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1) 구석기유적의 분포
우리 나라의 구석기문화에 대한 연구는 광복 이전인 1935년 두만강가에 있는 종성 동관진(온성 강안리)유적의 상삼봉에서 비롯한다. 그 곳에서는 홍적세(기)의 하이에나속·말사슴·들소와 코뿔이(소) 등의 뼈화석이 출토되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동관진유적의 조사보고는 당시의 연구수준과 시대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상당히 높은 단계에서 고생물학적 조사연구, 층위의 구분 시도, 석기와 뿔연모의 수법, 형태에 관한 고고학적 분석, 화석의 정도(化石度)가 연구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사관으로 그릇된 역사인식의 논리 때문에 부정되었고, 이와 같은 부정 일변도의 자세는 광복이 된 다음에도 계속되어 왔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석기연구는 처음부터 잘못된 시대상황 아래에서 이루어져 왔기에,「구석기」에 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과 이해가 편견 속에 묻히게 되어, 구석기학사에서「잃어버린 시간」으로 되어버렸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석기문화 연구는 그 시대와 문화의 부정에 대한 긍정의 답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 역사의 상한을 신석기시대에서 구석기시대로 올려 놓는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 학문의 장을 세계로 펼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부정 속에서 출발한 석장리유적이 지니는 의의와 위치는 매우 크다 하겠다. 이 유적을 10년간에 걸쳐 연차사업으로 조사·발굴하여 구석기연구에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하여 결실을 거둘 수 있게 된 사실은 우리 나라 구석기의 학사적인 입장에서도 그 위치를 높이 살 만하다.
광복 이후 우리의 손으로, 자생적으로 시작한 구석기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많은 성과를 얻어, 남북한을 통틀어 30개 이상의 유적이 발굴되었으나, 분단으로 인하여 남북한이 제각기 따로이 조사·연구를 전개함에 따라, 우리 나라 구석기유적의 연구에 대한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럼에도 구석기유적의 발굴 계기가 된 선봉 굴포리유적(1963∼1964년 발굴)과 공주 석장리유적(1964∼1974·1990·1992년 발굴)이 모두 한데유적이라는 점과, 같은 시기에 우리의 손에 의해 조사되었다는 점이나, 층위유적이면서도 집터(굴포 1기, 석장리 1지구 1호 집터)유적을 찾아 보고하였다는 점에서 같은 연구과정의 특징을 찾을 수 있다.
10년간 연차 발굴로 조사된 석장리유적조사는 바로 동굴유적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었는데, 그렇게 하여 찾게 된 유적이 제천의 점말 용굴이었다. 이 유적이 있는 충북 일원에는 조선계와 옥천계로 발달된 석회암지대가 잘 형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지질구조에는 자연동굴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석회암동굴은 층위가 분명히 구분되고, 동·식물상의 자료들이 잘 분포되어 있는 이점이 있어서, 이 용굴의 발굴 계기는 구석기문화에 대한 관심을 석기 중심에서 고동물·고식물 등의 자연환경과 인간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진전되게 하였다. 이 연구가 계속되면서 충북지방의 석회암동굴에 깊은 관심이 모아져, 청원 두루봉동굴을 비롯하여 단양지방의 상시바위그늘·금굴·구낭굴 등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한편 충주댐이 건설되는 남한강의 수몰지역에도 집중적인 조사로, 단양 수양개·제천 창내·명오리 큰길가 등의 한데유적과 단양 금굴의 동굴유적이 발굴되어, 이 지역에는 동굴유적과 한데유적이 어우러져 밀집되어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로 밝혀진 연구결과로는 유적의 밀집성뿐만 아니라, 이미 멸종된 동물화석을 포함하여 많은 화석자료들이 출토되어 우리 나라는 물론 아시아 구석기학계에 훌륭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들 유적의 가장 밑층에서부터 전기·중기·후기 구석기 등의 문화층들이 층위로 있음이 밝혀지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기 구석기(단양 금굴)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시원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들 동굴유적에서는 거의 동굴마다 사람뼈가 출토되어, 우리 겨레의 뿌리(고인류)연구에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성격과 문화적 특징들은 국가에서 설정한 중원문화(권)의 핵심적인 성격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70년대 후반에 찾게 된 임진강(한탄강)유역의 전곡리유적은 국가차원에서 실시하여 여러 기관이 조사에 참가하는 대규모의 발굴이었다. 아슐리안계통의 훌륭한 주먹도끼가 다량으로 출토되어서 더욱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고, 또한 이 유적을 중심으로 하여「전곡리문화」라는 독특한 학문성과를 얻게 되었다. 이 조사에 참가한 조사자들의 관심은 부근으로 확대되어, 파주 금파리와 주월리 등의 한데유적에서 좋은 석기와 유구를 발굴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1980년대 중반에 곡성 제월리의 구석기유물에 대한 보고가 있은 후, 섬진강에 건설되는 주암댐수몰지역 조사로 승주 곡천유적에서 구석기문화층이 보고되었으며, 승주 금평·화순 대전 등지에서 잔석기(細石器)문화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화순 대전유적에서는 완전한 집터까지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게 되고, 이것은 이전 복원되었다. 이 문화적 성격은 거창 임불리·부산 해운대 등지에서도 찾아져, 남부지역에 잔석기문화전통이 넓게 펼쳐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이 특징은 일본 규슈지방과도 연결되어 앞으로 연구가 주목된다.
한편 북한에서는 선봉 굴포리조사 이후, 상원 강둑을 보수하는 공사과정에서 찾게 된 상원 검은모루유적에서 상당히 많은 양의 고동물화석자료와 함께 석기가 발굴되면서, 동굴조사에 모든 관심을 쏟게 된다.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동굴조사운동을 벌여 200개 이상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사는 평양이 문화와 역사의 발상지 또는 기원지라는 주장을 펴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발달된 상원계의 석회암동굴만 발굴하였는데, ’70년대 조사된 지역으로 상원 청청암, 덕천 승리산, 평양 대현동·만달리 등과, ’80년대의 용곡동굴·승호동굴을 대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사들로 석회암동굴유적에서 주로 출토되는 많은 고동물화석과 고인류화석의 발굴은 북한 구석기학계의 큰 특징으로 지적되겠다.
이렇듯 우리 나라의 구석기유적은 주로 대동강유역과 남한강 일대에 밀집되어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아울러 금강·한탄강·섬진강가와 경기도·강원도의 내륙지역에서도 구석기유적이 찾아져 우리 나라의 전역을 분포의 범위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지도 1>). 이러한 점에서 우리 나라의 구석기시대에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전지역에서 삶을 꾸려 나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발굴·보고된 구석기유적 가운데 성격과 위치에 따라 분류하여 고찰해 보겠다.