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근현대
역사란 꿈을 만들고 꿈을 실천해 가는 작업의 연속이다.389) 따라서 한국근대사는 중세나 고대의 어느 때보다 좋은 꿈(이상)을 가지고 그 꿈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시대가 되어야 했다. ‘좋은 꿈’이란 어떤 꿈인가. 그것은 인간주의의 실현을 말한다. 중세까지 인간을 구속했던 신분제를 벗고, 인간의 자유 평등을 구가하는 사회가 근대라고 생각한다. 자유를 정치에 적용했을 때 국민주권사상에 의한 민주공화국을 실현하는 것이고, 경제에 적용했을 때 자유로운 경제행위를 추구한 자본주의를 말하고, 사회적으로는 인권을 보장한 사회를 말한다. 처음에는 그러한 자유가 평등하게 실현될 것으로 믿었다. 그것을 하나로 묶어 민주주의라고 말하자.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을 발견하여 신분제를 거부하고 자유 평등에 대한 생각이 싹텄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 생각을 실현할 민주주의는 어떻게 형성하고 성장시켜 왔던가. 거기에서 한국근대사의 중심과 중심의 흐름인 근대사의 본류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근대사 본류의 형성과정에서 제국주의의 흙탕물이 덮치고 말았다. 그래서 한민족은 흙탕물 속을 헤엄치며 인간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독립운동의 역사이다. 독립운동은 인간의 길을 찾기 위한 민족적 노력을 말한다. 1945년 해방이 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물이 맑아질 수는 없었다. 그래서 흙탕물 찌꺼기를 없애가며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새롭게 일으켜야 했다.390) 그것이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역사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조선 후기에 인간의 평등을 노래한≪春香傳≫이 나왔다는 것은 근대사의 새벽이 가까웠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어 정부에서 간행한≪秋官志≫에서 노비제를 비판했는가 하면≪備邊司謄錄≫이나≪正祖實錄≫같은 정부 간행물에서조차 民의 사상이 고양되고 있었다.391) 그때 서민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라든가, 영조나 정조와 실학자들의 개혁사상이 각 분야에 걸쳐 새로운 기운을 일으켰다던가, 수리시설이나 이앙법의 발달 등에 따른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고, 상평통보를 중심의 화폐 유통이 활발했던 것처럼, 상업이 발달하고 있었고, 농업이나 수공업에서 상업성 경영 추구가 확산되는 가운데 京江商人·松商·灣商이나 혹은 褓負商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부상하고 있었다는 것이 자유로운 경제행위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으로 자본주의가 싹트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실학연구와 함께 자국사 연구로 나타난 민족의식의 부상은 자기발견 곧 인간의 발견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근대사가 동트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뒤이은 세도정치의 반동으로 봉쇄당한 것을 보면 근대사의 새벽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세도정치와 같은 반동은 중앙정치에 국한된 것이 아닐 정도로 전국에 퍼져 있었다.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문중서원이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 세도정치와 역사적 궤를 같이하는 현상이었다.392) 그러니까 근대사적 동력은 반동체제에 눌려 잠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전면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韓致奫(1765∼1814)·丁若鏞(1762∼1836)·金正喜(1786∼1856)·李圭景(1788∼?)·崔漢綺(1803∼1877)·金正浩·李尙迪(1804∼1865)·朴珪壽(1807∼1876)의 실학 저술이나 활동이 세도정치기인 19세기에도 계속되고 있었던가 하면, 서민문화도 끊임없이 발달하고 있었다. 세도정치의 반동체제로 말미암아 활기를 띌 수가 없어 분산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후 다시 근대사적 계기가 마련된 것은 학자에 따라 1860년대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1876년 개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국주의 역사가나 종교가들은 후자의 주장을 고집하고 반제국주의 학자나 민족주의 역사가들은 전자를 고집한다. 이와 같이 한국근대사 연구는 출발부터 제국주의 논쟁에 휘말려 있다.
필자는 1860년을 전후하여 근대사가 열렸다고 보고 있다. 1850년을 전후한 김정호·최한기 등의 활동에서 보듯이 근대적 저술이 나오고 있었던 사실도 주목하고 싶다.393) 다음에 이미 많은 연구에서 검증된 1860년을 전후한 사회변동이 근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876년 개항으로 역사가 변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근대적 변동은 일어나고 있고, 근대를 인간주의 시대라고 보았을 때 비인간의 표본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개항에 근대사의 출발점을 설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394) 그래서 1860년을 전후한 시기에 근대사의 기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전개되었다.
① 근대적 사회변동과 자주 개혁의 시련(1860년 전후∼1910) ②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독립운동(1910∼1945) ③ 해방정국의 혼돈과 현대사의 전개(1945∼현재)
389) | 조동걸,<역사를 어떻게 볼것인가>(≪내일을 여는 역사≫3, 신서원, 2000), 23쪽. ―――,<역사란 무엇인가>(≪그래도 역사의 힘을 믿는다≫, 푸른역사, 2001), 13쪽. 위의 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작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역사는 꿈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②역사는 실천의 연속이다. ③역사는 발전한다. ④역사는 다양하게 발전한다. ⑤역사는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축을 만들며 발전한다. |
---|---|
390) | 역사는 아무리 새로운 세상이라고 해도 전시대와 혼합해서 존재한다. 밥을 먹다가 손님이 오니까 새로 밥상을 차리듯이 말끔하게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먹던 밥과 반찬에 덮치기로 구시대와 새시대가 혼재하며 발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도 생각하게 되고 도전과 응전의 원리도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구시대를 정당화하면 역사는 퇴보한다. |
391) | ≪備邊司謄錄≫과≪正祖實錄≫이나≪明南樓叢書≫에 나오는 ‘民國’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民’과 ‘國’을 말하는가, 아니면 ‘民國’을 말하는가에 대하여 학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어느 쪽이라고 하더라도 ‘民’의 위치가 상승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李泰鎭,<大韓帝國 皇帝政과 民國 정치이념의 전개>(≪韓國文化≫22, 서울대 韓國文化硏究所, 1998). ―――,<‘御旗’ 태극팔괘도의 유래와 민국치 이념>(≪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258∼260쪽. |
392) | 李海濬,<門中書院 건립의 性格>(≪朝鮮後期 門中書院 硏究≫, 국민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4), 85쪽. |
393) | 崔漢綺는 1837년≪靑丘圖≫, 1857년≪地球典要≫를 내고, 김정호는 1864년에≪大東輿地圖≫와≪大東地志≫를 냈다. |
394) | 근대화를 볼 때 인간주의를 외면하고 경제의 수치를 기준하여 설명하면 형식 논리에 빠져 근대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오늘날 포스트 모더니즘이 제기된 것도 근대주의가 경제의 계량적 성장을 표준한 나머지, 인간 가치를 기준한 역사발전의 본질이 아닌, 국부 발전론에 치우쳤던 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경제발전이 있었다고 해도 경제발전은 경제발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을 목적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역사의 논리와 평가는 인간주의에서 출발해야 하고 다음에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총체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