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몽고 6·7차 침입기의 농민봉기
세 차례의 치열한 전쟁을 끝내고 몽고가 내분에 휩싸임에 따라 당분간 고려는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농민들은 다시 지배층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경우는 최우의 아들들인 萬宗·萬全의 횡포였으니, 그들은 경상도 진주의 斷俗寺와 전라도 綾城縣의 雙峰寺에 거주하면서 무뢰배를 불러모아 문도로 삼아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를 실시하였다. 그들이 모은 곡식이 경상도에서만 무려 50만 석이 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235) 만전·만종 형제의 탐학은 1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으니, 이를 보다 못한 형부상서 朴暄이 최이(우)에게 고하기를, “북쪽군사가 해마다 쳐들어와 민심이 불안하여 비록 은덕으로 어루만진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종·만전의 무리가 백성의 재산을 긁어모아 원망이 대단하여 남방이 소요스러우니, 만약 적의 군대가 이르면 모두 반역하여 투항할 우려가 있습니다”라고 하여 제재를 가하기를 요청하였다.236) 이제 고려정부의 농민수탈은 극에 달하여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오히려 최우는 박훤을 흑산도로 귀양보내고 만전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으니, 이로 보아 그 아들들의 행패는 최고 집정자의 묵계하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36년 11월, 최이가 죽고 崔沆이 집권하였다. 최항 역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보다는 백성의 수탈에 뜻을 두었으므로 이제 백성들은 몽고군이 오는 것을 도리어 기뻐할 지경이었다.237)
최항이 羅得璜·河公敘·李瓊·崔甫侯를 각 도에 보내어 宣旨使用別監으로 삼았다. 처음에 최이가 나득황의 무리를 여러 도에 보냈을 때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므로 최항이 처음 정권을 장악했을 때는 인심을 얻으려고 모두 파하였다가, 이때 다시 기용하니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겼다(≪高麗史節要≫권 17, 고종 39년 8월).
백성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최항은 그에게 아부하는 탐학한 관리로서 지방관을 삼아 백성들의 동요는 더욱 심각하여졌다. 더욱이 고종 40년 7월 몽고장수 也窟의 5차 침입부터 재개된 전쟁은 車羅大로 이어지면서 7년 동안 계속되어 농가의 피폐가 극에 달하였다. 민생의 파탄은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생활을 압박하였고, 이로 인한 집권자들의 탐학이 실정을 더욱 악화시켰다.238) 이같은 상황은 드디어는 지배층에 대한 반감으로 피지배층이 싸움을 포기하거나 자진해서 몽고에 투항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종 40년 8월에 발생했던 東州山城의 경우이다.
동주 방호별감 白敦明은 몽고가 침입하자 백성을 산성에 들어오게 하고 출입을 금하였다. 몽고가 아직 동주에 이르기 전이므로 고을 아전이 곡식을 수확하기를 청하자 백돈명은 아전을 죽이고 백성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분격한 백성들이 몽고가 침입해도 나가 싸우지를 않아 동주가 함락되었다(≪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0년 8월 계유).
동주처럼 지방관이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해 몽고에 함락된 경우는 椋山城, 笠巖山城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충주에서는 몽고군을 대파시킬 수 있었는데, 이는 방호별감 낭장 金允侯가“만일 죽음을 다하여 힘껏 싸운다면 귀천없이 관작을 제수하겠다”하고 관노들의 노비문서를 불태우자 이에 힘입어 주민들이 힘껏 싸워 이겼다고 한다.239) 당시 정부가 백성을 잘 안무하고, 청렴한 지방관이 효율적으로 백성을 이끌 수 있었다면 몽고군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백성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몽고 침입기 최후의 민란은 원주에서 발생하였다. 즉 원주의 安悅·松庇·敦正·唐老 등이 興元倉을 점령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240) 정부는 장군 尹君正과 낭장 權贊을 파견하여 토벌케 하여 그 주모자를 목베이고 추종자들은 섬에 옮겨 살게 하였다. 이 또한 고종 40년 이래 지속되어 온 전란으로 초근목피로 목숨을 부지하던 기민들이 중심이 되어, 흥원창의 곡식을 노려 봉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살해하고 몽고에 투항하는 고려인의 행렬은 계속 이어져 고종 45년(1258)에는 博州와 廣福山城에 피신했던 吏民이, 또한 그 해 12월에는 龍津縣 사람 趙暉와 定州人 卓靑이 和州 이북을 들어 몽고에 항복하였다. 동왕 46년에는 登州와 和州의 반민들이 동진국 군사와 함께 고려를 공략하였으며, 계속해서 艾島와 葛島에서는 驛人들이 몽고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같은 현상은 계속 이어져 원종 원년(1260) 정월 席島, 椵島에서도 일어났다.
전쟁 말기인 고종 45년과 46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같은 투몽사례는 강도정부가 대몽전략으로 추진하던 산성 및 해도에의 入保策에 대한 백성의 강경한 거부를 나타낸 것으로 특히 변경지대에서 빈발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입보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인하여 야기된 민생과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고려정부의 전쟁수행 능력이 농민들로부터 불신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민란의 변형된 형태로서, 궁지에 몰린 백성들로서는 몽고에의 항복 외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정부는 외세의 침입과 농민들의 저항의 양쪽 틈바구니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몽고에 투항하는 길을 택하여 왕실의 온존만은 구하려 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태도는 전 고려민의 저항에 부딪쳐 삼별초의 난이 발생하게 되었다.
12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 초는 농민·천인 등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억압에 정면으로 반발하여 구질서의 타파를 요구하던 시기였다. 초기에 그들은 단순히 탐학한 지방관의 교체 요구에서 출발하였으나 나중에는 신분제도 타파·토지겸병 근절 등 체제개혁 요구를 거쳐 새로운 국가건설까지 표방하였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근본 원인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계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농업기술의 발전에 따른 상경전의 증가는 농민의 경제적 수준을 향상시켜 농민해방을 앞당기게도 할 수 있지만, 고려사회의 경우는 생산력의 향상에 따른 소득의 증가가 지방관의 탐학을 가중시키고 권세가의 토지겸병에의 욕망만을 가속화시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농민들은 기존 소유하고 있던 토지마저 빼앗기고 전호로 전락하거나 유랑민이 되었으며,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던 농민들은 더욱 정부의 수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같은 토지소유관계의 근본적인 모순이 고려 무신집권기 전국을 휩쓸었던 농민항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또한 고려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지방관의 탐학과 더불어 권력자들의 정권 다툼으로 지배층이 농민항쟁을 효율적으로 제어할 수 없었던 점도 농민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는 한 요인이 되어 그 대표적인 농민항쟁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서북민의 봉기, 전주민의 봉기, 제주에서의 봉기, 운문·초전민의 봉기 그리고 경주민의 항쟁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전주와 제주민의 항쟁은 지방관의 탐학으로 인한 요역의 가중을 견디지 못하여 봉기한 것으로 민란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전주지역의 봉기에는 관노들이 합세하였다. 이들 관노들은 신분제의 탈피라는 목적을 가지고 항거했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들의 요구가 표면에 드러나지는 못하였다.
이에 비해 서북계와 운문·초전 그리고 경주에서는 토지소유관계와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불만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려정부에 저항하였다. 이들은 토지겸병의 심화에 따른 토지소유관계에 대한 모순이 고려사회체제의 모순임을 자각하고 대정부 항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들 내부에는 무신들을 축출하고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려 했던 조위총, 토호들의 세력확보를 목적으로 조위총과 함께 봉기했던 양계 도령, 농민들의 힘을 빌어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던 이의민, 신라부흥을 목적으로 삼은 경주 토호 등 각기 야심을 지닌 지도충이 농민봉기에 가담함으로써 지역에 따라 독특한 양상으로 항쟁은 발전하였다.
토지소유관계의 모순이 농민항쟁의 가장 큰 원인이라면 천민·노예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신분사회의 변동에 있었다. 이미 무신정권 이전부터 노예들에게 개별적인 관직 수여가 있었던 적이 있었으며 특히, 무신집권기에는 천민출신이 국가의 최고 책임자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거노비로서 토지경영을 통한 부의 축적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고려사회의 변화는 피지배층의 의식을 향상시켜 천민·노비 등의 신분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천민의 항쟁으로서는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진주 공사노예의 반란, 합주 노올부곡민의 봉기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적의 난이 가장 주목된다. 만적은 “公卿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으랴. …먼저 봉기하여 최충헌 등을 죽이자. 이어서 각각 그 주인을 쳐서 죽이고 賤籍을 불사른다면 공경장상은 모두 우리가 할 수 있다”라고 하여 노비제도를 폭력으로 없애려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탈취의 야망까지 드러내었다. 이 난은 공주 명학소민이 충순현으로의 승격에 만족하여 해산하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분제의 존립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당시 피지배층의 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진주의 경우에는 공사노예의 반란이 실패한 후, 주리인 정방의가 진주의 주도권을 잡아 진주민과 대립하는 독특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진주민은 奴兀部曲民과 연합하여 정방의에게 저항하였는데, 농민·천민이 연합하여 주리에 대항하는 모습에서 피지배계층 사이에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농민항쟁은 또한 지역간의 갈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즉 성주가 三登縣을 공격하려 했거나 경주가 영주를 공격하는 것은 고려 지방제도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主縣과 屬縣의 이해관계가 표출된 것으로 농민항쟁의 또 다른 모습을 나타내었다.
<李貞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