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제1차 개혁의 내용
(1) 대외관계의 개혁
군국기무처의안 중에는 의원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드러내는 의안 6∼7건, 그들의 반청 독립사상을 나타내는 의안 2건, 그리고 그들의 對日 종속성을 드러내는 의안 10여 건이 들어있다.
군국기무처 의원은 회의 벽두에 議[定]案 제1호로서 “금후 국내외의 公私 文牒에 開國紀年을 쓸 것”405)이라는 표현을 빌어 조선의 독립을 간접적으로 천명하였다. 이 의안이 채택된 날짜가 청·일간에 선전포고가 있기 이틀전인 7월 30일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 내용이 상당히 대담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군국기무처에서는 신설될 學務衙門 관제안에서 編輯局의 職掌을 “국문 綴字, 各 국문 번역 및 교과서 편집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라 규정하고, 또 “무릇 국내외 公私 문자 중 歐文으로 상용되는 외국 국명·지명·인명이 있으면 모두 국문으로 번역하여 시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교과서와 공문서에서 한글(국문)을 사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아가 군국기무처는 군인의 정신교육과 관련하여 “군무아문에서 국문으로 군졸교과서를 편찬하여 매일 시간을 정하여 교수케 할 것”이라는 의안을 결의하였다. 이것은 군인의 애국애족(爲國護民) 함양을 위해서 한글로 교과서를 만들어 교육할 것을 건의한 것으로서 주목을 요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압력에 양보하는 여러 의안을 채택하였지만 동시에 “국내 토지·산림·광산은 본국 입적 인민이 아니면 점유 및 매매를 허가하지 말 것”, “무릇 외무아문에서 외국과 교섭하는 중대한 사건, 즉 立約·聘雇 등의 일은 該 아문의 대신·협판이 공동으로 辦理하여 총리대신의 인가를 거쳐 시행할 것” 등의 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 특히 일본의 이권 내지 국권침탈을 막으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결의의 연장선상에서 군국기무처는 오랫동안 조선의 자주·독립을 저해하였던 청국과의 관계를 종래의 宗藩관계에서 평등관계로 바꿈으로써 청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締約 각국과 자주·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외교를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의안 제2호인 “청국과 약조를 개정한 뒤 특명전권대신을 열국에 파송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의안의 구체적 내용은 임오군란 이후 청국이 조선의 종주국으로서 체결한<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奉天與朝鮮邊民交易章程>및<中江通商章程>등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 나아가 1887년 이후 청국 주차관(袁世凱)의 방해로 인하여 좌절된 바 있는 서구 체약국에 대한 공사 파견계획을 부활·실현시킨다는 것이었다.406) 8월 12일에 채택된 또 하나의 의안, 즉 “이제부터 萬國通例를 준수하여 각국 사절이 陛見할 때 가마를 타고 待候所 門外에 이르는 것을 준허할 것”은 그 동안 원세개에게만 특별히 허여되었던 외국 사절의 왕궁내에서의 乘轎權을 각국 외교관에게 공평히 허용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청국의 종주권 부인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군국기무처 의원은 대체로 자주·평등의 독립외교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일본에 대해서는 편파적인 저자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첫째, 군국기무처는 청일전쟁이 선포된 8월 1일에 “금번 일본정부에서 出力하여 우리 고유의 자주를 保認하였으므로 급히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후의를 치사하고 隣好를 더욱 돈독히 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의 조선 출병을 변호하고 전권대사를 빨리 파견하여 대일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9월 3일에는 “현재 본국과 일본은 관계가 綦重하여 교제를 더욱 敦密히 해야 하므로 금번 報聘大使는 평소 聲望이 두드러진 사람을 속히 파견하며, 駐箚東京辦理公使를 감하하여 교섭사무에 익숙한 사람을 전권공사로 차송할 것”이라 하여, 우선 일본에 보빙대사를 파견하여 致謝하고 또 주차동경판리공사를 전권공사로 격상·대체함으로써 양국간의 ‘綦重한 隣好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8월 1일에 채택된 의안에서는 “日兵이 각 지방에 留駐하는 것은 청병을 방비하기 위한 것이어서 조금도 惡意가 없으므로 무릇 우리 士民은 이를 洞悉하여 相安 無事의 뜻을 각 지방에 行會할 것”이라고 하면서 일본군의 조선 침략이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극구 변호하고 이 점을 각 지방 국민에게 주지시킴으로써 민중의 반일감정을 무마하려 하였다.
다음으로, 군국기무처는 일본측의 군사적 내지 경제적 요구에 굴복하여 일본인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초빙하고 일본식 화폐제도를 도입하며 防穀令을 철폐하는 등의 내용을 지닌 의안들을 채택하였다. 즉 8월 15일에 “각부아문에 각각 外國雇員 1인을 두어 고문케 할 것”이라는 의안으로써 정부 8아문내에 외국인(즉, 일본인) 고문관 한 사람씩을 고빙할 것을 의결하였고, 9월 5일과 21일에 이의 실현을 촉구하는 의안을 추가로 채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8월 26일에는 “親衛營을 장차 설치함에 하사관 敎成 일절이 가장 긴요한 바 마땅히 材力 健强한 자 2백인을 뽑아 교사를 延請하여 훈련케 할 것”이라 하여 친위영이라는 신식 근위대를 발족시키되, 이에 앞서 200명의 하사관을 선발·교성하고 이들의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부터 교관(敎師)을 초빙할 것을 의결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중에 악명을 얻게 된 訓練〔鍊〕隊의 濫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8월 10일에 “挽近 각 지방관이 자주 미곡을 禁阻하므로 급히 申飭 弛禁하여 유통을 편하게 하며, 水旱·兵戎으로 降旨하여 특별히 금하는 외에는 일절 勿禁하는 뜻으로 각도에 행회할 것”이라 하여 평상시에 지방관이 임의로 방곡령을 발포할 수 없도록 조처하였다.
그리고 8월 11일에<新式貨幣發行章程>을 채택함으로써 銀본위의 일본식 화폐제도를 도입하기로 하되, 우선 “신식화폐를 많이 주조하기에 앞서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다. 단 본국 화폐와 동질·동량·동가인 것만 통행을 許한다”(제7조)라고 하여 조선내에서의 일본화폐(외국화폐) 유통권을 인정하였다.407)
그 외에도 군국기무처가 일본측 압력 때문에 채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의안이 두 가지 더 있다. 즉, 당시 궁중에서 반일운동을 획책하고 있던 미국인 고문관 르젠드르(Charles W. LeGendre, 李善得)를 해고하는 것과, (장차 일본인을 조선 海關에 기용하기 위한 준비조치로써) 3항 “해관에 고빙된 서양인 해관직원들로 하여금 조선정부로부터 새로 인준을 받도록 하라”는 의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의안은 모두 미국과 러시아공사관의 후원을 받고 있던 국왕이 ‘姑除’로 처리하면서 윤허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효치 못하였다.
일본의 정치·군사 및 경제상의 이익을 도모하는 이 같은 일련의 의안은 일본공사 오오토리와 조선의 외무아문대신 金允植간에 8월 20일과 8월 26일에 각각 체결된<朝日暫定合同條款>및<朝日盟約>에 포함시키지 못한 사안들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오오토리공사는 이 같은 의안과 조약의 형식을 빌어서 그가 6월 26일 이래 ‘내정개혁’ 권고란 미명 아래 조선정부로부터 탈취하려고 기도했던 정치·군사·경제상의 이권들을 모두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군국기무처 의원들은 한편으로는 각국에 대해 자주·평등한 외교를 펼칠 것-특히 청국에 대한 宗藩관계를 단호히 단절할 것-을 강조하는 입장을 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이 도발한 청일전쟁을 비호·방조하고 또 일본이 강박하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요구에 쉽사리 굴복하는 친일 저자세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