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원으로 변해가는 가람
원각사가 들어섰던 자리는 지금의 종로 탑골공원 일곽이다. 원래 이곳에는 흥복사라는 사찰이 황폐한 상태로 있었다. 그 사찰 터와 부근의 민가들을 철거해서 대지를 조성했다. 세조는 민가 철거 현 장에 자주 행차해서 공사를 독려했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숙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보았다는 상스러운 사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왕위 찬탈과정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비는 일이 더욱 절실한 과제였다. 이에 원각사 건립의 뜻을 전하면서 강도 이외의 모든 죄수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다. 효령을 비롯한 여러 대군들, 영의정 신숙주, 상당부원군 한명회, 능성부원군 구치관 등등 당대의 세도가들이 조성도감의 도제조와 제조를 맡고, 육조판서 이하 대소 신료들이 저마다 감동과 낭관, 낭청 등의 역을 맡았다. 가히 궁궐 조성에 필적할 정도의 국가적 사업이었다.
지금 원각사 터에는 1467년(세조 13)에 만든 10층 석탑 외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발굴조사도 이뤄지지 않아서 도성 내의 최후의 국가원찰이 어떤 가람으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국가적 사업이었던 때문인지 『세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관찬사료에는 원각사 내용이 자주 보인다. 그 중에서도 김수온이 지은 대원각사비문의 내용을 통해 건물명칭과 배치형상을 소략하나마 추정할 수 있다.
원각사 조성공사는 부지 조성을 위한 기존 민가들의 철거를 시작으로 혹한기의 40여 일을 제외한 11개월 동안 4백여 칸의 건물을 완공하는 것이었다. 다시 2년 후의 사월 초파일에 13층 석탑 완공을 기념하여 연등회를 개최했다. 공사 시작에서 완공까지 3년여의 기간이 걸렸다. 이렇게 해서 완전한 평탄지에 조성된 원각사는 17세기 이래의 일반적인 배치형식인 산지 중정형 내지는 4동 중정형 산지가람의 선구적 배치형상이었음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평탄지임에도 회랑이 없이 남북 종축선상의 건물들은 해탈문 → 반야문 → 적광문 → 대광명전 → 해장전 순으로 이어진다. 주불전인 대광명전을 후방에 두고 그 전방과 좌우에 각기 적광문과 선당, 승방이 중정을 둘러싸도록 했다. 초입에서 가람 일곽으로 드는 진입로 상에는 해탈문 등의 삼문을 설치했다. 이런 것만 보면 영락없는 조선 후기의 산지가람 모습이다. 적광문 좌우에 장행랑을 설치해서 초입과 주불전 일곽을 구획한 것이 다른 점이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국초의 왕실 원당사찰이었던 봉은사·정인사·봉선사·상원사·낙산사 등에서도 공통적이다. 한참 뒤인 1790년(정조 14)에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의 조포사로 건립된 용주사의 가람배치와도 흡사하다. 봉은사는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정릉 능침사찰로 삼기 위해서 지금 위치로 이건되었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변개되기 전의 사진을 바탕으로 당시의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다. 낮은 산록 끝자락의 완만한 경사지를 3단으로 형성해서 건물을 지었다. 초입부터 남북 종축선상에는 해탈문 → 천왕문 → 만세루 → 진여문 → 중정 → 대웅전 순으로 배치된다. 대웅전의 전방과 좌·우측에 진여문과 심검당(선방), 운하당(승방)이 중정을 둘러 싸는데, 진여문의 좌·우로는 장행랑이 설치되어 각기 심검당·운하당과 연결된다. 특히, 진여문 앞에는 거의 연접하듯이 박공을 앞면으로 한 중층의 만세루가 위치한다. 원각사와는 규모나 화려함에서 차이가 나지만 초입의 진입로 상에 삼문을 설치하고, 대웅전 전방의 문루 좌우로 장행랑을 설치해서 중정의 내밀성을 높인 데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한편, 도성 내에 건립된 흥천사와 원각사 등은 급속히 쇠락해 갔다. 1398년(태조 6) 계비 강씨의 정릉 능침사찰로 장려하게 건립된 흥천사는 1510년(중종 5)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종을 숭례문에 거는 등 폐사로 방치되다가 어느 시점엔가 사라졌다. 1464년(세조 10)에 유생들의 거센 반대를 물리쳐가며 궁궐에 버금갈 정도로 장려한 가람으로 건립한 원각사도 퇴락을 거듭하다가 1504년(연산군 10)에는 기방으로 변한 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은 채 방치되었다. 1512년(중종 7)에 다시 화재가 발생하자 남은 건물을 철거해서 그 재목과 대지를 연산군 때 집이 헐린 사람들에게 나눠줌으로써 결국 도성 내의 원당사찰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도성 내의 평탄지에 조성된 원각사 등은 고려 때까지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평지 1탑식 또는 평지 2탑식 가람들과는 그 성격이 확연히 달라졌다. 종전의 평지가람은 그 자체가 예배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형적인 공간 내에는 불상과 부처의 진신사리, 그리고 불경으로서의 법사리를 봉안하는 금당·탑·강당·경루 등이 자리 잡았다. 승려들이나 신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히에로파니를 지닌다. 가람 일곽은 승려와 신도들로 하여금 종교적 신앙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예배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반면에 조선 전기의 원당사찰들은 평탄지에 자리 잡았지만 사방을 둘러싸는 회랑이 없는 탓에 방형의 일곽은 형성되지 않는다. 그 대신 진입로상의 삼문, 중정과 좌우의 요사채, 그리고 주불전까지의 공간이 남북 종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정도이다. 회랑을 설치하지 않은 대신에 하단과 중단 사이, 중단과 상단 사이의 경계에는 좌우로 장행랑을 설치해서 주불전 일곽과 중정 및 요사채 일곽의 내밀성을 강하게 했다. 특히, 중정을 중심으로 북쪽 상단에 주불전을 앉히고, 그 전방 맞은편에 문루를, 중정 좌우에는 승려들의 거주처인 요사채를 앉혔다. 중정을 중심으로 4방향에 건물들이 둘러싸지만 모서리는 개방된다. 마치 남북 방향의 안채와 문간채, 그리고 동서 방향의 행랑이나 부속채가 안마당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살림집과 흡사하다. 부처의 히에로파니를 상징하는 당탑식 가람에다 승려의 수행과 거주를 위한 승원적 요소가 조합된 탓일 것이다.
사찰 진입로에 설치된 해탈문이나 천왕문, 진여문과 같은 삼문도 종래의 평지 가람과 달라진 것이다. 삼문은 가람을 뜻하는 산문과 혼용되기도 하지만 대개 3개 정도로 진입로 상에 설치된 문들을 지칭한다. 삼문은 가람 초입에서 주불전 앞 중정까지 이어지는 진입로 상의 단차가 생기는 곳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 문들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각 공간의 문지방(閾, threshold)처럼 통과의례의 역할을 한다. 성스러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속진을 씻어내도록 하는 일종의 필터(filter) 역할이다. 그 중에서도 불국토를 상징하는 만다라의 사방 문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대표적이다. 몇 차례의 분절과 필터링에 의해서 속진을 걸러내는 셈 이다. 길게 늘여 놓은 진입로와 삼문은 세속으로부터 성스러운 세계를 이례적이고 차별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긴 진입로와 삼문은 회랑이 없는 가람에서 히에로파니를 고양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후기의 산지가람들에서는 하나 같이 일주문·해탈문·천왕문·불이문 등을 두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정형적인 평지가람에서는 삼문이 설치된 예가 없다. 산지가람의 전유물임에 틀림없지만 대부분 조선 후기에 창건된 것들이다. 이전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언제부터 삼문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원각사를 비롯한 왕실 원당사찰에서 삼문이 건립되고, 1456년(세조 2) 수미가 국왕의 명으로 중창한 영암 도갑사의 해탈문이 1473년(성종 4)에 건립된 바 있다. 조선 초기의 원당사찰이 임진왜란 이후 산지가람들의 삼문 건립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조선 초기 원당사찰은 평지가람에서 산자가람으로의 오랜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