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밀한 이심전심의 공간
한국 선종불교의 원류인 구산선문을 일본의 선종사찰처럼 하나의 배치형식으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폐사된 데다 존속하는 사찰들도 흥폐를 거듭해 오면서 창건 때 모습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기다가 조선 중기 이후로는 통불교가람이 됨으로써 여느 산지가람들과 뚜렷한 차이도 없어졌다. 다만, 태안사의 경우 고려 중기에 작성된 「태안사형지기」와 일본 선종사찰을 대조하고, 개산조 혜철의 사리부도가 들어선 위치 등을 참고로 교종계열 평지가람과의 차이를 어느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선종사찰은 12세기 말 중국에서 임제선종과 함께 건축양식도 수입하면서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도 교종사찰과 별도로 선종사찰이란 하나의 배치형식으로 분류한다. 가람을 구성하는 건물도 달라서, 교종사찰 7당이 오중탑·금당·강당·종루 ·경루·대문·중문 등인 반면, 선종사찰 7당은 불전·법당·승당·고리·삼문·욕실·서정 등으로 확연히 다르다. 여기서 교종사찰 7당은 한국에서의 평지 1탑식 가람의 건물들과 거의 같다. 반면, 선종사찰 7당은 조선시대의 산지가람의 건물들과 흡사하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태안사형지기」에 실린 금당·식당·선법당·사문·측간 등은 일본 선종사찰의 불전·고리·법당 삼문·서정 등과 같은 건물들이다. 그 무렵 구산선문의 배치형식이 일본 선종사찰의 그것과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켄닌지(建仁寺)는 1200년에 건립된 최초의 선종사찰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중문 → 삼문 → 불전 → 법당 순으로 남북 중심축상에 일렬로 서고, 회랑이 삼문에서 시작해서 장방형 일곽을 둘러싼다. 일곽 밖에는 방장이 위치하고 탑은 후방 산록에 위치하지만 없는 경우도 많다. 중심 일곽의 배치는 중문 → 탑 → 금당 → 강당 순의 평지가람과 어느 정도는 비슷하고 정형성도 유지된다. 그러나 강당이 없고, 탑을 비롯해서 많은 건물들이 회랑 밖에 일정한 원칙없이 자유롭게 배치된다. 이것이 아스카시대 백제양칠 당가람들과 다른 점이다.
창건 때의 태안사가 일본 켄닌지와 비슷한 배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태안사의 대지는 회랑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평탄지가 아니라 경사지를 계단식 밭처럼 여러 층단으로 조성한 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사굴산문의 종풍을 이은 송광사의 경우 고려 중기에 작성된 「수선사형지기」에는 일본 선종사찰 7당과 같은 성격의 건물들이 기록된다.
또한, 일주문(삼문) → 천왕문(중문) → 대웅전(불전) → 설법전(법당) → 하사당(방장) 순의 배치는 일본 켄닌지의 삼문 → 불전 → 법당 → 방장 순의 배치와 흡사하다. 주불전이 최상단에 자리 잡고 주불전 앞 중정 누각이 법당으로 사용되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산지가람과 달리 구산선문이나 그 전통을 이은 송광사에서는 불전 후방의 최상단에 법당과 방장이 자리 잡았다. 설법전, 즉 상근기를 대상으로 선지(禪旨)를 전하는 공간인 법당과 함께 방장, 개산조 사리부도 등이 선원 구역을 형성한다. 이처럼 한국이나 일본 선종사찰은 최상단의 선원 구역이 가장 높은 히에로파니를 가지며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건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선을 위주로 엄정한 정형적 규범과 형식을 무시하는 선종불교의 형식타파적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흔히 교종이 부처의 말씀으로 병마다 약을 주는 응병여약(應病與藥)의 교시라면 선종은 깨달은 자들 간에 밀밀한 절대반야(絶對般若)의 전심이라 했다. 교종이 대중을 넓고 평등하게 상대하는 전도설교적인 귀의종교인 데 반해서 선종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비종교성도 드러냈다. 특히, 초기 선종은 불상이나 경전에 대한 인습적 신앙심조차 깨달음에 방해된다고 보는 우상타파적 행위도 서슴치 않았다. 불전·탑·회랑 등으로 형성되는 정형적인 예불공간보다 조사선(祖師禪)과 수행공간을 더 중시했다. 여기다가 산간의 지형조건은 형식타파적인 입장과도 잘 부합했을 것이다.
태안사의 건물들은 모두 6·25전쟁 후에 지어졌다. 그러나 844년(문성왕 6)에 건립된 개산조 혜철의 사리부도가 남아 있는 등 창건 때의 가람터나 지형은 예전 그대로이다. 일주문에서 대웅전 앞 중정까지의 진입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그 중간에는 3∼4개의 계단식 평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넓은 평지가 공터로 남아 있다. 남북 중심축선에서 한쪽으로 치우친 곳의 중정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보제루가 마주보며, 좌우로는 각기 승방과 ㅁ자형 요사채인 해회당이 마주 선다. 회랑이 들어설 만한 조건이 아니어서 좌우대칭적인 구성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다. 조선 후기 일반적인 산지가람의 중정 일곽 구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정 가운데 있을 법한 탑은 없다. 문헌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대웅전 뒤쪽의 좁은 길을 거쳐 올라가면 최상단의 선원 구역에 이른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선원 구역은 좁은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여기에는 선원이란 이름의 건물 2동이 남아 있는데, 사찰에서는 이 구역이 창건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불전 상단에 선원 구역이 서는 것이 일반적인 산지가람과는 다른 구산선문의 특성이라 하겠다.
선원 구역과 함께 구산선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개산조 혜 철의 사리부도탑이다. 10여 척 높이의 축대를 쌓아서 조성한 최상단 대지에 담장을 두르고 배알문을 설치해서 이곳으로 통하게 했다. 선원 구역과 함께 개산조의 사리부도 일곽이 태안사가 선종사찰임을 나타낸다. 소실된 건물들을 감안해도 가람 전체의 배치형상은 잡연하고 자유롭다. 탑은 생략되고 중심축선은 여러 차례 굴절된다. 가람 일곽의 정형성은 건물을 배치하는 데 있어서 특별히 고려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최상단에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폐쇄적인 선원 구역과 개산조의 사리부도탑이 가람 내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취급했다.
사찰 초입에서 최상단까지 5개의 축대로 인해서 공간은 분절을 거듭한다. 급준한 계단과 담장, 좁은 문도 최상단의 선원 구역과 사리부도탑의 이세간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이러한 예는 선종불교의 중심지였던 송광사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