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정비와 금창사사지법(禁創寺社之法)
조선의 창업을 주도한 신흥세력은 억불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여러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사찰과 승려 수를 크게 줄이는 한편, 전답과 노비를 몰수해서 사찰 경제를 봉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많은 사찰들이 폐사되고, 그나마 존속한 경우라도 겨우 명맥만을 유지할 정도로 크게 황폐화되었다. 특히, 옛 터에서의 중창을 제외하고는 사찰을 새로 짓는 일을 일체 금하는 금창사사지법의 제정으로 사찰 조영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본격적인 억불정책은 태종 때부터 추진되었다. 그는 즉위 초부터 궁중에서 행해지던 모든 불사를 폐지하고 경외 70개 사찰 외에 모든 사찰의 토지세와 노비를 군자와 관청에 분속시켰다. 특히, 1406년 전국 사찰들을 통폐합해서 7개 종파의 242개 사찰만을 공인사찰로 인정했다. 이듬해에는 사찰 수를 더욱 줄여서 자복사(資福寺)란 이름의 88개 사찰로 크게 줄였다. 그것도 지난번에 엄청난 수의 사찰들을 없앤 데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 종파별, 지역별로 안배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1408년에는 도첩법을 제정하고 왕사나 국사제도도 없애 버렸다.
선종 18개 사찰 | |||||
도 | 군현 | 사찰명 | 원속전(결) | 가급전(결) | 승려수(명) |
경중 | 홍천사 | 160 | 90 | 120 | |
유후사 | 숭효사 | 100 | 100 | 100 | |
연복사 | 100 | 100 | 100 | ||
개성 | 관음굴 | 45 | 100 | 70 | |
경기 | 양주 | 승가사 | 60 | 90 | - |
개경사 | 400 | - | 70 | ||
회암사 | 500 | - | 200 | ||
진관사 | 60 | 190 | 250 | ||
고양 | 대자암 | 153 | 94 | 70 | |
충청 | 공주 | 계룡사 | 100 | 50 | 120 |
경상 | 진주 | 단속사 | 100 | 100 | 70 |
경주 | 기림사 | 100 | 50 | 70 | |
전라 | 구례 | 화엄사 | 100 | 50 | 70 |
태인 | 흥룡사 | 80 | 70 | 70 | |
강원 | 고성 | 유점사 | 205 | 95 | 150 |
원주 | 각림사 | 300 | - | 150 | |
황해 | 은율 | 정곡사 | 60 | 90 | 70 |
함길 | 안변 | 석왕사 | 200 | 50 | 120 |
계 | 2,823 | 1,427 | 1,970 | ||
교종 18개 사찰 | |||||
도 | 군현 | 사찰명 | 원속전(결) | 가급전(결) | 승려수(명) |
경중 | 흥덕사 | 250 | - | 120 | |
유후사 | 광명사 | 100 | - | 100 | |
신암사 | 60 | - | 90 | ||
개성 | 감로사 | 40 | 160 | 100 | |
경기 | 해풍 | 연경사 | 300 | 100 | 200 |
송림 | 영통사 | 200 | - | 100 | |
장의사 | 200 | 50 | 120 | ||
양주 | 소요사 | 150 | - | 70 | |
충청 | 보은 | 속리사 | 60 | 140 | 100 |
충주 | 보련사 | 80 | 70 | 70 | |
경상 | 거제 | 견암사 | 50 | 100 | 70 |
합천 | 해인사 | 80 | 120 | 100 | |
전라 | 창평 | 서봉사 | 60 | 90 | 70 |
전주 | 경복사 | 100 | 50 | 70 | |
강원 | 회양 | 표훈사 | 210 | 90 | 150 |
황해 | 문화 | 월정사 | 210 | 100 | 100 |
해주 | 신광사 | 200 | 50 | 120 | |
평안 | 평양 | 영명사 | 100 | 50 | 70 |
계 | 2,340 | 1,360 | 1,800 |
세종은 개인적으로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억불책을 펼쳤다. 1424년에 태종 때의 7개 종파를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하고 사찰 수를 더욱 줄였다.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각기 통폐합해서 전국에 걸쳐 36개 사찰 만을 공인사찰로 인정하고 토지와 승려수도 더욱 감축시켰다.
세종에 의한 불교정비조치로 남은 36개 사찰들도 상당수는 왕실의 원당사찰이었다. 선종의 흥천사·연복사·개경사·회암사·대자암·유점사·석왕사 및 교종의 흥덕사·연경사·표훈사 등은 태조 이래의 원당사찰로 지정된 덕분에 용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반면에 삼보사찰로서 대가람을 유지했던 통도사와 송광사를 비롯해서 선찰대본산으로 대가람을 유지했던 범어사 등의 큰 사찰들도 모두 누락되었다. 국초의 공인사찰에서 빠진 사찰들 중에서 그 무렵의 사찰 사정을 알게 하는 자료를 남긴 경우는 거의 없다. 1420년 경의 송광사는 16대 조사 고봉이 옮겨 왔을 때 크게 황폐된 상태였 고 다른 사찰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선 초기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약 200여 년간 사찰 문헌조차 남기지 못했을 정도의 공백기였다. 창건 이래 대가람을 유지했던 사찰들이 공인사찰에서 제외됨으로써 급속하게 쇠락의 길로 걸어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