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03. 종류별 유교건축

정려(旌閭)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던 집 앞에 문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한다.

정려제도는 고려시대에도 있었으나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역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치국의 도리를 유교적 윤리관에 바탕을 두었고 아울러 사회교화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도 펼쳐나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정려정책이다.

<조유(趙瑜)의 효자도>   
조유는 순천 주암리에서 500년 이상 세거해 온 옥천 조씨 문중의 입향시조이다. 효행이 매우 뛰어나 세종이 정려를 내렸다. 대문칸 앞에 정문이 있다.

조선의 여러 왕 중, 특히 세종 시대에는 예전부터 전해 오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효자·충신·열녀의 행적을 모아 그림을 곁들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여 유교의 실천 윤리를 보급하고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중종은 연산군시대에 파괴된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충신·효자·절부들에게 정려를 내렸다. 중중 이후의 역대 왕들도 역시 충효의 정책을 계속 펼쳐나가 많은 정려가 속출하였다.

<경상남도 함양 정여창 가옥 문간채 상부의 효자와 충신 명정 현판>   
<경상남도 함양 하동 정씨 구충각>   

특히, 선조 이후로는 임진왜란 등 각종 재난시에 순절한 충신, 열사들이 많이 정려되었고, 또한 왜군의 만행에 정절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많은 절부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정려되었다.

정려는 비록 개인에 대한 포상이지만 그의 성격은 문중이나 마을의 경사로 여겨졌기에 정각의 위치는 대개 잘 보이는 마을 입구의 길목에 위치했다. 한편, 마을 입구에 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정려와는 달리 정려를 받은 후손의 살림집 대문간 앞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념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가옥의 대문간채 중앙에 세운 경우도 전국적으로 여러 가옥에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는 경상남도 함양의 정여창 가옥이다.

<대구 달성 현풍 곽씨 정려각>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까지 현풍 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은 정려각이다.
<표> 조선시대 왕대별 정려 현황
유형
효자
(효녀 포함)
충신 열녀 미상
태조 12   7   19
정종 1   1   2
태종 19   20   39
세종 145 2 67 26 240
문종          
단종 54   22   76
세조 1   1   2
예종 3   1   4
성종 65   27   92
연산군 2   1   3
중종 191 11 87   289
인종          
명종 76 1 19   96
선조 21 30 8   59
광해군 4 9 5   18
인조 292 72 209   573
효종 30 7 8 60 105
현종 119 51 37   207
숙종 59 139 56 519 773
1,094 322 576 605 2,597
✽자료: 『조선왕조실록』

정각의 규모는 보통 정려자가 1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명정 현판 1개 정도를 걸어둘 수 있는 앞면1칸, 옆면 1칸 크기가 많다. 그러나 3 효자, 7충 등 여러 명의 정려자가 있을 경우는 규모가 커져 앞면이 3칸, 7칸 등으로 늘어난다. 정려각 4면은 보통 명정 현판이 잘 보이도록 벽체를 두지 않고 홍살만을 꽂아둔다. 건축양식은 주로 장식적으로 화려하게 초각이 있는 익공식이 많이 채택되었다.

조선시대가 끝나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효자와 열녀 등에 대한 관심을 지속되어 주로 문중 중심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이 당시 정려는 각 없이 비만세운 경우가 많다.

[필자] 김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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