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03. 해방 후의 서단과 서예 동향

[필자] 이승연

구한말과 일제시기를 근대의 서예로 구분하고, 해방 이후를 현대의 서예로 일컫지만, 초기에 활동했던 서예가로는 오세창·김태석·민형식·김용진·안종원을 비롯한 원로 작가들과 선전 작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일제시기에 점차 줄어든 서예가들의 수가 해방 후에는 손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희박해져서 오세창과 김태석은 전서와 전각에서, 김용진은 전서와 문인화에서, 손재형은 예서·전서와 문인화에서, 김충현은 예서와 한글에서, 이철경은 한글에서 서단의 명맥을 이어가는 중간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현대 서단은 초기에는 반세기를 걸친 일제 탄압에 의한 민족문화의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정체상태에서 벗어나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는 서예에 대한 지속적인 표출이 진행되어 1960년대에는 관심이 점차 높아졌다. 이는 국전을 통한 전문서예가들의 등용문에 언론도 가세하여, 수상자를 크게 보도하는 관례에 따라 일반 시민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면서 서예 인구가 점차 늘어나게 된 것이다.

당시 서예가들은 일제시기에 관전을 통해 입지를 굳힌 일부 사대 부출신의 서예가와 해외유학파·지방 작가들에 의해 중심을 잡아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손재형(1903∼1981)·현중화(1907∼1997)·오제봉(吳濟峰, 1908∼1991)·김기승(1909∼2000)·유희강(1911∼1976)·송성용(宋成鏞, 1913∼1993)·이철경(1914∼1989)·최중길(崔重吉, 1914∼1979)·배길기(1917∼1999)·이기우(李基雨, 1921∼1993)·김충현(1921∼2006)·최정균(崔正均, 1924∼2001)·조수호(趙守鎬, 1924∼)·김응현(金膺顯, 1927∼2007) 등이 경향 각지에서 제자를 양성하여 1970년대 초부터는 점점 열기가 고조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이에 전문적인 서예가가 급속히 증가하여 수천 명에 이르렀으며, 또 서예서숙과 학원들은 우후죽순식으로 늘어났다. 심지어 교사·공무원·기업간부 등이 서예가로 전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서예 열기와 전문서예가의 증가는 다양한 서풍의 수용과 변용으로 이어져 개성있는 서체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근대에 유행하였던 청대 서예가들의 전서와 행·초서는 더욱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전서에서는 금석학의 영향으로 갑골문·금문(金文)·와당문·전폐문·전문(塼文)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해서에서는 북위서풍, 예서에서는 간백서(簡帛書), 행·초서에서는 청대의 개성서풍인 서위(徐渭, 1521∼1593)·왕탁(王鐸, 1592∼1652)·부산(傅山, 1607∼1684) 등의 서풍까지 다양하게 수용하여 작품화하였다.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외국문물과 사상·학문의 무절제한 수용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학에 대한 연구가 각계각층에서 이루어지면서 한국 서예에 대한 연구 또한 꾸준히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금석문을 법첩화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작품에 활용하게 되면서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론과 실기에서 같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는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실용주의 의식의 고조로 인하여 정적(靜的)인 정신활동의 서예는 점차 현대 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처지이다.

[필자] 이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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