를 생각한다 하니, 어찌 조심치 아니하리오.225)

가문의 성패와 흥망이 여성에게 달렸다는 발상은 유교의 기본적인 여성교육관으로서, 이 때 강조된 것은 주로 경순(敬順)과 같은 유교 덕목을 얼마나 충실히 구현하였는가 여부이다. 그런데 치산은 꼼꼼한 관리 능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정도의 재량을 필요로 하는 일로서, 순종 위주의 덕목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이다. 실질적인 가정 경영자로서 여성에게 근면함과 책임감은 물론, 지혜와 강인함, 통솔력과 경영 능력도 요구한 것이다.

성별 역할 분담에서 파생된 치산 능력에 대한 요구는 여성의 노동이 조선의 가부장제적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힘이었음을 의미한다. 조선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생계는 물론,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여공을 수신의 주요한 요소로 꼽은 것은 현실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 있다.

[필자] 김언순
215) 『禮記』 「內則」, “女子十年不出 姆敎婉娩聽從 執麻枲 治絲繭 織紝組紃 學女事 以共衣服 觀於祭祀 納酒漿籩豆葅醢 禮相助奠.” 이 내용은 『小學』 「入敎」편에 그대로 수록되었다.
216) 班昭, 『女誡』 「婦行第四」, “專心紡績 不好戲笑 潔齊酒食 以供賓客 是謂婦功” ; 『禮記』 「昏義」, “古者婦人先嫁三月……敎以婦德婦言婦容婦功.”
217) 宋若昭, 『女論語』 「學作婦行第四」, “凡爲女子 須學女工.” 女工은 女功이라고도 한다.
218) 송시열, 「의복음식하도리라」,『우암션계녀서』, “부인의 쇼임이 衣食밧게 업사니…….”
219) 이덕무, 김종권 역,『士小節』 「婦儀」 服食, 명륜당, 1985, p.224.
220) 詩書는 시경과 서경을 말하며, 六藝는 禮, 樂, 射, 御, 書, 數의 六學을 말한다.
221) 이익, 「婦女之敎」,『국역 성호사설』, 민족문화추진회, 1977, p.145.
222) 김언순, 앞의 글, 2005, p.143.
223) 『小學』 「嘉言」, “安氏家訓曰 婦主中饋 唯事酒食衣服之禮耳 國不可使預政 家不可使軒蠱 如有聰明才智識達古今 正當輔佐君子 勸其不足 必無牝鷄晨鳴 以致禍也.” 소혜왕후 『내훈』에도 소개되어 있다.
224) 김언순, 「개화기 여성교육에 內在된 유교적 여성관」, 『페미니즘연구』 10권 2호, 한국여성연구소, 2010.
225) 권구, 『내정편』 치산,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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