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입선의 수행원리
고려 때의 선종불교는 사굴산문의 전통을 이은 지눌에 의해서 크게 발전했다. 그 무렵 지눌이 속했던 융선의 남악은 순선의 북산과 달리 집권세력과 연계된 교종의 천태종이나 화엄종과 손잡기도 했다. 이러한 회통정신은 지눌에 의해서 조계선종이 융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주석했던 송광사가 이후 한국 불교의 주맥으로 자리 잡은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지눌은 교학에 대해서 배타적이었던 초기 선가들과 달리 화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선과 교의 융합을 주장했다. 그는 학인을 접화하는 3법문 중의 하나로서 화엄의 법계연기설을 뜻하는 원돈신해문을 기초로 삼는 등 선교일치에 입각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이념을 펼쳐 나갔다.
정혜쌍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수행체계로 나타났다. 초심학인에게 교학을 닦게 해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이제까지의 교학과정에서 익힌 뜻을 접어 두고 선방에 들어가서 활구선지를 깨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눌은 이를 위한 단계적 수행체계로 「간화결의론」에서 임제삼구를 빌어 체중현·구중현·현중현의 삼현문을 제시했다. 제1의 체중현문에서는 최초 낮은 근기로 들어와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음을 깨닫게 하고, 제2의 구중현문에서는 이러한 깨달았다는 생각마저 남지 않게 고집을 깨트리게 하며, 마지막 제3의 현중현문에서는 이마저도 뛰어 넘어야 하므로 활구를 참구함으로써 돈증토록 하는 것이었다.
지눌이 중국 임제선종의 법맥을 이어 받은 탓인지 그의 삼현문은 송대 청원유신의 법문 내용과 흡사했다. 즉, 처음 입문해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던 것이, 깨닫고 나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으나, 구극의 경지에 들고서는 산 역시 그 산이요 물 역시 그 물이더라는 깨침의 3단계가 그것이다. 이후 조선 불교의 주류는 임제선종의 법맥을 따르게 된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의 산지가람들이 이러한 수행체계를 반영해서 크게는 초입에서 최상단까지 3단 계의 점층적 공간구성을 보여준다. 사교입선이 가람의 공간구성원리로 작용한 것이다.
송광사는 이러한 사교입선의 원리를 공간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이다. 원래 이곳은 혜린이 창건한 화엄계열의 길상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던 자리였다. 1200년(희종 원년)에 지눌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대가람을 조성했다. 원래 산 이름인 송광산을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조계산으로 바꾸고, 사찰 이름은 수선결사의 의지를 담아서 수선사라 지었다. 이후 어느 때에 이르러 송광사로 이름이 바뀌고 조선 초기까지 승보사찰이란 명성을 얻었다. 지눌 이하 16국사를 연이어 배출한 데다 승려가 되려면 이 사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로 대중수가 많았고, 선교회통의 원리에 따른 수행체계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송광사는 지눌 때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지만, 1213년(강종 2)에 만든 지눌의 사리부도탑이 그 자리에 여전하고, 사찰 입구에는 그가 심었다는 고향수도 남아 있다. 1934년에 영인된 『조계산송광사사고』에는 「수선사형지기」를 비롯해서 다양한 문헌들이 실려 있고, 관련 연구도 많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서 선종사찰로 발전했을 무렵의 가람 면모를 어느 정도는 그려 볼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송광사의 건물을 조사해서 일종의 건물대장처럼 작성한 「수선사형지기」에는 금당·식당·선법당·경판당·조사당·원두채·목욕방·측가·곡식루채·사문·서문·병문 등 모두 26개의 건물이름과 좌향, 부재별 치수가 기록되어 있다. 앞서 「태안사 형지기」와 흡사한 내용으로 대부분 선종사찰을 구성하던 건물들이다.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오면서 많은 건물들이 없어지거나 새로 지어지고 건물 이름도 달라졌다. 그러나 일곽 최상단에 위치한 선원 구역과 지눌의 사리부도가 그대로여서 일곽의 중심은 고려 때와 거의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북쪽의 산록과 남서쪽의 계류에 의해서 서쪽을 바라보는 평탄한 정방형 대지는 고려 때부터 조성되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대지는 경사가 완만해서 종축상으로 3단의 평탄지가 조성되었지만 최상단을 제외하면 단차는 거의 없다. 중심축선상으로 우화각 → 천왕문 → 종각 → 중정 → 대웅전 → 진여문 → 설법전이 일렬로 서고, 각 단은 우화각 → 종각 → 진여문이 경계를 이룬다. 그래서 세 단의 평탄지에는 각기 초입에 흐르는 계류 위의 우화각에서 종각까지, 종각에서 대웅전까지, 그리고 대웅전 뒤편에 높은 축대를 쌓아서 선원 구역을 각기 형성했다.
하단의 주요 건물로는 침계루·임경당·법성료 등이 있다. 이 요사채들은 갓 출가한 행자승의 거처와 재가불자들의 숙소로 이용된 다. 이 밖에도 마구방, 걸인방 등 속인들을 위한 건물도 있다. 말하자면 하근기의 초심 공간이다. 중단에는 주불전인 대웅전을 비롯해서 영산전·약사전·관음전 등의 부불전이 중정을 둘러싸며, 탑은 원래부터 없었다. 중정 좌우로는 도성당·심검당·낙하당·발운요·원융요·해청당과 같은 요사채가 자리 잡았다. 이곳은 교학을 닦는 중근기 승려들을 위한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상단에는 수선사·설법전·국사전·상사당·하사당 및 지눌의 사리부도탑가 자리 잡았다. 이 상단은 조사선과 참선공간으로서 하, 중단과는 엄중히 분리된 탓에 사찰에서도 ‘별유상계(別有上界)’라 일컬어져 왔다.
이러한 세 단의 점층적 구성은 지눌이 제시한 삼현문의 수행단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지눌 때부터 초계의 사미과에서 기초적인 수행생활을 익히고, 이계의 사집과와 대교과에서 교리와 유심법문을 익힌 후, 마지막에는 경교의 뜻을 접어두고 선원으로 들어가서 활구를 참구토록 했다. 사교입선의 수행원리가 이러한 점층적인 3단 구성으로 구현된 것이다.
한편, 송광사에 전해지는 문헌에서 화엄의 원리를 집약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의 형상대로 가람을 꾸미고자 했던 의도도 발견된다. 이 도형은 의상이 화엄경의 내용을 210자로 간결하게 쓴 시를 54각의 정방형 속에 연결해서 만든 것이다. 한 글자씩 모두 서로 연결되어 시작과 끝이 없는 형상이다. 이 도형에 맞춰서 가람 일곽이 정방형 구도를 벗어나지 않게 하고, 도형 속의 구절을 따서 법성료·원융료·해청당 등으로 이름을 붙였다. 또한, 공루나 행랑으로 건물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비를 맞지 않고도 가람 전체를 다 닐 수 있게 했다고 한다. 송광사는 지눌이 제시한 사교입선의 수행체계와 화엄경의 교리에 따라 하나로 통합된 고도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대표적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