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회제도의 개혁
조선의 전통사회는 양반중심의 신분제사회로 특징지워 질 수 있다. 그런데 군국기무처는 전통적 신분제도와 문벌 및 출신지역을 가려 개인을 差待하는 관습의 철폐에 착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실시한 사회제도의 개혁은 반상·귀천을 초월한 능력본위 인재등용과 평등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질서의 수립, 노비 및 여타 천민층의 점진적 해방, 서얼의 後嗣權 획득과 기술직 中人들의 宦路 확장, 그리고 여성의 대우 향상과 혼인풍습의 개선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첫째, 군국기무처는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양반제도의 혁파를 지향하는 각종 의안을 의결·발포하였다. 7월 30일에 군국기무처는 “문벌·반상의 등급을 劈破하고 귀천에 관계없이 인재를 選用할 것”이라 하여 문벌·반상의 신분적 차이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정책을 천명하였다. 이 의안은 반상의 계급적 차별 내지 양반제도의 혁파를 천명한 것이라기 보다는 앞으로 반과 상, 귀와 천을 가리지 않고 능력본위로 인재를 뽑아 정부의 관료체계를 충원하겠다는 정책을 선언한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갑오경장 개시 직전인 1894년 7월 24일에 “대저 국가를 도모하는 도리는 用人으로 爲先하나니 四色偏黨의 論을 일체 타파하고 門地에 구애됨이 없이 오직 어질고 재주 있으면 이를 천거할 것이며, 무릇 내치·외무에 의한 것은 時宜를 힘써 쫓을 것이니 대소 臣工은 각각 奮勵之義를 닦아 극히 予의 寡昧로써 정치를 새롭게 하려는 것을 도와 급히 보국안민의 책을 도모함이 가하니라”429)라는 조칙이 반포되었을 뿐 아니라, 갑오경장기간 양반제도 자체를 혁파하겠다는 혁명적 내용의 개혁안이 나오지 않은 채 ‘능력본위 인재등용’을 강조하는 국왕의 조칙 내지 교서만 여러 번 반포되었기 때문이다.
군국기무처는 “文武尊卑의 구별을 폐지하되 다만 품계에 따라 相見儀를 갖추도록 할 것”이라 하여 문존무비의 전통을, 그리고 “대소 官·士庶人의 等馬의 規를 일체 豁除하되 무릇 고등관을 만나면 다만 길을 양보할 것”이라 하여 官尊民卑의 폐습을 타파하려는 개혁안을 의결하였다. 또한 “비록 평민일지라도 진실로 利國便民할 起見을 가진 자는 군국기무처에 상서하여 회의에 부칠 것”이라 하여 평민에게 제한된 범위의 참정권을 인정하였으며, “무릇 諸 의안으로 이미 윤허 시행토록 한 것은 邦憲으로 삼아 認眞 시행하되 만약 違戾者가 있으면 귀천을 불구하고 據律 論罰하여 단연 容貸치 않을 것”이라 하여 모든 국민이 법앞에 평등함을 명백히 하였다. 마지막으로, “무릇 官人이 비록 고등관을 지낸 자라도 休官 후에는 任便 營商할 것”이란 의안을 가결해 자본·지식·경험 등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춘 양반관료들로 하여금 사·농·공·상의 전통적인 직업적 편견에 구애받지 말고 근대적 기업에 참여할 것을 권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안들은 총체적으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을 재천명하고 나아가 평등주의적·민주주의적 사회질서 내지 근대적 경제질서를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둔 개혁안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군국기무처는 노비 및 천민층의 해방과 관련하여 “公私 노비의 典을 일체 혁파하며 人口의 販買를 금할 것”과 “죄인 자기 외의 연좌율을 일체 勿施할 것”, 그리고 “驛人·倡優·皮工의 면천을 許할 것” 등 일련의 혁명적 개혁안을 제정·공포하였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조선의 노비제도가 비인도주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遺制이기 때문에 이를 완전히 타파해야 된다고 주장한 군국기무처 의원들의 이상주의적 동기, 그리고 동학농민봉기에 노비를 포함한 다수의 천민들이 가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이들을 민심수습 차원에서 무마하려 한 대원군 등의 정치적 동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취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의안들을 종합해보면, 모든 노비와 일부 천민이 해방되고 또 노비의 매매금지 및 연좌율 폐지를 통해 천민의 재생산이 금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세계에서 드물게 가혹하고 악랄했던 연좌율을 폐지하고 역인·창우·피공을 면천한 조치는 역사적으로 획기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이 같은 사회제도 개혁에는 몇 가지 중요한 한계성이 있었다. 그들은 면천의 수혜대상에 노비 이외에 역인·창우·피공만을 골라 지적함으로써 이 범주에 속하지 않은 妓生·內人·牢令 등 다른 천인계층은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노비제 혁파와 천민의 면천을 과감하게 실천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각지에서 해방된 노비들이 과격한 하극상 운동을 벌리자 노비의 즉각적인 해방을 중단하거나 점진적으로 추진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 점은 1894년 9월 9일에 전국 지방관에게 시달한<內務衙門訓令>에서 노비가 주인을 경멸하는 행위를 보일 때 이를 적극 억제토록 지시한 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430) 이렇게 따져 볼 때, 군국기무처는 9월 9일 이후 지방관들로 하여금 노비해방을 중단하거나 점진적으로 추진하는 자세를 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노비해방 조치는 실은 1894년 이전, 멀리 임진왜란 이래 조선왕조가 꾸준히 추진해 온 노비해방조치-특히 1801년의 內寺奴婢制 폐지와 1886년의 奴婢世役制 폐지-의 연장선상에서 취해진 하나의 완결조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갑오경장 때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이미 반포된 노비해방령을 철저히 시행하는 것과 노비의 재생산을 금지하는 것, 그리고 노비 이외의 다른 모든 천민신분층에게 면천의 혜택을 주는 것 등이었는데 군국기무처가 취한 조치들은 바로 이러한 미해결과제의 완결을 겨냥한 것으로 그 법제사적 의의에 한계가 있다.
셋째, 군국기무처는 서얼 및 중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관한 의안들을 의정·반포했다. 이러한 조치는 군국기무처 의원 가운데 서얼 및 중인출신이 많았다는 사실과 적지 않은 관련이 있다.
우선 군국기무처는 7월 30일에 “嫡妻와 妾에 모두 자식이 없은 뒤에 비로소 率養을 許하여 舊典을 申明할 것”이란 의안을 가결한 데 이어 그 다음날인 8월 1일에 이 의안 마지막 부분에 “令前의 것을 追論할 수 없다”는 일절을 추가함으로써 가정내에서의 서얼의 후사권을 확인하였다. 또 “만약 嫡長子가 자손이 없으면 衆子가, 중자가 자손이 없으면 妾子가 제사를 받든다”는≪경국대전≫의 奉祀조와 “嫡妻와 妾에 모두 아들이 없는 자는 官에 신고하여 同宗의 支子를 세워 잇게 한다”라는 立後조 등 구전의 申明을 의무화함으로써 서얼차대 해소문제를 적어도 법적으로 완결시키려 했다.
다음으로, 군국기무처는 “각 府衙의 칙임관을 派定한 후 먼저 都察院에 회동하여 각 사의 吏胥를 시험하여 文算 才諝가 있는 자는 실시일을 기다려 재능에 따라 관직을 줄 것”이라는 의안을 채택함으로서 유능한 기술직 중인을 될수록 많이 신정부의 관료체제에 흡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무릇 醫譯雜職 및 賞加人으로 각 府衙의 奏·判任官이 된 자는 모두 新授階級에 따라 시행하되 原資에 구애받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의안은 신규 절차를 거쳐 주·판임관이 된 중인들의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기술직 중인들이 많이 발탁·서용되지 않자 “다만 엎드려 생각컨대 정치를 경장하고 百度를 維新하여 비록 비천한 무리라도 진실로 재능이 있으면 모두 嚮用될 수 있는데 오직 世累한 사람만이 홀로 鴻渥을 均霑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비단 取人을 넓게 하는 것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發政 施仁하는 端에도 欠이 있는 것이어서 天聖에 再奏하는 것이 급히 聖聰을 돌리어 폐기된 向隅의 무리로 하여금 聖澤을 고루 입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중인출신 관료들의 불만을 표시하고 그들을 위한 개혁의 추진을 촉구하였다.
넷째, 군국기무처는 “남녀의 조혼을 즉시 엄금하되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후에 비로소 嫁娶를 허가할 것”과 “寡女의 재가는 귀천을 무론하고 그 자유에 맡길 것” 등 조혼 금지와 과부 재가허용에 관한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여성의 사회적 대우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사회의 악폐 중의 하나였던 조혼을 금지한 이 같은 조처는≪경국대전≫의 可婚 규정이 제정된 이래 초유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리고 각종 폐단을 불러일으켰던 재가금지규정을 철폐한 사실 역시 전통적인 사회·가족제도내에서 여성의 열악한 지위를 향상시키는 단초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