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07. 억불정책과 원당사찰

불교 정비와 금창사사지법(禁創寺社之法)

조선의 창업을 주도한 신흥세력은 억불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여러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사찰과 승려 수를 크게 줄이는 한편, 전답과 노비를 몰수해서 사찰 경제를 봉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고, 그나마 존속한 경우라도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로 크게 황폐화되었다. 특히, 옛 터에서의 중창을 제외하고는 사찰을 새로 짓는 일을 일체 금하는 금창사사지법의 제정으로 사찰 조영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추진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궁중에서 행해지던 모든 불사를 폐지하고 경외 70개 사찰 외에 모든 사찰의 토지세와 노비를 군자와 관청에 분속시켰다. 특히, 1406년 전국 사찰들을 통폐합해서 7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공인사찰로 인정했다. 이듬해에는 사찰 수를 더욱 줄여서 자복사(資福寺)란 이름의 88개 사찰로 크게 줄였다. 그것도 지난번에 엄청난 수의 사찰들을 없앤 데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종파별, 지역별로 안배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1408년에는 도첩법을 제정하고 왕사나 국사제도도 없애 버렸다.

<표> 1406년(세종 6) 4월 5일자 사찰 정비 내용
선종 18개 사찰
군현 사찰명 원속전(결) 가급전(결) 승려수(명)
경중 홍천사 160 90 120
유후사 숭효사 100 100 100
연복사 100 100 100
개성 관음굴 45 100 70
경기 양주 승가사 60 90 -
개경사 400 - 70
회암사 500 - 200
진관사 60 190 250
고양 대자암 153 94 70
충청 공주 계룡사 100 50 120
경상 진주 단속사 100 100 70
경주 기림사 100 50 70
전라 구례 화엄사 100 50 70
태인 흥룡사 80 70 70
강원 고성 유점사 205 95 150
원주 각림사 300 - 150
황해 은율 정곡사 60 90 70
함길 안변 석왕사 200 50 120
2,823 1,427 1,970
교종 18개 사찰
군현 사찰명 원속전(결) 가급전(결) 승려수(명)
경중 흥덕사 250 - 120
유후사 광명사 100 - 100
신암사 60 - 90
개성 감로사 40 160 100
경기 해풍 연경사 300 100 200
송림 영통사 200 - 100
장의사 200 50 120
양주 소요사 150 - 70
충청 보은 속리사 60 140 100
충주 보련사 80 70 70
경상 거제 견암사 50 100 70
합천 해인사 80 120 100
전라 창평 서봉사 60 90 70
전주 경복사 100 50 70
강원 회양 표훈사 210 90 150
황해 문화 월정사 210 100 100
해주 신광사 200 50 120
평안 평양 영명사 100 50 70
2,340 1,360 1,800

세종은 개인적으로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억불책을 펼쳤다. 1424년에 태종 때의 7개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사찰 수를 더욱 줄였다.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각기 통폐합해서 전국에 걸쳐 36개 사찰 만을 공인사찰로 인정하고 토지와 승려수도 더욱 감축시켰다.

<감은사지(1950년대)>   
폐사된 후 초가집들이 들어서 있다.

세종에 의한 불교정비조치로 남은 36개 사찰들도 상당수는 왕실의 원당사찰이었다. 선종의 흥천사·연복사·개경사·회암사·대자암·유점사·석왕사 및 교종의 흥덕사·연경사·표훈사 등은 태조 이래의 원당사찰로 지정된 덕분에 용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반면에 삼보사찰로서 대가람을 유지했던 통도사와 송광사를 비롯해서 선찰대본산으로 대가람을 유지했던 범어사 등의 큰 사찰들도 모두 누락되었다. 국초의 공인사찰에서 빠진 사찰들 중에서 그 무렵의 사찰 사정을 알게 하는 자료를 남긴 경우는 거의 없다. 1420년 경의 송광사는 16대 조사 고봉이 옮겨 왔을 때 크게 황폐된 상태였 고 다른 사찰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약 200여 년간 사찰 문헌조차 남기지 못했을 정도의 공백기였다. 창건 이래 대가람을 유지했던 사찰들이 공인사찰에서 제외됨으로써 급속하게 쇠락의 길로 걸어갔던 것이다.

[필자] 서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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