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06.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변화

고려 태조는 신라의 정책을 계승하여 불교를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았다. 그는 개경에 법왕사·자운사·내제석사·사나사·천선사 ·신흥사·문수사·원통사·지장사 등 10개의 큰 사찰들을 건립했다. 이 밖에도 왕실 인물이나 귀족들이 자신의 복을 빌기 위해서 원당사찰들도 많이 건립했는데, 개경에만 7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951년에 건립된 태조의 원당인 대봉은사를 비롯해서 광종의 어머니 유씨의 원당인 불일사, 1068년에 견훤과의 전투 때 목숨을 잃은 군사들의 명복을 빌기 위한 건립한 흥왕사 등이 있다.

<흥왕사지 배치도>   

이러한 사찰들은 모두 폐사된 탓에 발굴조사나 문헌을 통해서 대체적인 면모를 알 뿐이다. 흥왕사는 1056년(문종 10)에 착공해서 12년 뒤에 완공된 1금당 2탑식 가람으로 『고려사』에는 3천여 칸이 넘는 규모에 건물과 담장, 목탑 등은 궁궐보다 더 사치스럽다고 기 록된다. 광통보제사는 태조가 견훤과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지은 평지 2탑식 가람이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궁궐을 능가할 정도로 웅장하며 목조 5층탑의 높이가 2백 척에 달했다고 기록된다. 이 밖에도 문종 때 건립된 남원 만복사처럼 탑과 금당을 남북 중심축선상에 일렬로 세우지 않고 동서로 병렬시킨 동전서탑식 가람도 있었다.

<남원 만복사지>   

개경의 사찰들은 모두 교종계열로서 왕실이나 문벌 귀족들과 연계되어 있었다. 특히, 11세기 들어서 문벌 귀족층이 집권세력으로 자리 잡게 됨에 따라 불교계도 그 영향력에 좌우되었다. 대표적 종파로서 귀법사에 본산을 둔 화엄종은 왕실과, 그리고 현화사에 본산을 둔 법상종은 외척 인주 이씨 세력과 각각 연결되어서 서로 간에 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이 천태종을 열고 화엄의 입장에서 선을 포용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워 통합을 추진했지만, 선교일치로 진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의천 사후에 발생한 무신란은 귀족 중심의 불교를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기존의 왕실이나 문벌 귀족과 연결되어 있던 개경 중심의 교종계가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이는 평지가람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에 의해서 무신란이 발생하자 불교계를 장악하던 교종세력은 문신 귀족들과 합세해서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자 무신정권도 철저한 응징에 나섰다. 1174년(명종 6) 1월 귀법사 승려 1백여 명이 봉기하자 수십 명을 참살하고, 중광사·홍호사·용흥사·묘지사·복흥사 등으로 들어가서 가람을 불살랐다. 교종 사찰들의 저항은 최충헌 일가의 집권 이후에도 지방에까지 대소 규모로 전개되었다. 1202년(신종 5)에 운문산·부인사·동화사 등이 저항에 나섰고, 그 이듬해에는 부석사·부인사·쌍암사 등이 저항에 나섰다. 특히, 1217년(고종 4) 개경까지 침입한 거란군의 격퇴를 위해 동원된 흥왕사·홍원사·경복사·왕륜사·수리사 등 여러 사찰 승려들의 저항 때는 무려 8백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왕실과 문벌 귀족들과 연계되어 있던 교종 사찰의 몰락이 가속화되어 갔다.

무신정권에 대한 저항이 교종 사찰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과 달리 그 무렵의 선종사찰은 순수한 종교운동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펼쳤던 지눌이다. 그의 정혜쌍수 정신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무신정권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먼저 깨치고 난 후에 점차 닦아 나간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지는 기존 질서를 무력으로 전복시킨 무신정권에게 자기 합리화의 논리로 활용되었다. 이는 무신정권의 선종에 대한 비호로 나타났고, 결과적으로 선종이 불교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충헌 일가는 지눌이 주석하던 수선사, 즉 송광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적 이의민의 세력 기반이 경주였으므로 수선사를 중심으로 그를 견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특히, 최우는 두 아들 만종과 만전 형제를 지눌의 후계자인 혜심에게 출가시키고 자신도 수선사에 입사했다. 또 그 무렵 양남의 중심지였던 진주 일대를 수선사의 식읍으로 내려 주는 등 막대한 토지도 희사했다. 1207년(희종 3)에는 대장군 직책으로 「대승선종조계산수선사중창기」를 직접 쓰는 등 사찰 조영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신정권은 한국 불교의 주류가 선의 입장에서 교를 융합하는 산중승단 중심의 회통불교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 서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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